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과학 칼럼]`가슴 뛰는` 과학의 현장으로](http://contents.dt.co.kr/images/201503/2015031102102251607001[1].jpg "[의과학 칼럼]`가슴 뛰는` 과학의 현장으로")
의과대학 학생시절, 아마도 천연두를 공부할 때였을 것이다. '에라디케이션(eradication)'이라는 단어를 보았다. 우리말로는 근절, 박멸 정도로 해석될 수 있는 이 단어는 원래 감염병에서 원인균을 세상에서 완전히 없앤다는 의미로 쓰인다. 질병의 치료와 인류의 건강을 목표로 공부하는 한 의학도에게 이 단어는 사뭇 가슴을 뛰게 하였고, 그날 밤 일기에 이렇게 썼다. 내가 무덤에 가기 전에 하나의 질병을 에라디케이션 하겠다고, 내 무덤에 한 질병을 함께 묻고 싶다고, 그렇게 하고 싶다고.
나는 비만과 당뇨를 연구하고 있다. 의학을 배웠고, 과학을 하고 있다. 지방세포가 형성되는 과정을, 주요 유전자를 발굴하여 그 유전자 발현이 조절되는 과정을, 체내에 지방이 축적되고 사용되는 과정을 연구한다. 질병 모델을 마련하고, 정상과의 차이점을 찾아내어 왜 그렇게 변화하는지를 탐구한다. 유전자를 클로닝하고, 유전자를 과발현하고, 유전자 발현을 억제한다. 밴드를 분석하고, 숫자를 정리하고, 통계적으로 혹은 과학적으로 의미가 있는지를 파악한다. 문서를 작성하고, 사실 틀릴지도 모르는 가설을 그림으로 그린다. 그리고 그것들을 워드와 파워포인트 파일에 넣고, 가지런하게 정리한다.
그러다보니, 몇 개의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아주 능숙하게 다룰 수 있게 되었다. 누가 보아도 프로가 작업한 것 같은 결과물을 놓고 뿌듯해하며 몇 번씩 감상한다. 그리고 이내 그러고 있는 자신을 보고 놀란다. 워드 프로세서가 천연두를 박멸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의기소침해진 과학자는 애써서 창의적이 되려고, 창조적이 되려고 자신을 채찍질한다. 그룹의 리더와 편집장 정도는 대충만 해도 잘할 것 같은 능력이 생겼는데, 질병을 에라디케이션하고 싶은 마음과 능력은 그 때 그 자리에 머물고 있는 것만 같다. 언젠가부터 과학자들이 함께 모이면 현실의 불만을 토로하고 누군가를 성토하기에 바쁘다. 그 자리에 비만과 당뇨는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다. 어떤 때는 비만과 당뇨가 말 그대로 지겹다.
일 년 내내 에라디케이션만 생각한다면 지극히 청순한 몽상가 이상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과학자의 머리는 자주 깊은 산 속의 샘물처럼 맑을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믿는다. 나는 그럴 때 마다 하얀 백지에 사람의 몸을 그리면서 공상을 시작한다. 소화관을 그리면서 불과 몇 년 전에는 생각할 수 없었던 많은 지식과 이론이 떠오른다. 그래서 공상은 진화한다. 치열하게 문서에 매달렸던 기간은 결코 옥치무당(玉?無當)은 아니었다. 몇 가지의 아이디어가 백지에 빼곡하게 적힌다. 과학을 하는 사람만이 과학 안에서 느낄 수 있는 최고의 흥분이 느껴진다.
2015년 을미년 새해에 소망한다. 가슴 뛰는 과학의 현장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나와 모든 과학자들, 그들의 머리가 샘물처럼 맑아지기를. 같은 음식과 산소를 마셔서 만들어낸 과학자의 고귀한 ATP가 제발 질병을 에라디케이션하는 아이디어를 만들어내는, 바로 그 뉴런에 의해 사용되기를. 사실, 2015년은 기대와 희망 속에서 출발하지만 조금 두렵기도 하다. 많은 대형 사업의 재평가 혹은 재진입이 예고되어 있고, 세상과 사회는 어지럽고 서민의 삶은 스산하다. 점수로 환산된 능력치에 너덜너덜해진 과학자는 조급하기만 하다. 과학자의 뉴런이 낭비될 많은 요소가 입을 벌린 악어처럼 저편 강가에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또 스스로 명심한다. 뉴턴도, 레오나르도 다 빈치도, 파스퇴르도 어쩌면 그보다 더한 곳에 있었다. 그들도 불평했고, 그들의 뉴런도 많은 곳에 빼앗겼다.
중요한 것은 지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 내 자신이 가슴 뛰는 과학에 뉴런과 ATP를 내 던질 마음의 준비가 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안에서 행복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에라디케이션을 하는 것보다 그런 생각으로 인한 벅찬 마음, 우리의 뉴런은 그것을 기다리고 있다.
나는 과학자가 일평생 단 한번만 번득이는 아이디어를 낼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되었다는 생각을 가지고 과학을 했다. 그런 순간을 위해 수만 시간을 들였고, 마침내 그 날이 오면 나의 출발은 오직 이 순간을 위해 있었다, 라고 말하려고 했다. 물론 그 순간이 오리라는 보장은 없다고 해도 말이다.세상이 녹록치만은 않아서 나도 과학을 할 수 있는 환경 내에 비집고 자리를 잡아 그 안에 존재하기 위해서 많은 애를 써 왔다. 그러나 올 한해만큼은 그 환희의 순간을 만나기 위해 바치고 싶다.
김재우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MRC 대사조절 유전체 통합연구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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