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선량한 지도자가 인류에게 좋은 일을 했다
폭력을 쓸 수 있었음에도 자제한 겸애주의자
서울올림픽 성공 일등공신이자 한국인의 친구
자연 가족 이웃 존재에 대한 겸허한 통찰력
폭력을 쓸 수 있었음에도 자제한 겸애주의자
서울올림픽 성공 일등공신이자 한국인의 친구
자연 가족 이웃 존재에 대한 겸허한 통찰력
![[이규화의 지리각각] 전쟁통에 더 그리운 `인류의 은인` 고르바초프](http://contents.dt.co.kr/images/202204/2022040802109969660001[1].jpg "[이규화의 지리각각] 전쟁통에 더 그리운 `인류의 은인` 고르바초프")
독일 도이치벨레(DW) 방송은 작년 3월 2일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고르바초프의 90회 생일을 맞아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발표한 축하성명을 보도했다. 방송은 이밖에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 등 세계 각국 지도자들의 축하 성명도 소개했다. 물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축하성명도 있었다. 그러나 무미건조했다. "당신은 우리나라와 세계의 현대사에서 심각한 충격을 가져온 가장 두드러진 정치인 중 한 분입니다" 정도였다.
우크라이나 참상이 계속되는 이 시점에서 30여 년 전 베를린 장벽 붕괴와 독일 통일, 동유럽 자유화, 소련의 해체라는 격랑을 돌이켜보면, 지금보다 훨씬 더 컸을 폭력의 난무를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자 소련 대통령 고르바초프가 취한 결단으로 인해 인류는 피할 수 있었다.
역사에 가정은 부질없는 짓이지만, 교훈은 역사에서 나온다. 고르바초프가 없었다면 적어도 동독 출신의 메르켈이 독일 총리가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푸틴도 기껏해야 KGB에서 고위직으로 승진한 후 은퇴해 지금은 어느 시골 다차에서 노후를 보내고 있을지 모른다. 한 인간이 세계사의 물줄기를 좋은 방향으로 바꾸는 결단을 한다고 할 때 최소한 20세기에 고르바초프에게 견줄 대상은 없다.
고르바초프는 20세기 40년간 인류를 옥죄었던 냉전, 자유와 인권을 짓밟은 70년간의 공산독재체제를 종식시키는데 혁혁한 공헌을 했다. 철저한 사회주의자로 평가받는 그가 의도적으로 공산체제를 무너뜨린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천부적으로 주어진 자유와 행복을 추구할 권리, 이웃과의 따뜻한 연대와 굶주리지 않을 생존 권리에서 타협하지 않은 그의 인생관, 도덕관, 정치철학이 작용한 산물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가 이 가치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다 보니 탈공산화에 이르는 길이었음이 나중에 드러난 것이다. 결국 냉전종식과 수억 인류를 질곡에서 해방시킨 것은 고르바초프라는 한 인물의 결단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2000년 밀레니엄 시대가 열릴 때 많은 세계 언론은 고르바초프를 20세기 가장 중요한 정치인이자 지도자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시사주간지 타임은 수도 없이 그를 표지인물로 올렸다. 냉전종식의 공로로 1990년 노벨평화상을 받았지만, 그것은 그가 한 일의 영향에 비하면 작은 장식품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세계 시민들에게, 20세기 인류에게 가장 좋은 일을 한 지도자다. 한 선량한 지도자가 인류에게 얼마나 좋은 일 할 수 있는지 그의 삶은 보여준다.
◇독일통일과 동유럽 자유화의 최대 기여자
20세기 역사의 물길을 돌려놓은 장면 중 빠질 수 없는 것이 베를린 장벽 붕괴일 것이다. 그런데 연원을 파고 들어가면 고르바초프에 닿는다. 우선 가시적인 장면부터 거꾸로 돌려보자. 동독인들의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를 통한 월경이 문제가 되자 1989년 11월 9일 저녁 동독 공산당 정보담당서기 귄터 샤보프스키는 기자회견을 갖고 사태 해결을 위해 여행자유화를 보장하겠다고 했다. 술렁이는 기자단에서 조치가 언제부터 유효하냐는 질문이 나오자 사보프스키는 얼떨결에 "지금 즉시"라고 답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수많은 동베를린 주민들이 베를린장벽으로 몰려갔고, 국경수비대는 엉거주춤 방관할 수밖에 없었다. 역사적 순간이었다.
