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도권 잡고있던 미국·일본 기술유출 우려 공동 방어장벽
1980년대 중반 1M D램 시제품 개발 기점 격차 줄여 나가
ETRI 등 참여 산학연 협력…1992년 64M D램 최초 개발
2000년부터 전체 수출액 15% 초과… 수출 효자상품 등극
■기술로 이룬 70년 성장신화
(13) 'D램' 개발
1991년 3월 일본과 거의 같은 시기 개발에 성공한 16M D램에 대한 공동개발 경과 보고회(왼쪽)와 16M D램의 모습. ETRI 제공
지금부터 41년 전인 1974년 11월. 정부는 우리나라를 방문한 국제연합(UN) 산하 국제금융기관인 '국제부흥개발은행(IBRD) 사절단'에 전자산업 발전 방안에 대한 조언을 구했다. 이때 IBRD 사절단이 제시한 것이 바로 '반도체'였다. 이듬해인 1975년 미국의 기술·경영 컨설팅 회사인 ADL에 의뢰한 '우리나라 전자공업의 장기 전망' 조사 결과에서도 미래를 이끌 핵심 기술로 반도체가 꼽혔다.
정부는 이러한 결과를 토대로 1977년 '제4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중 전자분야 연구개발(R&D) 핵심 사업으로 반도체 개발사업을 선정한 데 이어 1981년 3월 '전자공업 육성방안'을 발표하고, 반도체와 컴퓨터, 전자교환기 등 3대 전략품목을 중심으로 전자산업을 재편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산업의 쌀'…반도체를 미래 먹거리 기술로=이때부터 우리나라는 반도체가 바꿀 미래 산업지도에 관심을 기울이고 반도체 강국을 향한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당시 모든 전자제품의 핵심 부품인 반도체는 '산업의 쌀'에 비유될 정도로 미래 산업 발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핵심 기술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전 세계적으로 반도체는 '전자산업의 총아'라는 명성을 얻으며 미래의 먹거리 기술이자 미래 신성장동력산업으로 황금기를 맞고 있었다.
하지만 반도체 시장 진입은 녹록지 않았다. 당시 반도체 시장의 주도권은 미국과 일본이 잡고 있었다. 무엇보다 일본의 행보는 놀라웠다. 1975년 일본은 정부 300억엔, 5개 민간기업 400억엔 등 총 700억엔을 출연해 '초LSI 기술연구조합'을 구성하는 등 4년 내 미국을 압도할 수 있는 대규모 집적회로를 개발하겠다는 야심찬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정부의 강력한 지원과 투자에 힘입어 일본은 1976년 16kb(킬로비트), 1979년 64kb, 1980년 256kb 메모리 반도체 개발에 잇따라 성공하면서 기술 측면에서 미국을 추월하기에 이른다. 이런 상황에서 기술력과 재원, 시설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부족한 우리나라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열정으로 반도체가 가져다줄 선물을 기약하며 '선진국으로 가는 반도체 열차'에 올라탔다.
◇척박한 환경에서 반도체 개발에 뛰어=반도체 산업의 중요성에 일찍 눈을 뜬 선진국들은 서로 치열한 경쟁을 벌이면서 한편으로는 우리나라 같은 신흥 국가들이 반도체 시장에 진입하지 못하도록 공동으로 방어장벽을 쳐 나갔다. 일부 국가들은 반도체 하나를 팔면서도 용도를 상세하게 따져 묻는가 하면, 혹시나 기술이 새어 나갈까 우려해 일정 개수 이상은 아예 판매하지도 않는 등 철저히 공급자 위주의 시장 정책을 펴 갔다.
이런 상황에서 기술력과 재원, 시설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부족한 우리나라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열정으로 반도체 산업에 국가의 명운을 걸었지만 연구 수준은 걸음마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1976년 한국전자기술연구소(ETRI 전신)가 설립되면서 우리나라는 본격적인 반도체 연구에 착수했다. 집적회로 연구를 시작한 김만진 박사를 비롯, 8비트 마이크로컴퓨터와 32K 롬(ROM), 64K 롬을 개발한 이종덕 박사 등이 반도체 개발의 근간이 되는 연구를 수행했다.
우리나라가 1M D램 시제품을 개발하고 있던 1980년대 중반, 반도체 선진국인 미국과 일본은 이미 4M D램의 실험 시제품을 개발하고 있었다. 그 당시 우리나라와 선진국의 반도체 기술개발 격차는 64K D램 4년, 256K D램은 4년, 1M D램은 2년으로 벌어져 있는 상황이었다.
