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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종훈의 근대뉴스 오디세이] "ㄹㄴㄴㄴ해 ㄷ달 ㅊㅈ날 남", 상해의 낯선 한글 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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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종훈 19세기발전소 대표·아키비스트
[송종훈의 근대뉴스 오디세이] "ㄹㄴㄴㄴ해 ㄷ달 ㅊㅈ날 남", 상해의 낯선 한글 묘비
1924년 김구 부인 최준례 상하이서 사망
동포들, 십시일반 성금 모아서 묘비 세워
김두봉, 한글로 비석에 생몰연월일 기록
아라비아 숫자 대신 한글 자음 순서 활용

1924년 2월 18일자 동아일보에 낯설은 비문이 적힌 묘비 사진이 한 장 실린다. '김구(金九)의 부인 최준례(崔遵禮) 여사의 비석'이란 제목의 사진이다. 비문은 "ㄹㄴㄴㄴ해 ㄷ달 ㅊㅈ날 남"으로 시작된다. 순 한글체다. 비문은 동지이자 한글학자인 백연(白淵) 김두봉(金枓奉)이 지은 것이다. 그런데 비문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알고 보면 멋진 우리말 비문이다.

동아일보는 다음과 같이 비문을 설명한다. "이 사진은 요즘 보도한 바와 같이 사회를 위하여 무한한 고초와 분투하는 남편을 만나서 남이 겪지 못할 고생으로 간장을 녹이다가 몇천 리 밖인 다른 나라에서 이 세상을 떠난 김구(金九) 씨의 부인 최준례(崔遵禮) 여사의 무덤에 세운 빗돌이다. 이 비(碑)는 상해에 있는 동포들이 그의 40살 평생의 고적(孤寂)하고 간난(艱難)한 경우를 불쌍히 여겨 넉넉하지 못한 주머니를 털어 돈을 모아서 세운 것인데, 조선 어학자 김두봉 씨가 지은 순 조선문의 비문으로 썼고, 이 빗돌 뒤에 있는 늙은 부인은 그의 시어머니 곽씨(郭氏·66)이요, 모자 쓴 남자는 그 남편 김구(49) 씨요, 오른편에 있는 아이는 큰아들 김인(金仁·5)이요 왼편에 있는 아이는 그 둘째 아들 김신(金信·2)이다."

당시 최준례 여사의 장례에 관한 것은 국내 언론에는 소개된 것이 없지만 미국 샌프란시스코 교민단체인 국민회의 기관지로 창간한 신문인 신한민보(新韓民報)에 기사가 하나 나와있다. '김구(金九)씨 부인 최(崔)여사의 장의(葬儀), 파란 많은 망인(亡人)의 일생 경력'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자. "상해 김구 씨의 부인 최준례 여사는 지난달 1일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장의식(葬儀式)은 동 4일 오후 2시에 법조계(法租界, 프랑스 조계) 하비로 공부국 묘지에서 기독교 식에 의지하여 목사 조상섭 씨의 사회로써 상해에 있는 남녀 동포가 많이 모여서 엄숙하게 거행하였는데, 일동이 모두 깊은 느낌의 얼굴로써 지였고 윤기섭 씨가 설명한 역사 중에 김구 씨가 두 번째 감옥에 들어가서 15년의 징역 선고를 받은 뒤에는 김구 씨가 가출옥이 되기 전 4년 동안에는 황해도 안악군에 있는 안신(安新)여학교에서 선생이 되어 약간의 봉급으로써 늙은 시모(媤母)를 봉양하나, 또한 넉넉지 못하여 교수(敎授)한 여가에는 친히 동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베어다가 삼동(三冬)의 얼음 같은 찬 방을 녹이고, 소생의 어린 딸 하나와 함께 삼대(三代)의 여인끼리 서로 의지하면서 즐거움 없는 세월을 보냈다는 말에 대하여는 회장(會場)에 일동의 눈에 눈물이 비 오듯 하였다. 풍파와 고초를 많이 당하고 쉬지 아니하며 분투하는 남편을 다시 만난 뒤에도 가난한 살림을 하던 일이며 이번에 최씨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김구 씨는 우리 민족의 처지가 이와 같으니 극히 검소하게 장례를 지내려고 결심하였으나 많은 동지들의 권고와 주선으로써 창피하지 않은 장례를 거행하게 된 것이라더라." (1924년 2월 21일자 신한민보)