이 장면은 그 며칠 전 소련 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의 놀라운 성명이 없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10월 27일 고르바초프는 20년 이상을 소련이 동유럽 공산국가를 쥐고 흔들었던 소위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폐기하겠다고 선언했다. 동유럽 공산권 국가의 변화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브레즈네프독트린은 사회주의공동체 구성 국가들 중 어느 국가의 정치적 체제가 위협받을 경우 다른 사회주의국가가 무력개입해도 정당하다는 합의다.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자유화 시위 '프라하의 봄'에 놀란 소련과 동유럽 공산국가들이 만든 일종의 사회주의 '제한주권론'이다. 브레즈네프 독트린은 이미 고르바초프가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오른 1985년 3월부터 지속될 수 없는 운명이었다. 고르바초프가 권좌에 올랐을 때 소련은 공산 간부 기득권층(노멘클라투라)의 부패와 생기를 잃은 경제로 인해 파탄지경에 이른 상태였다. 브레즈네프는 18년(1964~1982)간 집권하면서 개혁을 하지 않았다. 흐르쇼프의 개혁 지향이 사라지고 오히려 그 이전 스탈린주의로 돌아갔다.
고르바초프는 소련 사회주의를 살리기 위해서는 제도적 개혁 즉 페레스트로이카와 개방 즉 글라스노스트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고르바초프는 개인의 욕구와 창의성을 제약하고 생산성을 저해하는 집단주의에서 벗어나려는 개혁에 착수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근본적 제도 개혁이 뒷받침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개인 소유제를 인정해야 하는데, 고르바초프는 사회주의 토대 위에서 변화를 꾀했다. 무엇보다 실패요인은 노멘클라투라의 집요한 방해였다. 고르바초프는 2003년 낸 자서전 '선택'에서 이렇게 토로했다. "공산당 노멘클라투라를 단기간에 몰아낼 준비가 아직 덜 돼 있었다. 스탈린주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공산당이 '출세의 사다리' 역할을 해온 당을 과감히 외면하지 못하게 사람들을 부여잡고 있었다"고 했다.
글라스노스트도 반쪽의 성공에 그쳤다. 표현과 출판의 자유를 대폭 허용했고 정치범을 석방했다. 톱다운 의사결정 방식에서 상향식 토론이 장려됐다. 그러나 70년간 속박과 감시 속에 살아아 했던 소련 민중들에게 글라스노스트는 낯선 것이었다. 소련 사회에 경착륙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글라스노스트의 혼란이 소련 붕괴로 이어졌다고 고르바초프를 비난하는 소재가 되었다.
하지만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는 소련이 미국과의 군비경쟁을 포기하게 만들었으며 핵군축협상에 진전을 가져왔다. 서서히 소련 내 연방을 형성하는 공화국들과 동유럽에 자유화의 공기를 불어넣었다. 1989년 11월 베를린 붕괴로부터 1991년 12월 25일 소련 해체까지 역사의 소용돌이는 고르바초프의 머리와 심장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울올림픽 참가, 한소수교, 한국인의 친구
고르바초프는 한국인에게도 좋은 일을 많이 했다. 우선 1988년 9월 서울올림픽 참가 결정을 들 수 있다. 서울올림픽 전 1980년 제22회 모스크바올림픽은 서방 국가들이 참가하지 않음으로써 반쪽 올림픽이었다. 1984년 제23회 LA올림픽에는 소련과 동유럽권 등 공산국가들이 참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1988년 제24회 서울올림픽은 12년 만에 서방과 동구권이 만나 스포츠 제전을 벌였다. 상징적인 의미가 매우 컸다.
특히 소련과 동구권 국가들은 서울올림픽을 통해 세계에서 가장 못살았던 한국이 어엿한 중진국으로 올라선 것을 보고 놀랐다. 서울올림픽은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사회주의 계획경제에 월등한 경쟁력을 가졌다는 사실을 깨닫는 한 계기가 됐다. 서울올림픽이 그 1년 후 베를린장벽 붕괴에 간접적 영향을 미쳤다는 연구도 있다. 아무튼 올림픽 역사에서 서울올림픽은 매우 성공한 올림픽으로 기록됐고, 그 바탕에는 참가를 결단한 고르바초프의 공이 절대적이다.
한소수교도 한국인이 고르바초프에게 고마워해야 할 역사적 결단이다. 1990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졌지만 소련은 여전히 공산권 국가의 대부로서 자유민주 진영과 대치하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노태우 정부의 끈질긴 노력과 설득이 주효해 고르바초프는 수교 결정을 내렸다. 한국과 소련은 1990년 9월 30일 정식 수교합의 의정서에 서명했다. 그해 12월 노태우 대통령이 모스크바를 방문했고 이듬해 4월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방한했다. 노태우 정부는 한소수교를 바탕으로 이듬해 한중수교까지 할 수 있었다. 노태우 정부의 최대 업적인 북방정책은 고르바초프의 호응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고르바초프는 정계를 은퇴한 후에도 여러번 한국을 방문한 적 있다.
