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T현장] 이겨놓고 싸워야한다

박정일 산업부 재계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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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T현장] 이겨놓고 싸워야한다
박정일 산업부 재계팀장

지인이 물었다. 일본과의 무역전쟁에서 이길 수 있냐고. 전문가는 아니지만 나름의 생각으로 솔직하게 답했다. 이겼으면 좋겠지만 솔직히 쉽진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병법서의 고전으로 꼽히는 '손자병법'에 비춰보면 우리는 무척 불리한 싸움을 하고 있다. '승병선승 이후구전'(勝兵先勝, 而後求戰)이라는 말이 있다. 명장은 싸우기 전에 이미 이길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놓고 싸운다는 뜻이다.

일본이 얼마나 치밀하게 전쟁을 준비했는지는 현재 드러난 여러가지 정황으로 알 수 있다. 이는 미·중 무역전쟁과도 사뭇 다른 양상이다. 일본이 7일 관보에 게재한 '화이트리스트'(백색국가)배제 시행령은 수출이나 수입을 막거나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식의 일반적인 무역장벽과는 다르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경우 중국 기업들이 자국 정부의 비호를 받아 불공정한 경쟁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미국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균형을 맞추겠다는 논리를 펼치고 있다. 하지만 일본은 다르다. 한국에 대한 '백색국가' 제외 조치는 '불균형'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믿을 수 없는 국가'라는 프레임을 씌우고 있다. 그 이유로 한국 대법원의 일제 강제동원 배상 판결을 꼽고있다. 우리나라가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을 뒤집었다는 주장을 일본은 펼치고 있다.

물론 일본의 이 같은 주장은 논란의 여지가 다분하다. 그러나 이 주장의 옳고 그름을 떠나 일본은 이를 근거로 우리를 "못 믿겠다"며 밀고나온다. 배상 문제에 대한 국제법 판단은 있을 수 있겠지만, 신뢰 문제는 어찌할 방법이 없는 듯 하다. 못 믿을 나라이니 좀 더 수출을 꼼꼼하게 살펴보겠다는 꼼수로 우리의 반발을 막아내려 한다. 삼척동자라도 "저 나라는 못 믿겠으니 허락 받고 수출해라"라는 메시지를 정부가 공표한다면 "그래도 나는 수출하겠다"고 할 만한 기업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일본 정부가 적절한 명분을 만들어 막고 싶을때 언제든지 막을 수 있는 무기를 쥔 셈이라 우리는 그 프레임에 갇힐 수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주장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애시당초 이번 무역전쟁은 일본의 주도와 설계대로 시작한 것이다. 정부의 주장을 십분 반영하더라도 우리는 '예상'만 한 것이다. 만약 예상을 했다면 민관히 힘을 합쳐 미리 소재 국산화 또는 대체 수출경로 확보를 해야 했지만, 현실은 그게 아니었다. 실제로 일본은 백색국가 제외 조치를 앞두고 지난달 초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 소재에 대해 시범적으로 조치를 취했다. 이에 우리는 허둥지둥하는 모습을 보였다. 재계 총수들이 긴급 회의를 하고 정부가 부랴부랴 추경예산을 편성해 지원하는 모습을 보면서 일본 정부는 "역시 우리 계산대로"라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여기에 일본은 '보이지 않는 공포'라는 전술적 무기도 적절히 활용했다. 일본의 수출통제 관련 항목을 보면 구체적인 제품명을 규정하는 것도 있지만 그 범위가 워낙 방대하다. 여기에 국가 안보 등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전략물자 전반을 포괄하는 내용도 있어 피해 규모를 가늠하기 어렵다. 무역 전문가들은 이로 인한 피해 규모를 "신청을 해봐야 안다"며 특정하기 어렵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일본 정부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로 규제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우리 정부는 일본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이기지 못할 싸움은 시작하지 말라"는 손자병법의 조언은 이미 물 건너갔다. 힘의 차이 때문이다. 한일 간 인구와 명목 국내총생산(GDP) 등 경제력은 2~3배 가량 차이가 난다.

우리는 세계 1위인 반도체 벨류체인 붕괴 등을 이유로 세계 여론을 끌어들이려 하고 있지만, 우리보다 반도체 산업을 먼저 키웠던 일본은 오히려 재도약의 호재로 삼을 수도 있다. 일부에서는 한국의 보이콧으로 일본이 '자살골'을 넣었다는 주장도 나오지만, 품질과 내수 시장이 받쳐주는 일본이 이제 막 자급화를 시작하는 한국과의 경쟁을 두려워 할 이유가 없다.

정치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베 신조 정권은 이번 무역전쟁으로 참의원 선거에서 승리하면서 '자국 보호주의'를 밀어붙일 명분을 얻은 반면, 문재인 정부는 '극일'(克日) 프레임을 내년 4월 총선까지 끌고가기 부담스럽다. 그 사이에 경제가 망가지면 '극일' 프레임도 동력을 상실할 수 있다.

지난 4일 열린 고위 당정청협의회에서 주요 인사들은 일본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다짐하면서 냉정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말도 빠짐없이 내놓았다. 그러나 정말 냉정했다면 싸우기 전에 이미 이기는 싸움을 할 준비를 했어야 했다. 하지만 전쟁은 시작됐고, 우리는 일본의 도발에 단호하게 맞서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절대 지면 안되는 경제전쟁이다. 하지만 왠지 우리가 쓸 무기가 '죽창' 정도 밖에 없다는 생각에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다. 여러 상황을 분석했을 때 우리는 당분간 또 어려운 시기를 겪을 것 같다. 그럼에도 수많은 위기를 극복했던 대한민국은 이번에도 또 한번 단단해지는 계기를 얻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져본다.

박정일 산업부 재계팀장 comja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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