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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서의 글로벌 아이] 간토대지진 `조센징 사냥` 모른 체하는 韓日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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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조선인이 우물에 독 넣었다" 퍼뜨려
내무대신 렌타로, 조선인대책 세우라 지시
자경단, 경찰, 군인들 조선인 무참히 학살
한 번도 진상조사나 희생자수조사 없었다
증거 넘치는데 日정부 "학살 없었다" 발뺌
[박영서의 글로벌 아이] 간토대지진 `조센징 사냥` 모른 체하는 韓日 정부


간토(關東) 대지진이 일어난지 9월 1일로 100년이 됐다. 100년전 대지진은 일본인은 물론이고 재일 조선인에게도 재앙이었다. 조선인들은 보는 즉시 참살됐고 시신은 강에 던져졌다. 정확히 얼마나 학살당했는지는 알 수 없다. 일본 정부는 지금까지도 사죄와 배상은 커녕 진상규명조차 거부하고 있다. 한국 정부도 마찬가지다. 한번도 항의하거나 진상을 조사하라고 요구한 적이 없다. 납득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전대 미문의 제노사이드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수도권인 간토 지역에서 강력한 지진이 일어났다. 점심 식사 준비를 하던 때였다. 거의 전 가정에서 밥 하느라 불을 때고 있었다. 진동으로 주택을 포함한 많은 건물들이 무너졌다. 그리고 불이 났다. 당시 집들은 대부분 목조였다. 화마는 급속하게 번져나갔다. 도쿄( 東京)는 불지옥이 됐다. 인근 도시 요코하마도 잿더미로 변했다.

그날 저녁 무렵부터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조선인과 사회주의자들이 방화하고 있다" "불령선인(不逞鮮人, 불온한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넣었다" 등의 유언비어였다. 언론매체들은 유언비어들을 여과없이 사실인양 간토 전역으로 전파했다.

내무대신 미즈노 렌타로(水野鍊太郞)는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경계 통지를 지역 내 경찰서와 경비대에 내려보내며 대책을 세우라고 지시했다. 그는 3·1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에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으로 발령받아 독립운동을 무자비하게 탄압한 사람이었다.

이후 수많은 조선인이 자경단, 경찰, 군인에게 학살당했다. 학살의 주역은 자경단이었다. 자경단은 그 지역의 재향군인회와 청년회가 주축이었다. 재향군인회 회원 상당수는 동학혁명 때 일본군 토벌대로 조선에서 복무했던 자들이었다. 이들은 '조센징(朝鮮人) 사냥'을 어떻게 해야할지 잘 알고 있었다.

자경단은 검문소를 곳곳에 설치하고 동네를 돌면서 조선인들을 색출했다. 머리가 길거나,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있다면 일단 조선인으로 의심했다. 조선인들을 식별해 내기위해 조선인이 발음하기 어려운 일본어 문장을 말하게 했다. 대표적인 것이 "쥬고엔 고주센"(十五円五十錢·15엔 55전)이었다. 이 발음이 생사를 결정했다.

학살은 9월 2일에서 6일까지 집중적으로 자행됐다. 청장년 남성뿐아니라 여성, 임산부, 아이까지 무차별 학살됐다. 총에 맞고 죽창에 찔리고 갈고리에 찍혔다. 일부는 산채로 불 속에 던져졌다.

당시 일본 사법성은 조선인 사망자를 233명으로 축소해 발표했다. 1923년 12월 상해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은 6661명이 희생됐다고 보도했다. 모두 정확하지 않다. 지금까지 한 번도 진상 조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근 일부 학자들은 학살된 조선인 수가 2만3000명을 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조선인으로 오인되어 죽은 일본 천민들

조선인으로 오인되어 살해된 일본인, 오키나와인, 중국인들도 생겨났다. 관헌이 노동운동가나 사회주의자 일본인을 살해하는 사례도 있었다. 그 중 후쿠다(福田)촌 학살은 간토대지진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사건 중 하나다.

