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태 월간객석 발행인
![[포럼] 음악계 가장 시원한 `사이다` 재료](http://contents.dt.co.kr/images/202203/2022031102102369073001[1].jpg "[포럼] 음악계 가장 시원한 `사이다` 재료")
날씨가 포근해진 한 낮이면 저는 책을 보면서 관련된 음악을 들어보곤 합니다. 최근에는 백작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불의의 사고로 하반신 성장이 멈춰버렸던 화가 툴루즈 로트레크에 관한 책을 읽었습니다.
책에는 그런 로트레크의 순수함 자체를 좋아했던 화가 수잔 발라동에 관한 얘기도 있더군요. 그녀는 자살 소동을 벌이면서까지 로트레크에게 청혼했습니다. 발라동은 사실 당시 파리화단의 뉴스메이커였습니다. 옛 애인 르누아르와의 사이에 아들이 있었고, 드가한테 그림을 배우며 사랑을 나눴으며 피아니스트였던 에릭 사티가 오매불망 쫓아다녔던 뮤즈였지요. 몇 년의 연애 끝에 결국 차이지 만 에릭 사티는 바람기 많은 그녀를 못 잊어 그 유명한 'Je Te Veux(난 그대를 원해요)'를 작곡하기도 했죠.
저는 오늘 그 노래를 호세 카레라스의 목소리와 용재 오닐의 비올라로 들으면서 그들의 삶과 사랑을 그려보았습니다. 아, 이렇게 오롯이 즐기는 혼자만의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요.
저는 소란스러웠던 19세기 말 유럽의 예술계로 상상의 나래를 펼쳐봅니다. 로트레크가 물랑루즈에서 만나면 술을 사주었다던 고흐의 모습이 떠오르고, 우리가 아는 심각한 고흐도 공짜술에 취하면 신이 나서 물랑루즈의 무용수들을 그리곤 했다는 사실이 신기합니다. 그런 그가 즐겨 마셨다는 킬러 칵테일 '어스퀘이크'는 어떤 맛이었을까도 궁금합니다.
그런가 하면 불면증으로 인해 단 하루도 편히 잠들 수 없었다는 마티스가 그린 걸작 '춤'을 보면서 예술가의 불행이 후대에게는 행운으로 느껴진다는 삶의 아이러니를 느끼기도 합니다. 따지고 보면 슈베르트, 베토벤, 슈만 등의 작곡가들도 숱한 절망 속에서 주옥같은 명작을 남긴 불굴의 예술가들 아닌가요? 사는 동안 누구나 다 정해진만큼의 행·불행을 겪게 되지만 그것을 어떻게 견디느냐에 따라 인생의 평가가 달라지는 듯합니다.
어쨌든 책과 그림과 음악은 세상의 혼돈 속에서 평온을 가져다주는, 저에게는 마리아 같은 존재입니다. 사람들마다 의견이 분분하고 갈라치기가 횡횡하는 요즘, 여러분께서도 음악으로, 예술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마침 음악계에서 들려오는 '사이다' 같은 소식이 있어 여러분께 전합니다. 지난 1월 열렸던 독일 멘델스존 전국 음대 경연대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작곡가 멘델스존의 이름을 붙인 이 대회가 생소한 분들을 위해 알려드리자면, 이 경연대회는 무려 1878년에 시작된 대회라고 합니다. 독일 각지의 음대에서 예선을 거쳐 선발된 최대 4명의 후보가 본선에서 겨루게 된다고 하는데, 피아노와 작곡 부문 경연은 4년에 한 차례씩 열린답니다.
그러다 보니 독일 음대생들에게는 재학 중 단 한 번만 도전할 기회가 주어지는 셈이어서 매 대회마다 실력있는 음악도들이 총출동하여 기량을 겨룬다고 합니다. 이번 대회의 피아노 부문에는 4명의 결선 진출자가 나왔는데 그들이 모두 한국 유학생들이었다는 점에서 현지 관계자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그들이 1·2·3위를 차지했고, 작곡 부문은 2·3위를 한국 학생들이 차지하여 유럽 음악계에 또 한번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고 하네요.
저는 이 기사를 접하면서 한국 음악도들의 우수성은 차치하더라도 심사위원들이 얼마나 '공정'한 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학연, 지연은 물론 국경과 인종까지 뛰어넘는 그들의 판정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진정한 공정성 아닐까요? 어쩌면 갈증날 때 우리가 늘 마시고 싶어하는 '사이다'의 원재료도 그런 균형과 형평에서 나온 게 아닌 지 모르겠습니다.
조금 늦었지만, 이 '사이다' 같은 소식의 주인공들을 간단히 소개해봅니다. 피아노 부문 1위는 한스 아이슬러대학의 김정환, 2위는 뮌헨 음대의 김지영, 공동 3위는 하노버 음대의 박영호와 박진형입니다. 작곡 부문 2위는 뤼벡 음대의 이길오, 3위는 슈트트가르트 음대의 김다찬입니다. 그들의 앞길에 큰 축복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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