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는 내 책임, 도전은 직원들이… 코로나 극복 땐 20년 기회 열려"

IMF 위기에 고속 성장… 자체 솔루션 갖추고 오랫동안 쌓은 신용 덕
오묘한 비즈니스, 기술·시스템 등 착실하게 준비하고 있으면 기회 열려
기업들이 투자하고 사업 키울 수 있도록 정책 리스크 줄였으면 바램도
韓, 투명하고 믿을 만한 나라로 평가… 데이터·클라우드로 승부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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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는 내 책임, 도전은 직원들이… 코로나 극복 땐 20년 기회 열려"
정진섭 오픈베이스 회장·한국정보산업연합회장


D파이오니어를 만나다

⑧ 정진섭 오픈베이스 회장·한국정보산업연합회장


경기고, 서울대, KAIST, 미 스탠퍼드대 대학원.

정진섭 오픈베이스 회장은 대한민국 0.01%나 걸을 법한 최고 엘리트 코스를 밟은 인물이다. 스펙에 걸맞게 정부 출연연구기관 연구원과 대학교수 자리도 경험했다. 그런 그는 보장된 삶을 박차고 나와 무림처럼 험한 SI산업에 뛰어들었다. 1995년 대용량 데이터 처리 솔루션에 특화한 오픈베이스를 창업한 그는 시장의 절대 권력자인 SI 대기업과 글로벌 IT기업, 정부·공공기관 사이에서 밀리지 않고 성장해 중견SI 기업으로 키워냈다. 회사는 오픈베이스 외에 데이타솔루션·시큐웨이브·나노베이스 등 계열사를 둔 그룹으로 성장했다. 작년 연결기준 매출은 1574억원이었다.

언론 앞에 거의 서지 않는 정 회장과의 인터뷰를 앞두고 많은 궁금증이 일었다. 정답과 합리만으론 설명되지 않는, 실패와 리스크가 상존하는 SI시장에서 그룹사 배경 없이 25년간 기업을 키운 저력은 어디서 나왔을까. 코로나19로 기회와 위기가 엇갈리는 시대에 기업을 움직이는 비전은 무엇일까. 정 회장이 던진 답은 의외로 간단하고도 명쾌했다. 실패는 빨리 잊고,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과 고객이 원하는 길을 읽고 미리 준비한다는 것. "억세게 운이 좋았고, 고통보다 재미가 컸다"는 그는 "어떤 상황에도 '바름'의 가치를 지키면서 끈기 있게 임하면 결과가 좋았다"고 말했다. 연신 미소를 잃지 않는 편안함에서, 사람을 믿고 연결하고 규합하는 소프트 리더십과 태생적인 낙천성이 뿜어져 나왔다. 정 회장이 지난 3월 회장으로 취임한 한국정보산업연합회 회의실에서 그를 만났다.


대담 = 안경애 ICT과학부 부장


-전운이 채 가시지 않은 시기에 태어나 최고 엘리트 코스를 걸었는데.

"1956년 베이비붐 세대로 태어나, 국민학교 1학년 때 한 반에 100명 가까운 학생이 3부제 수업을 할 정도로 치열한 경쟁 분위기 속에 컸다. 해군 장성을 지낸 아버지와 교사인 어머니를 뒀지만, 어머니가 교사를 그만둔 이후로는 풍족함과 거리가 멀었다. 진해와 서울을 오가며 국민학교를 다녔는데, 서울로 올라와 자리 잡은 상도동 산꼭대기 집은 새로 개발된 단지라 한동안 물도 전기도 제대로 안 들어왔고 한참을 내려와야 숭실대 옆 버스종점이 있었다. 60년대 중반, 심한 물난리가 난 후 산너머 동네 공터와 밭이 수재민 텐트로 빼곡했던 기억이 난다. 그게 봉천동의 시작이었다. 나중에 주상복합 아파트인 세운상가로 이사를 갔다.