◇자연과 가족, 인간애에서 기인한 착한 품성
고르바초프의 고향은 빼어난 자연경관을 지닌 캅카스(코카서스)산맥 북쪽 너른 평원 지대다. 그의 자서전을 보면 그는 이곳 스타브로풀에서 태어나 청년기와 초급 당 서기 시절 40여년을 보냈다. 그는 장년기 이후 모스크바에 살면서도 고향을 그리워했고, 자랑스러워했다. 평범한 농부 집안에서 태어난 고르바초프는 소년기 당시 살았던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2차 세계대전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아버지는 징집돼 대독전쟁에 나갔다. 소년기부터 자연 속에서 농사일을 거들며 고르바초프는 자연의 섭리에 깊게 영향을 받았다.
고르바초프는 자연과의 풍성한 교감 뿐아니라 사랑이 풍부한 가정환경에서 자랐다. 가난했지만 가족애가 넘쳤다. '선택'이란 자서전에 미소를 머금게 하는 일화가 소개돼 있다.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학교를 쉬게 되었다. 2년을 쉬다 학교에 가니 선생님이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나는 책을 바닥에 집어던지고 어머니에게 다시는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울면서 무언가 집어 들고 바깥으로 나가더니 이윽고 책을 여러 권 들고 돌아왔다. 나는 그래도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우겼다. 하지만 책을 보고는 궁금해서 읽기 시작했다. 재미있었다. 어머니가 잠자리에 든 다음에도 나는 책을 계속 읽었다. 그날 밤 내 머리 속에 분명히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튿날 아침 나는 일어나 학교에 갔다. 나는 그해 그 다음해 계속 학교에 다녔고 전 과목에서 모두 A를 받았다"
고르바초프는 지독한 애처가였다. 1999년 부인 라이사가 작고했을 때 심정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나는 라이사가 떠난 후 사는 게 아무런 의미를 잃었다. 여러 달 동안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다차에 처박혀 있기만 했다. 그처럼 처절한 고독은 전엔 정말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었다. 나는 라이사와 50년 가까이 함께 살았다. 늘 꼭 붙어서 지냈지만 한 번도 서로 지루한 느낌을 가져 본 적 없었다."
고르바초프는 사랑을 받은 만큼 줄 줄 아는 인간이었다. 자연예찬자이자 따스한 인간애를 지닌 휴머니스트였다. 소련의 다른 지도자들에게서 발견되는 술수와 정치공학보다는 공개된 언변과 설득, 정면 협상 등을 선호했다. 고르바초프는 자신이 속을지언정 남을 속이는데 매우 서툴렀다.
이런 일화도 있다. 헬무트 콜 수상이 독일 통일을 지지해줄 것으로 간곡히 요청하자 고르바초프는 놀랍게도 선선히 응했다. 고르바초프가 반대했다면 독일 통일은 불가능했거나 되더라도 엄청난 피의 대가를 치렀을지 모른다. 독일 통일 당시 동독에는 50만 명의 소련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독일이 통일되면 철수해야 했다.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고르바초프는 고민하다 콜 수상한테 그 비용을 좀 지원해달라고 부탁했다. 이 부탁을 받은 당시 콜 수상의 마음을 한 번 상상해 보라. 수에 능한 정치인이었다면 통일에는 반대하지 않겠지만 군철수 비용을 모두 대는 조건에다 플러스 알파를 요구했을 것이다. 그러나 고르바초프는 먼저 통일을 수용하고 나중에 비용을 부탁했다.
냉전 막바지 시기 그의 카운트파트였던 로널드 레이건과 조지 H.부시 미국 대통령이 너무 그를 이용만 해먹었다는 비난을 산다. 물론 자유세계의 목적이 공산세계의 붕괴였지만, 적어도 자유세계에 적대감을 표출하지 않았던 고르바초프의 정치적 입지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쉽다.
고르바초프는 비록 소련을 망하게 한(주로 러시아 우익들의 주장) 지도자로 낙인찍혔지만, 그 실패로 인해 역사적으로 인류에게 가장 좋은 선물을 안긴 인물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실패는 위대한 실패다. 앞으로 역사가들은 20세기 역사를 좋은 쪽으로 진행되도록 만든 고르바초프에 대한 연구를 계속 할 것이다. 그의 모든 행동과 결정에는 가족애, 인간애, 자연에 대한 예찬과 존재에 대한 겸허한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
그 같은 역사의 거인이자 '인류의 은인(恩人)'이 지금 이 순간 지구에서 함께 숨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세계 시민들은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된다. '고르비'라는 애칭을 갖고 있는 이 위대한 인물이 우리 곁에서 건강하게 오래오래 천수를 누리길 기원한다.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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