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과학 칼럼] 첨단의학 연구환경 혁신 속도내야](http://contents.dt.co.kr/images/201603/2016031602102351607001[1].jpg "[의과학 칼럼] 첨단의학 연구환경 혁신 속도내야")
의학의 교과서라 할 수 있는 해리슨 내과 교과서를 읽어보면, 의학이 얼마나 눈부신 과학인가를 느낄 수 있음과 동시에 아직 의학이 가야할 길은 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니 가야할 길이 멀다는 말 보다는 인간이 아는 게 별로 없다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문자 그대로 "아직 모른다(currently unknown)"라는 표현이 삼천 번 이상 나오기 때문이다. 때문에 현대 의술은 과학에 근거를 두고 치료하고 있다고 하기보다는 천년 의료의 경험들을 과학으로 풀어가고 있다는 말이 더 올바른 것이 아닐까 싶다.
의과대학에서 의학을 배웠고, 의학을 연구하는 입장에서 나는 의학이 정말 평생을 바쳐 연구할 만한 가치 있는 학문이라는데 주저 없이 동의한다. 동기생들이 평생 연구만 하고 살 자신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 평생 연구를 하는 것이야말로 나의 가슴을 부풀게 만드는 일이라고 말했고, 그리하여 '기초의학' 중에 '생화학-분자생물학'을 전공으로 택했다. 훌륭한 학자가 되는 것과는 별개로, 평생 이 분야에 몸담을 수 있다는 것을 즐겁게 생각했다는 말이다. 그리고는 이제 더 이상 '신진'이라는 이름이나 '젊은', '떠오르는', '유망한'과 같은 수식어가 잘 어울리지 않는, 꽤 연식이 된 학자로 살고 있다. 이제 후배들을 위해서도 이 분야의 비전을 제시할 줄 알고, 새로 시작하는 의학도들에게 용기를 줘야 하며, 이 분야가 눈부신 비전을 가질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하는 의무도 있다. 잘 아시다시피, 의학을 배운 후에 연구만 하는 이 길을 택하는 후배들은 극히 드물지만.
이 분야를 걸어가면서 가장 마음 아팠던 것은, 왜 그런 걸 해, 라는 주위의 우려였다고 회상된다. 나를 걱정해주는 거라서 더더욱 마음이 아팠다. 내가 선택한 길이 정말로 나를 걱정하게 만드는 그런 길인가, 라는 고민을 프로이드가 말하는 무의식처럼 깔고 살았다. 그리고 진리를 탐구하는 과학자답게 과학적으로 분석해본 중간 결론으로, 나와 동료들이 가는 이 길이 그런 걱정스런 길이 아니라고 말하련다. 아니, 그야말로 자랑스러운 길이라고 믿는다. 앞으로도 지금까지 한 만큼, 어쩌면 그 이상의 시간을 연구한 이후에도 같은 결론이길 바라면서, 나 자신과 후배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연구를 하는 길은 그야말로 의학의 가장 선두 그룹에서 최첨단 의학을 위해, 미래의 의학을 위해 달리는, 가장 가치 있는 길 중의 하나라고 말이다.
나와 동료들이 가고 있는 이 분야를 흔히 '기초의학(basic medical science)'이라고 부른다. 의학의 선진국에서도 쓰고 있는 말이니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십 수 년 연구를 하다 보니, 이 명칭이 너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기초'라는 말이 '근본'이 된다는 의미에서 나온 것일 테지만, 사람들의 생각 속에는 '고급(advanced)'과 짝을 이루는 말로 들리기 때문이다. 말장난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가 하는 일을 아무리 곱씹어 봐도 연구를 하여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일이 의학의 '기초'라고 말하기 어렵다. 이 '기초'에 대한 그릇된 인식이 의과대학의 졸업생이 '내가 어려운 걸 다 배웠는데 왜 다시 기초를 전공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연구는 하고 싶은데 기초의학을 하기는 싫다고 그런다. 환자를 직접 상대하고 안하고가 문제가 아니다. 그래, 수많은 다른 요인들 중의 하나라고 치자. 하나만 강조해서 말하련다. 생화학이건, 분자생물학이건, 생리학이건, 해부학이건, 면역학이건, 세균학이건 , 바이러스학이건, 약리학이건, 그 어떤 학문에 뛰어들든지, 궁극의 의학 발전을 위해 평생 연구하는 사람들은 의학의 선구자들이며, 의학의 최첨단에 서 있는 사람들이다. '기초(basic)' 의학이 아니라 '첨단(advanced, cutting-edge)' 의학이라고 말해야 마땅하다.
이런 표현이 의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자조 섞인 푸념으로 들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만 모르는 것(unknown)을 아는 것(known)으로 바꾸고 싶은 마음으로 끊임없이 연구하는 사람들이 마음속에서 무의식과 같은 폄하되는 느낌과 싸워 가면서 연구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극한 자본주의 사회로 치닫는 요즘의 현실에서 경제적인 가치를 말하고 싶지는 않고, 나도 후배들에게 이 길이 금전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다고 말할 날을 기다리지는 않고 또 그러고 싶지도 않다. 이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감이다. 그리고 평생 연구를 한다는 사실을 걱정스럽게 바라보기 보다는 기쁜 마음으로 사회가 바라봐 주길 바란다. 첨단 의학을 연구하는 그들이 우리나라의 의학을 세계적인 수준에 올려놓을 사람들임을 인식할 수 있도록 말이다. 네가 하는 일이 중요해, 네가 하는 일이 중요해, 그렇게 말들을 하면서, 정작 하나도 중요하지 않게 모든 일이 흘러가서는 곤란하지 않겠는가.
우리나라 사람들은 머리가 좋고, 끈기가 있으며, 무엇보다 일하는데 성의가 있다. 대충 대충 하지 않는다. 오죽하면 좁은 땅덩이와 한정된 자원에 너무 똑똑한 사람들이 몰려 있으니 사기꾼들이 많이 나온다고 하지 않던가. 이들의 머리가 세계를 무대로 사용될 기회를 주어야 한다. 첨단 의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렇게 세계를 향해 똑똑한 머리와 지극 정성을 쏟는 사람들이라고 믿는다.
김재우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MRC 대사조절 유전체 통합연구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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