당시는 중학교도 시험 봐서 갔다. 초등학교들이 명문 중학교 입학생을 많이 배출하기 위해 지방 아이들을 발탁했는데, 그런 케이스로 경복국민학교를 다니다가 중학교가 추첨제로 바뀌었다. 경기고 입학 후에는 공부보다 친구들과 어울리기를 즐겼다. 내신도 좋지 않고 암기력도 별로였는데, 외워서 풀 수 없는 고난도 사고력 문제에는 비교적 강했던 것 같다.

어디에서도 반에서 10등 정도는 유지했는데, 고등학교 2학년 1학기 모의고사에서 꼴찌에서 5~6등 성적을 받고는 깜짝 놀라 다시 반 10등 정도로 올린 기억이 난다. 당시 경기고에서 반에서 30등 정도 해도 서울대를 가던 때였다."

-컴퓨터와의 인연은 언제 시작됐나.

"대학 졸업 후 KAIST 테크노경영대학원에 입학해서다. 당시 신형 컴퓨터가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원)에 도입됐는데. KAIST에서는 내가 속한 연구실에만 모니터도 없는 프린터 터미널 단말기가 설치돼, KIST 컴퓨터를 마음대로 쓸 수 있었다. 남들이 천공카드를 박스로 가지고 다니며 컴퓨터를 사용할 때, 나는 프린터 터미널을 이용해 편하게 KIST 컴퓨터를 쓸 수 있었다. KAIST는 물론 KIST에서도 신형 컴퓨터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남들이 잘 모르는 새로운 걸 해보는 재미가 좋았다. KAIST에서는 컴퓨터를 이용해 에너지 수요예측을 하는 에너지경제를 공부했다. 당시 익힌 실력으로 에너지경제연구원에서 에너지 수요를 예측하고 공급계획을 세우는 예측모델을 연구원 최초로 개발했다. 원자력발전소 건설계획 등에 예측결과가 쓰였다."

-보장된 대학교수 자리를 박차고 나왔는데.

"KAIST 석사 후 서울의 한 대학 전임강사가 됐는데, 지내다 보니 이게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했다. 어디 가서 아랫자리를 좀더 경험하고 세상을 더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을 나와 에너지경제연구원에 들어가선 연구를 하면서 사업 기회도 엿봤다. 에너지 예측모델을 개발하던 중 동료 한명이 컴퓨터를 만들어 팔자고 했다. 삼보컴퓨터가 나오기 전이었다. 들어보니 그럴 듯해서 동료 2명과 컴퓨터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몇달간 거의 밤을 새며 두 가지 일을 소화하니 몸에 무리가 갔다. 희한한 게 나중에는 잠도 별로 안 오고 먹고 싶은 생각도 거의 안 들었다. 그러다 과로에 간염이 겹쳐 쓰러졌다. 신혼 초였는데, 몇달간 집에서 요양을 해야 했다. 미래를 걱정하던 중 연구원 3개월 해외연수 대상자에 뽑혀 얼씨구나 하고 미 스탠퍼드대로 떠났다. 그러다 스탠퍼드대 교수들이 정식 석·박사 과정에 도전해보라고 권유해 부랴부랴 현지에서 토플, GRE 시험을 본 후 그해 가을에 입학했다. 학교에서 받는 돈 만으로는 살림이 넉넉지 않아 집사람은 베이비시터로 일하고, 나는 우표 붙이기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보탰다."

-대학원 시절 창업에 도전한 계기가 궁금하다.

