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아 도시 스토리 텔러
![[김은아의 도시스카프] 도시는 감각으로 존재한다](http://contents.dt.co.kr/images/202506/2025061202102269058001[1].jpg "[김은아의 도시스카프] 도시는 감각으로 존재한다")
자동차가 삼키지 못한 발 끝의 감각
사람이 먼저 걷는 헬싱키 중앙공원
땅의 온도와 그늘의 숨결을 품어라
초등학교 1학년 즈음이다. 네모난 책가방을 메고 고불고불한 오솔길을 따라 집으로 가던 풍경이 떠오른다. 개구리 왕눈이가 타고 다니던 개구리밥 같던 넓적한 토란, 무릎을 넘어선 강아지풀, 그리고 이름 모를 들꽃들이 촘촘하게 자리잡은 좁은 길. 풀이 살에 스치면 강아지 꼬리가 종아리에 닿는 듯한 포근한 감촉, 비 오는 날이면 토란잎을 머리에 쓰고 달리던 순간들. 아침이면 이슬 맺힌 나팔꽃이 반짝이고, 해가 쨍하게 오르면 들판의 색깔은 더욱 선명해졌다.
옷이 이슬에 젖어도 마냥 좋았던 시절, 하교 길엔 하늘이 몽실몽실 구름으로 덮이고, 덥지만 설레는 마음으로 "집에 가서 뭐하고 놀까?" 하며 잽싸게 뛰어갔다. 학교 가는 길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도, 그냥 걷는 게 아니라 뭐가 그리 신났는지 그저 좋았다. 하지만 '오솔길'이라는 단어도 이제는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것 같다.
도심에는 황톳길과 숲길이 있다. 6월의 여름 햇살이 반짝이는 흙길 앞에서 잠시 망설였다. 신발을 벗어도 될까? 첫걸음을 내딛는 순간, 어린 시절의 그 길로 돌아간 듯하다.
햇볕 받은 황토는 온돌방처럼 은은하고, 그늘진 곳은 서늘하다. 울퉁불퉁한 나무뿌리를 조심스레 밟으면 발가락이 꼼지락 거린다.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빛은 청신하고, 여름 바람에 실린 풀 내음, 숲속 새소리가 어우러진다. 마른 땅이 물을 삼키듯, 온 감각이 살아난다.
신발을 벗는다는 건 단순히 발을 땅에 닿게 하는 것 이상이다. 도시의 속도, 사회적 무게, 일상의 삶을 잠시 내려놓는 행위이다. 발끝으로 흙의 질감을 확인하고, 몸의 균형을 잡는다. 귀는 바람 소리를, 코는 풀 내음을, 눈은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빛을 각각 담는다. 빛의 질감도, 공기의 밀도까지도 느낄 수 있다. 여름의 흙길은 특히 생생하다.
자동차가 길을 삼킨 도시에서 이런 길은 보기 드물다. 1960년대 이후 한국의 도시는 자동차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보행 환경은 안전, 쾌적, 편리 모든 면에서 자동차 도로에 밀려 열악하다. 보도는 도로의 부속물로 전락하고, 사람의 보폭은 신호등과 경보음에 맞춰진다.
우리는 언제부터 걷는 존재임을 잊었을까? 500만년 전 사바나에서 시작된 우리는 자연과 함께 숨 쉬었지만, 도시 생활은 고작 수백년의 역사일 뿐이다. 산업화 이전, 길은 사람의 발로 만들어졌다. 토란밭을 지나, 풀을 스쳐다니며, 구불구불한 오솔길이 생겨났다. 나무를 피해, 언덕을 따라, 개울을 지나 사람의 리듬이 길을 그렸다.
하지만 오늘날 도시는 직선과 콘크리트가 사람의 본능을 가둔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람만의 길'을 찾는다. 대학로의 좁은 골목, 북촌 한옥마을 골목길, 경의선 숲길, 경춘선 숲길. 자동차가 주인이 아닌 공간에서 차에 대한 긴장감을 내려놓고 걷기에 집중할 수 있다. 신호등에 쫓기지 않아도 된다.
![[김은아의 도시스카프] 도시는 감각으로 존재한다](http://contents.dt.co.kr/images/202506/2025061202102269058001[2].jpg "[김은아의 도시스카프] 도시는 감각으로 존재한다")
핀란드 헬싱키의 중앙공원(Keskuspuisto)에서는 첫눈이 내리면 도시가 귀를 기울인다. 눈 덮인 공원에서 사람들이 밟은 발자국은 하얀 캔버스 위에 선명한 선을 그린다. 한 사람이 지나고, 열 명의 사람이 지나고, 백 명의 사람이 지나면 뚜렷한 경로가 생긴다. 도시 계획자는 이를 관찰해 새 보행로를 만든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이를 "사람의 발이 도시를 가르치는 순간"이라고 했다. 헬싱키의 겨울 공원은 사람들의 본능이 어디로 향하는지 보여준다. 누군가는 나무 아래 그늘을 따라 걷고, 누군가는 언덕을 피해 완만한 길을 택한다.
이 디자이어 패스(Desire Path)는 행정의 의도가 아닌, 사람의 직관이 그린 길이다. 예를 들어, 공원의 호수 근처에서는 사람들이 물가를 따라 걷는 경로를 선호하고, 이를 반영해 나무 데크나 흙길이 새로 조성된다. 런던 케임브리지대학교의 강변 정원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학생들이 잔디밭을 가로질러 만든 지름길, 수백 개의 발자국이 겹쳐지며 잔디가 닳고 흙이 드러난다. 대학은 이를 질문 없이 공식 보행로로 포장했다. '도시 계획이 인간의 욕구를 배워가는 과정'이라고 평할만 하다.
학생들이 대각선으로 걷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 길이 가장 빠르고, 가장 자연스럽다. 이는 북유럽의 시민 참여 문화와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이 녹아든 결과다. 사람들이 왜 그 길을 택했는지 묻지 않고, 그들의 선택을 존중한다. 반면 한국은 다르다. "빨리빨리"와 하향식 계획에 익숙한 우리는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통제해야 할 변수'로 본다. 하지만 연구는 자연 속 걷기의 치유력을 증명한다.
오솔길은 단순한 길이 아니다. 몸과 마음이 자연과 조응하는 '감각의 회랑'이다. 도시는 왜 우리의 감각을 외면할까? 자동차 중심의 직선 도로는 사람의 보폭과 리듬을 잊게 한다. 우리는 자연의 일부다. 흙을 밟으며 존재감을 느끼고, 바람 소리에 행복을 찾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이 자주 밟는 샛길을 공식 보행로로 만들어보자. 좁은 골목에서 사람들이 자주 멈추는 모퉁이에 작은 초지를 만들 수도 있다. 여름마다 '맨발 걷기 캠페인'을 열어보면 어떨까?
따스한 흙과 서늘한 그늘을 되찾는다면, 도시는 더 살만할 것이다. 오솔길은 직선이 아니다. 삶처럼 말이다. 나무를 피해 구불구불하고, 언덕을 따라 오르내리며, 개울을 넘나든다. 내가 원하는 속도로 걸을 수 있는 길이다. '내가 걷고 싶은 길'을 제안받는다면 어떨까? 어린 시절의 길, 미래 도시의 오솔길은 우리의 본능이 그린 길이다. '내가 걷고 싶은 길은 이쪽이다'라고 건네는 몸의 메시지이다.
도시는 효율이 아닌 감각으로 설계될 때 비로소 우리를 포용할 수 있다. 사람은 감각으로 살아간다. 도시도 그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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