우리의 경쟁상대인 일본은 그야말로 '최고 전성기'를 맞고 있었다. 1985년 전 세계 반도체 업계 1위는 일본 NEC였고, 당시 세계 반도체 순위 10위 안에 드는 일본 기업은 무려 5개였다. 5년 후인 1990년에는 1위부터 3위까지 모두 일본 업체가 차지했고, 10위 안에 드는 업체는 6개사로 늘었다. 전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일본이 최고의 호황을 누리며 최강국으로 군림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반도체 선진국인 미국과 일본은 이미 4M D램 실험 시제품을 개발하고 있었고, 우리나라는 삼성전자에서 1M D램 시제품을 개발하고 있었다.
◇반도체 신화의 초석 '4M D램' 개발 첫발=정부는 더딘 반도체 개발을 앞당기기 위해 1986년 특정연구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초고집적 반도체 기술 공동개발사업' 계획을 수립했고, 과학기술처와 체신부, 상공부 3개 부처가 사업 계획을 토대로 4M D램 공동 개발 전략을 최종 확정했다.
ETRI가 연구개발을 총괄하고, 삼성반도체통신, 금성반도체, 현대전자, 서울대 부설 반도체공동연구소가 공동으로 참여하는 초대형 반도체 프로젝트이면서 우리나라 반도체 신화의 초석이 된 '4M D램 산학관연 공동개발 사업'이 첫발을 내디딘 순간이다.
참여기업 간 경쟁 유도와 연구자의 사활을 건 땀과 노력으로 4M D램은 예정보다 한 달 빠른 1989년 2월 개발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일본과 미국에 비해 1년 정도 늦게 출발하긴 했지만 우리나라도 초고집적 반도체 제조 기술을 보유한 국가 반열에 올라서게 된 것이다.
◇산학연 협력 통해 64M D램 세계 최초 개발=4M D램에서는 뒤졌지만 이후에도 계속 뒤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공동개발팀은 4M D램 개발을 끝내기 전인 1988∼1989년 선진국들이 이미 개발하고 있던 16M D램, 64M D램의 개발 타당성을 검토했다. 4M D램 개발 완료와 함께 곧바로 착수해야 선진국을 따라잡을 수 있다는 판단에 차세대 반도체 기술 공동개발을 추진한 것이다.
4M D램과 마찬가지로 ETRI가 공동개발을 총괄하고, 4M D램에 참여했던 3개 기업과 금호석유화학 등 6개 업체, 2개 정부출연연구기관, 서울대 등 19개 대학이 참여했다. 명실상부한 산학연 협력 프로젝트였다.
공동개발은 차질없이 진행돼 1991년 3월, 시제품 검증과 평가까지 마쳐 우리나라는 일본과 거의 같은 시기에 16M D램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일본과 당당히 어깨를 나란히 하며 반도체 선진국 대열에 진입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을 쏘아 올린 것이다.
더 나아가 이듬해인 1992년 세계 최초로 64M D램을 개발해 일본의 독주에 제동을 걸고 앞서가기 시작했다. 이후 1994년 256M D램 개발에도 성공한 여세를 몰아 우리나라는 오늘날까지 세계 메모리 반도체시장 점유율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수출 효자상품 등극…반도체 강국 우뚝=반도체 개발은 우리나라 정보통신 산업 전체적인 기반을 탄탄히 구축함으로써 선진국과의 기술격차를 줄이고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하는 디딤돌이 됐다.
반도체를 필두로 한 정보통신산업 육성으로 기존 노동·자본 집약적이던 우리나라 수출 구조는 기술 집약적 산업으로 변모했다. 반도체의 경험과 기술력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의 가전, 스마트폰, 이동통신 등 ICT 산업의 골격이 탄탄하게 완성됐고, 조선, 자동차 등 주력산업의 경쟁력도 세계 선두 수준으로 높일 수 있었다.
반도체는 2000년부터 우리나라 전체 수출액의 15%를 넘어서면서 수출상품 중 단일품목으로는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며 국가 경제발전을 이끌어 가고 있는 주역으로 자리잡고 있다. 또 사회 전반에 걸쳐 정보화를 촉진시켜 국민의 생활 패턴과 유통 구조에도 혁신적 변화를 몰고 왔다.
반도체 전문가들은 1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우리나라가 세계 최고의 반도체 기술 강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선진국을 따라 잡을 수 있다는 강한 확신과 반도체 개발을 국가 정책으로 추진한 정부의 리더십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국가 차원에서 명운을 걸고 추진한 4M D램 공동개발 사업을 통해 계획보다 앞당겨 성공의 열매를 딸 수 있었고, 16M D램, 64M D램 등의 성공으로 이어져 우리나라는 불과 10년 만에 선진국을 따돌리고, 반도체 기술 불모지에서 반도체 강국으로 우뚝 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