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와 콩글리시] 사느냐 죽느냐 … ‘킬러’ 공천](http://contents.dt.co.kr/images/201603/2016031702102251607001[1].jpg "[뉴스와 콩글리시] 사느냐 죽느냐 … ‘킬러’ 공천")
바야흐로 킬러(killer)의 계절이다. 이한구 공천관리위원장이 우선 추천지역 확대와 야당 '킬러' 공천을 예고하면서 인물들의 전략적 재배치가 현실화되고 있다(동아일보, 2016. 3. 8자). 자기 당의 후보가 상대적으로 취약한 지역에 거물급 후보를 내세워서 상대방의 유력한 후보자를 패퇴시키려 할 때 회심의 카드로 추천한 인물을 킬러라고 부른다.
인공지능(AI)이 관심을 끌면서 킬러로봇(killer robot)도 논란이 되고 있다. 인공지능과 자율능력을 갖춘 킬러로봇을 만들어 인명을 살상하는 전쟁에 써도 좋겠느냐 하는 윤리적 논쟁이 뜨겁다. 앞으로의 전쟁은 인간을 대신하는 로봇전투병들 간의 싸움이 될지도 모른다.
킬러 디자인(killer design)이란 말도 등장했다. 특정 제품군에서 제품 트렌드를 창조하는 동시에 한 기업을 대표할만한 빼어난 디자인을 가리킨다. 소비자가 제품 디자인을 보고 어느 회사 제품인지 금방 알 수 있다면 킬러디자인이라 불러도 좋다.
미디어 관련 언론보도를 보면 연일 킬러콘텐츠(killer content)라는 용어가 등장하고 있다. killer라니, 섬？한 용어 아닌가. 살인자, 도살자를 떠올리게 한다. 얼핏 생각하면 '살인마를 주인공으로 삼는 범죄물'로 오해를 살 법하다. 서울 중구 청계천로 문화창조벤처단지 개소식 뉴스를 보면 킬러콘텐츠 생산기지로서 포부가 넘쳐난다. "창의적이고 역량 있는 인재들의 집합소로 콘텐츠를 융복합시켜 킬러콘텐츠를 만들어낼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 단지의 개소식에는 대통령도 참석해서 "오늘은 문화창작인들의 꿈과 희망을 실직적으로 실현시켜줄 소중한 공간이 탄생하는 의미 있는 날"이라고 지적하고 "365일 멈추지 않는 경제 재도약의 심장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2015. 12. 29).
박근혜정부의 국정지표가 창조경제이고 그 기저에 문화융성이 자리하고 있어서, 파급효과가 큰 킬러콘텐츠 창작을 특별히 독려해 왔다. 얼마나 킬러콘텐츠에 목을 매었으면 'big killer content'라는 용어까지 생겨났을까. 킬러 콘텐츠가 한 장르 안에서 우수한 콘텐츠를 의미한다면, 빅 킬러 콘텐츠는 장르와 장르가 융합한 콘텐츠를 가리키는 신조어다. 이 단지는 문화기업들이 각기 다른 장르를 엮어 복합 콘텐츠를 만들어내도록 지원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킬러 콘텐츠는 한 분야를 제압하는, 파급효과가 큰 작품을 뜻한다. <겨울연가>와 <대장금> 같은 드라마가 한류를 선도했고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K-pop의 기폭제였음은 누구나 알고 있다. 한 편의 드라마가 영화, 소설, 만화, 뮤지컬 등 새끼치기(spin-off)하는 현상을 두고 one source, multiuse(한 작품 복합활용)라고 말한다.
킬러는 글자 그대로 대량학살현장(killing field)이나 암살자, 잔혹한 IS대원을 연상시킨다. 우리만 즐겨 쓰는 킬러 콘텐츠는 어디서 나온 말일까? 다른 콘텐츠를 '압도하는, 죽일' 정도의 영화, 게임, 프로그램, 웹툰, 뮤지컬, 캐릭터, 비디오, 만화 등을 지칭한다. 영어권에서는 킬러 콘텐츠라는 표현을 거의 쓰지않고 대신에 블록버스터(blockbuster)라는 말을 쓴다. 막대한 돈을 들여서 만든 거작 영화나 초대형 베스트셀러를 가리키는 용어다. 원래 블록버스터는 폭탄이름에서 유래했다. 도시의 한 블록을 파괴할만큼 큰 위력을 가진 4톤 내지 8톤쯤 되는 초대형 폭탄이 블록버스터였다.
1945년 2월13일 밤 영국공군은 바로크문화의 본산 독일의 드레스덴을 공습했다. 800대의 폭격기가 두 차례에 걸쳐 인구 65만명의 아름다운 중세도시에 4천톤의 폭탄을 퍼부었다. 융단폭격(carpet bombing)이란 말도 이때 생겨났다.
도시의 한 구획(block)을 날려버릴(bust) 정도의 위력을 가진 폭탄이란 의미에서, 경쟁상대를 초토화시킬, 대자본과 수퍼스타를 투입해서 단시간에 관객을 모으려는 대작 영화나 크게 히트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blockbuster라고 부르게 됐다.
킬러나 블록버스터나 둘 다 사람을 죽인다는 점에서는 별 차이가 없다. Killer technology가 획기적인 신기술을 뜻하듯 속어로 killer는 '죽여주는, 끝내주는, 근사한' 의미도 갖고 있으니 킬러 콘텐츠가 아주 엉터리 영어만은 아닌 듯 싶다. 어떻게 해야 킬러 콘텐츠가 쏟아져 나올까? 지원하되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 멍석을 펴주되 자유롭게 춤출 수 있게 해야 한다. 아울러 '실패의 자유'가 허용돼야 한다.
김우룡 한국외대 명예교수·언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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