"90년 3월 스탠퍼드대 박사과정 중 연구실 동료들과 3명이 통신SW 회사 스탠코테크놀로지를 세웠다. IBM, HP, 제록스 같은 거대 기업이 성공 역사를 쓰고 있었고, 80년대 후반 AI(인공지능) 바람이 불면서 학교 전체가 AI 열기로 뜨거웠다. 너나 할 것 없이 창업에 뛰어드는 분위기였다. 나도 빠질 수 없었다. 재밌는 건 당시 탄생한 기업들이 거의 망했다는 거다. 내 친구들도 다 망했다. AI에 올인한 스탠퍼드대도 성과가 시원찮았다. 컴퓨터 성능이 뒷받침 못한 게 원인이다. 그러나 실패를 경험한 사람들이 새로운 기회를 모색하면서 실리콘밸리는 이후 세계 기술혁신의 중심지가 됐다. 좋은 인력들이 산업현장을 떠받친 덕분이다. 창업하느라 논문을 못 써서 박사는 수료만 했다."

-창업에서 쓰디쓴 실패를 맛봤는데.

"제품을 완성하는 게 생각보다 힘들고 오래 걸렸다. 경험도 자본도 부족했다. 3년간 열정을 쏟았지만 상품이 빛을 보지 못했고, 빚은 쌓여만 갔다. 사람이 자지러진다는 게 뭔가를 알게 됐다. 어딘가 등을 기대고 있는데도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억울했다. 세상에서 제일 좋다는 교육은 다 받고 살아 왔는데 어느 날 보니 가족도 못 먹여 살릴 처지가 됐다. 가까운 친구와 한국의 아버지에게 마지막 도움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친구는 100만원을 주고 일어나더라. 이전 같으면 집어던졌겠지만 고분고분 받았다. 아버지는 아내와 아이를 한국으로 보내면 돌봐주는 것만 해줄 수 있다고 하셨다. 그렇게 했다.

울분이 치솟아 무작정 차를 몰고 나갔는데, 히스패닉 가족이 낡은 차를 타고 웃으며 나들이를 가는 모습이 보였다. 저 사람이 나보다 낫구나, 세상의 질서가 내가 생각해온 것과 다르구나 하는 생각에 정신이 들었다. 그 후 백방으로 돈을 구하러 뛰었다. 그때, 미국 통신사 팩텔이 한국 이동통신 사업에 참여하기 위해 제안서를 쓰면서 기술파트 번역작업을 요청해 왔다. 그러면서 수십만달러를 대가로 제안했다. 빚을 모두 청산하고 새로 출발할 수 있는 천우신조의 기회였다. 스탠퍼드 유학생들은 물론 아내들까지 총동원해 집단지성으로 엄청난 양의 제안서 작업을 끝냈다. 한국에서 2G 이동통신이 시작되려던 시절이었다. 덕분에 빚을 해결하고 네트워크와 통신개념까지 확실히 배웠다. 그렇게 미국 생활을 접고 귀국했다."

-굳이 험한 SI업을 안 해도 기회가 많았을 것 같은데.

"93년 1월 귀국 후 IT기업 오롬컴퓨터를 거쳐 오픈테크에서 공공영업을 맡았다. 그런데 금융사업이 잘 되니 회사가 공공사업을 접기로 결정했다. 그러면서 공공사업 전문회사를 세워 줄 테니 경영을 맡으라고 했다. 펄펄 뛰면서 안 된다고 했다. 차도 한 대 없이 겨우 벌어먹고 살 때였다. 당시 특허청과 대법원 프로젝트가 계약 직전이었다. 공공사업에서 호흡을 맞추던 배복태 현 데이타솔루션 대표를 비롯한 동료들이 같이 해보자고 설득했다. 95년 9월 떠밀리듯이 새 회사의 대표가 됐다. 거창한 역사적 사명으로 시작했다기보다 실패만은 절대 안 된다는 심정이었다. 퇴직금으로 출자를 하고 오픈테크의 자회사 식으로 오픈베이스를 세웠는데 이후 오픈테크가 외부 투자를 받으면서 지분정리를 해 내가 대주주가 됐다. 다행히 특허청 특허검색시스템 사업이 시드가 돼 줬다. 대법원도 판례정보검색시스템 구축 첫 단계부터 참여해 인연을 이어왔다. 덕분에 미국 유명 사법IT 기업들이 국내에 발을 들여놓지 못 했다. 한번 실패한 경험이 있다 보니 자금흐름과 리스크 관리에 집중했다. 크고 작은 어려움이 따랐지만 심각한 위기는 없었다."