최 여사는 건강이 좋지 않았다. 둘째 아들 신을 낳고는 백일쯤 되어 실족해 거동조차 못했다. 게다가 폐결핵까지 앓았다. 상해 홍구 폐병원에 입원하였으나 차도가 없었다. 최 여사의 임종을 지켜본 사람은 상해임시정부의 안주인 노릇을 한 정정화(鄭靖和) 여사였다. 정 여사의 회고에 따르면 임종하기 전에 남편인 백범을 부르려고 하자 최 여사는 고개를 저었다고 한다. 당시 홍구 폐병원은 프랑스 조계(租界) 밖에 있었고, 일경(日警)들이 백범을 노리고 있었다. 차로 불과 10분 거리에 있었음에도 백범은 끝내 아내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이제 비문을 풀어보자. "ㄹㄴㄴㄴ해 ㄷ달 ㅊㅈ날 남 / 대한민국 ㅂ해 ㄱ달 ㄱ날 죽음 / 최 준례 묻엄 / 남편 김구 세움"이라고 쓰여있다. 김두봉은 주시경 선생의 제자답게 아라비아 숫자를 한글의 초성으로 표현했다. 아라비아 숫자 대신 한글 자음 순서를 숫자로 활용한 것이다.

이 원리로 하면 비문은 곧 해석이 가능해진다. 즉, 'ㄹㄴㄴㄴ해'는 단기(檀紀) 4222년(서기 1889년)을 말하는 것이다. 'ㄷ달 ㅊㅈ날 남'은 3월 19일 태어남이다. 즉 '1899년 3월 19일 태어남'이다. '대한민국 ㅂ해'는 대한민국 6년이다. 1919년 3.1 운동 이후 상해임시정부가 설립된 해가 바로 대한민국 원년이다. 대한민국 6년은 1924년인 것이다. 'ㄱ달 ㄱ날'은 1월 1일이다. 즉, '1924년 1월 1일 죽음'이 된다. 다시말해 비문은 "1889년 3월 19일 태어남 / 1924년 1월 1일 죽음 / 최준례 무덤 / 남편 김구 세움"이 되는 것이다. 이 비문을 지어 준 일로 해서 김구는 자신보다 10년 연하인 김두봉에게 인형(仁兄)이라 부르며 깍듯하게 대하게 되었다 한다.

그렇다면 비문을 쓴 김두봉은 누구인가? 일제강점기에 만주로 건너가서 항일 운동과 한글 연구를 병행했다. 최현배(崔鉉培)와 함께 주시경(周時經)의 제자로서 분단 이후 최현배는 남쪽에서, 김두봉은 북쪽에서 한글 정책에 큰 영향을 끼쳤다. 김두봉은 의열단장 김원봉(金元鳳), 조선혁명군 총사령관 양세봉(梁世奉)과 함께 역사에서 외면받아 온 '독립운동가 삼봉'이라 불렸다.

한편 며느리를 먼저 보낸 김구의 모친 곽낙원 여사는 사망 직전 "어서 독립이 성공되도록 노력하여 성공해 귀국할 시는 나의 해골과 인(仁)이 모(母, 최준례)의 해골까지 가지고 돌아가 고향에 매장하라"고 당부했다. 1999년 4월 김구 봉분에 최준례의 유해가 합장됐다. 백범 서거 50돌을 앞두고 사진 속 2살이었던 둘째 아들 김신(전 공군참모총장) 등 유족과 백범 김구선생 기념사업회의 뜻에 따라 남양주 가족묘지에 있던 최준례 유해를 이장한 것이다.

100년 전 이국 땅 상해에 세워진 생소한 모습의 비문, 이 분들의 삶의 모습과 정신이 생소한 일로 느껴지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생소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송종훈의 근대뉴스 오디세이] "ㄹㄴㄴㄴ해 ㄷ달 ㅊㅈ날 남", 상해의 낯선 한글 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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