지바(千葉)현 후쿠다촌, 지금의 지명은 노다(野田)시다. 사건은 대지진 발생 5일 후인 1923년 9월 6일 발생했다. 이날 15명의 남녀가 두통약, 감기약 등 약을 팔기 위해 이 마을에 왔다. 이들은 시코쿠(四國) 지방의 가가와(香川)현에서 온 행상들이었다.

이들은 최하층 천민 '부라쿠민'(部落民)이었다. 평민들과 구분되는 특정지역(부락)에 모여 살았기 때문에 이렇게 불렸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신분제가 철폐됐지만 여전히 차별이라는 족쇄에 묶여 있었다.

마을 신사 앞에서 쉬고 있는 그들에게 자경단이 몰려왔다. 추궁을 하니 언어가 낯설었다. 그들이 쓰는 사투리는 조선어로 오인되었다. 촌장 등 일부 마을 주민들이 "이들은 일본인이 분명하다"고 했지만 군중은 이미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몽둥이와 돌이 날아들었다. 죽창도 합세했다. 이어 총성이 울렸다.

15명 중 9명이 잔인하게 살해됐다. 그 중에는 임산부와 2세, 4세, 6세 유아도 있었다. 태아까지 포함하면 10명이 순식간에 떼죽음을 당했다. 시신들은 근처 강에 유기되어 강물 따라 사라졌다. 조선인을 죽이려다 일본인을 죽여버린 것이다.

사건은 오랫동안 어둠 속에 묻혀 있었다. 그러나 1979년 희생자 가족들이 '지바현 간토 지진 및 조선인 희생자 추모 집행위원회' 등에 제보를 해 비로소 조사가 시작됐다. 1980년대 후반 신문에 보도되면서 여론의 주목을 받았다. 2000년 진실 조사위원회가 설립되었고, 2022년 9월 6일 마침내 노다시에서 희생자 추모식이 거행됐다. 2023년 6월 20일 노다시 시장은 정식으로 애도를 표했다.

모리 타츠야(森達也) 감독은 이 사건을 소재로 영화 '후쿠다촌 사건'(福田村事件)을 만들었다. 영화는 간토 대지진 100주년을 맞아 9월 1일 개봉됐다.

◇진혼곡은 언제 울릴 건가

간토 대지진 100주년인 올해가 조선인 학살 사건을 제대로 다룰 마지막 기회일 것이다. 하지만 진상 규명과 반성을 외면해온 일본 정부가 과거를 직시할 의지가 과연 있는지 모르겠다. 한국 정부 역시 강건너 불구경이다.

지난달 27일 오사카에서 양심적인 일본인들이 조선인 학살의 진상을 규명하고 차별 범죄를 용납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이들은 "일본에서는 100년 전이나 지금도 차별과 역사 위조가 계속되고 있다"고 지적하며 인종차별 철폐법 제정을 촉구했다.

앞서 야당인 입헌민주당 소속 스기오 히데야 참의원은 국회에서 "간토 대지진 100주년인 올해가 조선인 학살 사건을 제대로 다룰 마지막 기회"라며 일본 정부의 태도 변화를 요구했다.

증거는 차고 넘치는데 일본 정부는 여전히 "학살은 없었다"는 등의 말만 뇌까린다. 지난달 30일 일본 정부 대변인인 마쓰노 히로카즈 관방장관은 "정부 조사에 한정한다면 (조선인 학살에 대한) 사실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반성이나 교훈과 같은 단어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나치의 만행에 거듭 용서를 구하면서 "역사가 지어준 책임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던 독일과는 정반대의 행보다.

일본 정부의 행태는 인간의 도리가 아니다. 이성과 양심이 있다면 잘못을 고백하고 반성하며 피해자에게 진심으로 사죄해야 한다. 그러나 여전히 '모르쇠'다. 그렇다면 한국 정부는 어떤가. 자국민 6000명 이상이 학살당한 제노사이드에 대해 진상을 조사하라고 요구한 적이 없다. 제대로 된 항의조차도 못한다.

100년 전 간토 대지진의 원혼들은 이렇게 묻는다. "왜 내가 죽었어야 했나요?" 이제 답을 해줘야 한다.

박영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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