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인문학] 창조의 원천, 인문학적 상상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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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02-21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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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하버드 대학에선 흥미로운 실험이 있었다. 두 명의 심리학 교수는 학생들에게 하나의 동영상을 보여주었다. 흰 옷 3명과 검은 옷 3명이 각각 팀을 이루고 농구공을 하나씩 나눠 가진 뒤 같은 팀끼리 주고받는 것이었다. 교수들은 학생들에게 흰 팀의 패스 개수를 세라고 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개수를 정확하게 맞추었다. 그런데 실험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교수들은 학생들에게 다시 물었다. "고릴라를 보았는가?" 교수들은 화면 속에 검은 고릴라 복장을 한 사람을 지나가게 했던 것이다. 놀랍게도 절반이 넘는 학생들이 `고릴라'를 보지 못했다. 학생들은 흰 팀의 움직임에 정신을 파느라 검은 색의 움직임에 주목하지 않았던 것이다. 교수들은 이 현상을 `주목하지 않았기 때문에 보지 못했다'는 뜻에서 "Inattentional Blindness(무주의 맹시(盲視))"라고 불렀다.

이 실험의 결과에 어울리는 고은의 시 한편을 소개한다. "내려올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산꼭대기를 향해 돌진하던 때는 보이지 않던 꽃이, 여유를 가지고 내려 올 때야 비로소 보인다는 시인의 노래는 우리 인식의 비밀을 밝혀준다. 어디 등산뿐이겠는가? 20대의 시절을 다 살아낸 30세의 눈에는 지난 10년간 보이지 않았던 것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40대에는 또 다른 것이 눈에 띄고, 50세에는 또 다른 것이 보이리라. 젊은 시절 성공과 출세를 위하여 숨 가쁘게 보내고 난 뒤, 저물어가는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그때 그 찬란했던 시절에는 도저히 보이지 않았던 수많은 `그 꽃'들이 허허로운 시야를 가득 채울 것이다. 하지만 이미 그 아름다움을 누릴 시간은 다 지났고, 절절한 회한만이 남을 것이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그렇게 살지는 않았을 텐데. 더 멋지게 살 수 있었을 텐데. 분명 그곳에 있었지만 보이지 않던 고릴라처럼, 삶을 행복하게 수놓을 수 있었던 수많은 `그 꽃'들이 그때도 거기에 있었건만, 그때는 도무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내리막길에서야 비로소 보이는 그 꽃이 청춘을 멀찍이 떠나보낸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그래서 그렇게 시리도록 아름다울 수 있는 `그 꽃'. 지금도 우리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아름답고 소중한 많은 것들을 놓치고 있으리라. 나중에 아쉬워하고 말 그 수많은 것들을.

보이지 않는 고릴라 실험이 말해주듯이, 우리는 관심이 없어 주목하지 않기에 눈에 빤히 보이는 것도 놓치고 만다. 하지만 우리가 관심을 가지면 그것뿐만 아니라, 지금 당장은 보이지 않는 것도 볼 수 있는 혜안을 갖게 된다. 인문학적 상상력 때문이다. 인간이 무엇인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는 사람들이 갖는 인문학적 상상력은 세계를 새롭게 창조하는 힘이다. 그것은 시인뿐만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하다. 교실 속 아이들의 현재 모습만을 바라보고 꾸중하거나 칭찬하는 교사는 아이들에게 창의적인 미래를 제시할 수 없다. 상상력의 빈곤 때문이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비전을 그려내는 경영자는 현상에 집착하는 경영자보다는 더 큰 가치와 미래를 만들어낼 수 있다. 스티브 잡스는 몇 개의 새로운 기계를 상상한 것이 아니라, 그 기계를 누리며 살 수 있는 전혀 새로운 세계를 상상했던 것이다. 지금 세계는 그가 상상했던 대로 구현되어 있지 않은가.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말한다. "내 비밀은 이거야. 아주 간단해. 사람들은 마음으로 보지 않으면 잘 볼 수가 없다. 제일 중요한 것은 눈에는 보이지 않아."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그것 너머로 어떤 세계를 창의적으로 그려낼 수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모진 핍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보이는 것 너머를 그리고 믿었기에 지금까지도 지속적인 힘을 갖고 있는 기독교의 초석을 세웠던 바울이 한 말이다.

김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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