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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와 이토, 비명횡사한 두 명의 총리[박영서의 글로벌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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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존경했던 이토 히로부미처럼 총격 피살
안중근 의사 이토 쏜 후 당당히 체포에 응해
戰前 일본에서는 정치인 암살 드문 일 아냐
아베, 수시로 "안중근은 사형수" 막말 폄하
이토는 한국식민지화, 아베는 對韓수출규제
아베와 이토, 비명횡사한 두 명의 총리[박영서의 글로벌 아이]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가 죽음을 맞았다. 이 소식을 소식을 들었을때 또 다른 일본 총리가 머리 속에서 떠오른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다. 두 사람은 여러모로 공통점이 많다. 4번이나 총리를 역임했다. 출생지도 같다. 지금의 야마구치(山口)현인 옛 조슈(長州)번이다. 그리고 총탄에 의해 비명횡사했다. 한국인에겐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나쁜 이미지'라는 점도 같다. 아베와 이토, 두 죽음에서 우리는 역사의 조감도(鳥瞰圖)를 읽을 수 있다.

◆아베가 죽었다

지난 7월 8일 오전 11시 30분쯤 아베 전 총리가 나라(奈良)시에서 암살됐다. 당시 그는 참의원 선거에 출마한 자민당 소속 의원을 지지하는 연설을 하고 있었다. 연설이 시작된 지 몇 분 후, 검은 색 가방을 비스듬히 착용한 한 남자가 뒷쪽에서 접근하기 시작했다. 총성이 두 번 울렸고 몇 초 뒤 아베는 땅에 쓰러졌다. 남자가 사제 총을 쏜 것이었다.

의사들이 쓰러진 아베를 응급처치를 한 후 헬리콥터로 나라 현립 의과대학 병원으로 이송했다. 그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이미 심폐 정지 상태였다. 반복적으로 수혈과 지혈을 해 소생을 시도했으나 오후 5시 3분에 사망을 확인했다. 사인은 과다출혈이었다. 향년 67세. 일본 우익의 상징이었고 퇴임 후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야미 쇼군'(闇將軍·막후실력자) 아베는 이렇게 허무하게 갔다.

저격범은 올해 41살의 야마가미 데쓰야(山上徹也)였다. 야마가미는 저격 동기에 대해 "어머니가 통일교에 가입하면서 가정이 파탄났다. 이 종교에 분개했다. 아베 전 총리가 이 종교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해서 목표로 삼았다"고 밝혔다.

누가 죽였던 간에 아베는 자신이 존경했던 이토 히토부미처럼 총을 맞고 세상을 떠났다. '제2의 이토', '이토의 적자(嫡子)'라는 말답게 가는 길도 비슷했다.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를 쏘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이토는 중국 하얼빈 기차역에 도착했다. 제정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코코프체프 재무장관과 만주 및 한국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이토는 일본 측 열차에서 코코프체프 장관과 이야기를 나눈 후 연회 테이블이 준비된 러시아측 열차로 이동하려고 9시 30분께 열차 밖으로 나섰다. 그가 러시아 군대의 사열을 받고 있을 때 총성이 울렸다. 3개의 총알이 이토를 관통했다. 그는 역 건물로 이송되어 응급처치를 받았다. 하지만 피격 30분 후인 오전 10시경 사망했다. 당시 68세였다.

총을 쏜 사람은 안중근이었다. 안중근은 가까운 거리에서 발포했다. 주변의 헌병과 군인들은 겁을 먹고 서로를 훔쳐볼 뿐이었다. 총소리가 더 이상 울리지 않자 여러 명이 달려들어 총을 빼앗았다. 안중근은 도망가거나 저항하지 않았다. 그대로 체포됐다.

이토는 일본의 초대 총리였다. 그 자리는 행운으로 얻은 것이었다. 1878년 5월 14일 유신삼걸(維新三傑)의 한 사람인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가 암살당하자 초대 총리 자리가 그에게 돌아간 것이었다. 만 44세를 갓 넘긴 때였다. 이후 이토는 5대·7대·10대 등 총 4차례 총리를 역임한 후 조선통감이 됐다. 이토는 1905년 을사늑약을 통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고, 2년 뒤인 1907년에는 고종을 강제 퇴임시키고 군대를 해산시켰다.

이렇게 나라가 백척간두에 서자 안중근은 의병운동에 투신했다. 그해 8월 연해주로 망명해 의병활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듬해 6월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경흥에 주둔하던 일본군 수비대를 격파했다. 다수의 일본군 포로들도 잡았다. 안중근은 주위의 반대에도 포로를 놓아주었다. 만국공법(萬國公法)에 의거해서 포로들을 모두 석방시켰다. 안중근은 원칙주의자였고 휴머니스트였다.