-IMF 위기에 오히려 회사가 급성장했는데.

"돌이켜보면 운이 억세게 좋았다. 프로젝트를 따서 버티다 IMF 위기에 도약기회를 잡았다. 당시 대기업 하청에 의존해 기술투자를 안 한 기업들이 대부분 정리됐다. 우리같이 자체 기술과 독자 사업능력이 있는 곳만 살아남았다. 우리마저 망하면 함께 곤란해지는 정부·공공기관들이 대금지급 시기까지 앞당겨가며 일거리를 줬다. 그동안 쌓인 믿음이 바탕이 됐다. 돈이 돌고 처음으로 회사에 돈이 쌓였다. 2001년에 상장했는데 당시 SI사업을 해서 상장한 최초이자 유일한 기업이었다. 사실 창업 후 한 길을 걸어 중견기업까지 크는 게 참 어려운 일인데, 꾸준함 하나로 해낸 것 같다."

-인터넷 붐의 기회도 잘 잡았다.

"90년대 후반부터 인터넷 산업이 급성장하면서 트래픽관리 솔루션 시장이 커졌다. 당시 해외 기업들이 국내 대기업과 계약을 맺고 진출하려 해도, 대기업들이 IMF로 외화반출이 막혀 계약을 할 수 없었다. 그러다 우리와 인연이 닿아 계약을 맺고 초기부터 시장에 뛰어들었다. 비즈니스라는 게 참 재미있다. 90년대 초만 해도 인터넷이 어떤 기회가 될 지 막연했는데, 열심히 준비하고 체계를 갖추고 있으면 생각지 않은 기회가 열리더라. 그래서 AI와 데이터로 당장 뭘 할 수 있을지 명확하게 보이지 않아도 계속 시장을 보고 기술투자를 하고 있다.

그 후 CDN(콘텐츠전송망), 검색엔진, 무선 솔루션, 스토리지·서버 유통 등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그러면서 데이터 분석·솔루션 전문기업 데이타솔루션, 보안솔루션 기업 시큐웨이브, 비파괴 분석장비 기업 나노베이스를 계열사로 둔 그룹으로 성장했다."

-계열사들의 강점은 무엇인가.

"오픈베이스는 데이터의 원활한 통신을 위한 IT시스템과 인프라 구축에 특화된 기술이 있고, 데이타솔루션은 데이터 축적·분석에 강하다. 두 강점을 결합해 데이터·클라우드 플랫폼과 서비스 기업으로 자리매김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선 전문 산업분야와의 융합이 필수다. 과거 인터넷이 기회가 됐듯 열심히 준비하면 기회가 열릴 것으로 보고 투자하고 있다.

나노베이스는 이제 자리를 잡아가는 단계다. 제조업은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 빛을 쏴서 비파괴 분석을 하는 장비를 자체 기술로 생산하는 국내 유일의 광학기기 전문회사다. 시장은 크지 않지만 외산 제품에 시장이 좌지우지되는 것을 막고 있다. 처음에는 사회에 대한 기여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상당한 기대를 하고 있다."

-회사에서 가장 집중하는 역할은.

"주로 실패 담당이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책임지고 정리하는 게 내 역할이다. 실패라는 대가를 치러야 더 큰 성공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잘되면 좋지만 안 되면 빨리 잊는 게 답이다. 내가 책임져 줘야 직원들이 실패위험이 큰 일에도 도전하고, 회사가 역동성을 유지할 수 있다. 필요할 때마다 열심히 보증 서는 것도 중요한 역할이다.(웃음) 무엇보다 회사 내에서 '절대 선'의 가치가 유지됐으면 한다. 경영자는 열심히 바르게 일하는 사람이 제대로 평가 받도록 중심을 잡는 역할을 해야 한다. 일하는 방식부터 경영과 평가까지 모두 바른 기업이 되야 한다. 바르면 구성원 모두가 다 편하고, 최소한 먹고살 수는 있다."

-한국에서 중견 IT기업 하기는 어떤가.

"힘든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지원은 안 해줘도 좋으니 제한만 없었으면 좋겠다. 이해하기 힘든 게 우리가 공공SW 시장에서 대기업으로 분류돼 상당수 사업은 참여기회조차 박탈당하는 거다. 현 제도상 매출 800억원이 넘는 중견기업도 대기업으로 분류돼 40억원 이하 공공SW 사업은 수행할 수 없다. 데이타솔루션이 여기에 해당돼 재작년 처음으로 적자를 기록했다. 제도의 취지는 자체 일감이 많은 대기업에 공공시장까지 쏠리지 않게 하자는 건데, 우리 같은 중견기업은 자체 일감이 없다. 기업들이 미래를 위해 투자하고 사업을 키울 수 있도록 정책 리스크를 줄여줘야 한다. 데이타솔루션은 다행히 작년 어느 정도 회복했고, 올해와 내년 더 나아질 것으로 본다.

산업화 시대를 건너오면서 모든 법·체계가 제조업과 건설업에 맞춰져 만들어진 게 문제의 시작이다. SW산업도 건설산업 하도급규정 등이 그대로 적용됐다. 이제 점차 개선되고 있지만, 4차 산업시대에 맞는 구조로 반드시 변화해야 한다. SW산업진흥법과 데이터 3법 개정이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기업의 핵심 가치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뻔한 얘기로 들릴 지 몰라도 신용이다. 신용이 바로 돈이자 기회다. 그래서 항상 회사에 대한 평판을 점검한다. 기술력과 신용 두 가지는 확실히 중심을 잡고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코로나가 굉장한 기회가 될 것으로 본다. 한국이 세계적으로 투명하고 믿을 만한 나라로 평가받게 됐기 때문이다. 신용과 기술이 있으면 굳이 힘들게 설명하지 않아도 상대방이 선택한다. 대한민국이 그 수준에 올라갔다.

1980년대 일본이 한창 잘 나가던 시절 기술의 소니가 선두주자였고, 설국이란 소설과 닌텐도라는 게임이 세계를 휩쓸고 있었다. 기술과 문화, 두 가지가 함께 가더라. 지금 삼성전자와 방탄소년단, 기생충이 뜨고 있다. 다 연관이 있다. 그만큼 한국 사회의 힘이 커졌다는 거다. 거기에다 코로나19로 국제적 인증을 받으면서 적어도 20년간 기회가 열릴 것이다. IT기업에는 특히 호기다. 코로나19란 외부 충격이 성장 기회가 될 것이다."

-지난 3월 한국정보산업연합회 회장으로 취임했는데 활동계획은.

"시작부터 매우 다양한 산업군이 연합해 만들어진 게 정보산업연합회의 특징이다. 중소·중견·대기업이 모두 회원사이고, 업종별로는 SW·통신·컴퓨터 산업을 다 대표한다. 융합시대에 걸맞게 IT뿐 아니라 자동차·산업·금융 등 비IT산업까지 연계해 융합 시대를 촉진하고 디지털 혁신을 이끄는 단체로 만들어 가겠다. 또 관련 정부 정책이 바르게 가고 좋은 시스템이 만들어지도록 산업현장의 균형 있는 의견을 전달하도록 노력하겠다. 회원사의 권익을 대변하고 절충된 의견을 모으기 위해 의견교환·수렴의 장도 확대하겠다."

안경애 ICT과학부 부장 naturean@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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