풀려난 포로들은 본대로 돌아가 안중근 부대의 규모, 전술, 이동 경로 등을 고스란히 알렸다. 일본군은 추격대를 편성했고 안중근 부대는 궤멸됐다. 안중근은 깊고 깊은 자책감에 빠졌다. 그는 이토와 이완용을 죽이겠다고 결심했다. 전사한 동지들에 대한 일종의 '속죄'였다. 3년 내에 반드시 성사시키겠다고 왼손 네 번째 손가락 한 마디를 잘라내 결의를 다졌다.

1909년 가을, 이토가 만주 시찰에 나선다는 소식을 접한 안중근은 "늙은 도둑을 내 손에서 끝내겠다"고 다짐했다. 히로부미가 특별열차로 하얼빈 역에 당도하자 안중근은 품에 있던 브라우닝 M1900 연발 권총을 꺼냈다. 벨기에 총기업체 FN사가 1900년에 생산한 자동 권총이었다. 한 발은 이토의 가슴에, 한 발은 이토의 옆구리에, 한 발은 이토의 배에 명중했다. 일본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川上), 수행비서 모리(森), 남만주철도 이사 다나카(田中)도 각각 한 발 씩 맞아 쓰러졌다. 발사된 여섯 발 모두 명중했다. 불과 6초만에 이뤄진 일이었다.

◆역사는 반복된다

아베는 전후(戰後) 총리 가운데 처음으로 암살된 인물이 됐다. 전직 총리가 이렇게 암살당했다는 사실은 매우 충격적이다. 하지만 메이지(明治)시대 이후의 일본 정치역사를 살펴보면 이런 사례는 드문 일이 아니었다. 드문 것이 아니라 전전(戰前)에는 암살은 흔했다.

1885년 일본에 내각총리대신 제도가 도입된 이후 101대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총리까지 일본에는 총 64명의 총리가 있다. 그 중 임기 중이나 퇴임 후 암살된 총리는 아베를 포함해 7명에 이른다. 총리 외에도 암살된 각료, 정치인은 더 많이 존재한다.

메이지유신 이후 정계를 뒤흔든 첫번째 암살은 '일본의 비스마르크'로 불렸던 오쿠보 도시미치 암살일 것이다. 그는 '사무라이를 배신한 자'로 낙인 찍혀 출근 길에 사무라이들의 칼에 난도질 당했다. 그는 사실상의 총리였다. 내무경(內務卿)을 지내면서 내무행정은 물론 산업·교육·언론까지 모든 국내 정책을 관장했었다.

1921년 11월에는 제19대 총리 하라 다카시(原敬)가 도쿄(東京)역에서 극우 성향의 철도 개찰원의 칼에 찔려 숨졌다. 그는 최초의 평민 출신 총리였다. 살해 현장은 아직도 도쿄역에 표시되어 있다.

대공황 시기 '평화 외교'를 내걸었던 제27대 총리 하마구치 오사치(濱口雄幸) 역시 1930년 11월 도쿄역에서 극우 청년이 쏜 총에 맞아 치료를 받다가 1년 뒤 사망했다.

1932년 5월에는 제29대 총리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가 관저에서 해군 장교의 총에 죽었다. 이누카이는 1931년 만주사변 이후 통제권을 벗어나고 있는 군부에 제동을 걸려다가 제거됐다. 짧았던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는 이날로 끝이 났다.

1936년 마침내 2·26사건이 터졌다. 천황근본주의 체제를 세우자고 일어선 '황도파'(皇道派) 청년 장교들은 전직 총리인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를 살해했다. 사이토는 해군 대장 출신으로 조선 총독을 두 번 지낸 인물이었다. 백발의 독립투사 강우규는 1919년 9월 2일 서울역에서 조선 총독으로 부임한 그를 향해 폭탄을 던진 바 있다. 다음 해 일본은 중일전쟁을 일으켰고 군부의 정치 지배는 본격화됐다. 일본은 점점 더 큰 전쟁으로 나아갔고, 결과는 패망이었다.

이토는 일본 제국주의의 아시아 침략을 조장했고 한국의 식민지화를 주도했던 원흉이었다. 아베는 전후 일본 우경화의 중심인물로 '대일본제국'의 부활을 꿈꾸었다. 그는 수시로 신사참배를 했고 위안부를 모독했으며 "안중근은 사형수"라는 망언도 내뱉어 한국인에게 많은 상처를 주었다. 3년 전에는 반도체 생산에 필요한 핵심소재 수출을 막아버려 우리에게 치욕감을 안겨주기도 했다. 경제적 힘이 없으면 언제든지 일본에게 당한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알려주었다. 일종의 '경제 정한론(征韓論)'이었다.

결국 두 사람 모두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총을 맞고 세상을 떠났다. 만약 저승이 있다면 그 곳에서 두 사람이 못다한 정을 나누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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