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석유화학과 철강산업이 구조적 침체에 빠지면서 한국 제조업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다. 중국발 산업 경쟁력 약화와 정부 지원책의 한계 속에서 골든타임을 놓치면 '제2의 대우조선해양' 사태처럼 부실기업으로 내몰릴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5일 화학경제연구원에 따르면 국내 석유화학 산업은 합성수지, 합성원료, 합성고무 3대 부문 수요는 지난해 기준 972만톤을 기록했다. 2014년 1027만톤을 기록한 이후 10년 동안 1000만톤 수준을 유지해왔지만 지난해 처음으로 1000만톤 선이 무너진 것이다.
이는 국내 석유화학 기업들의 최대 수출 시장이었던 중국이 자국 내 생산 능력을 대폭 확대하며 자급률을 높인 영향이다. 일부 품목은 수출국으로 전환했다. 특히 중국의 폴리프로필렌(PP) 수출량은 2020년 36만톤에서 지난해 189만톤으로 급증했다.
중후장대 산업에 속하는 철강업계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중국산 철강재 수입량은 877만톤으로 2017년 이후 최대치를 기록했다. 한국산 후판이 톤당 약 90만원에 거래되는 반면, 중국산은 70만원대로 20%가량 저렴하다.
국내 뿌리산업 기업들은 중국의 저가 공세와 중국을 포함한 글로벌 석유화학 설비 증설에 따른 공급과잉, 글로벌 경기 침체로 수익성이 급격히 악화되고 있다. LG화학의 지난해 영업이익은 전년 대비 63.8% 감소한 9168억원으로 4분기에는 5년 만에 적자로 돌아섰다. 롯데케미칼도 3년 연속 적자가 예상된다.
정부가 '석유화학산업의 경쟁력 강화 방안' 대책을 발표했지만 실효성 비판이 끊이지 않고 있다. 정부 방안이 기존 정책의 연장 수준이기 때문이다. 납사와 납사 제조용 원유에 대한 무관세 기간을 내년 말까지 연장한 것은 사실상 기존 정책을 유지하는 것에 불과해 새로운 지원책이라 보기는 어렵다.
인수합병에 따른 세금 감면 혜택도 대형 석유화학 기업들은 실질적인 혜택을 받기 어렵다. 양도세 감면의 경우 자산 10조원 이하의 기업만 한정적으로 해당된다.
사업 재편을 위한 신규 투자 지원도 '완전 신규 투자' 중심이어서 기존 시설의 증설은 포함되지 않는다. 신산업과 신기술을 유도하려는 정책적 의도 때문이지만 업계 입장에서는 현실적으로 필요한 투자 유인이 부족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는 구조다. 정부 재정 문제뿐만 아니라 각 지자체가 감당해야 할 부담이 크다는 점도 실현 가능성이 낮다는 목소리다.
LG화학은 최근 실적 컨퍼런스콜에서 "일부 기대 가능한 영역은 존재하지만 대부분이 대기업은 수혜 대상에서 제외가 되거나 사업적인 손익 관점에서 보면 영향은 미미한 항목들이 많다"며 "당사의 수익성 관점에서 당장 가시적인 효과는 좀 제한적일 것으로 판단한다"고 평가했다. 이어 "올해 상반기에 후속 대책 발표가 예정돼 있는 만큼 지속 건의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정부는 기업의 자율적인 사업 재편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설계했지만 강력한 실행력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석유화학 산업은 설비 투자 비용이 크고 글로벌 시장과 밀접하게 연계된 만큼 개별 기업이 독자적으로 인수·합병을 추진하기 어려운 구조다.
개별 기업이 구조조정을 하면 이 과정에서 고용 불안과 지역경제 위축, 산업 생태계 붕괴 같은 사회적 문제도 발생할 수 있다. 기업 단독으로 추진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한 석화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명확한 구조조정 방향을 제시하고 실질적인 인수합병 지원책을 강화해야 한다"며 "시장에서는 지금이 마지막 골든타임이라는 인식이 있다. 단순한 인센티브 제공을 넘어 보다 강한 정책적 유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부가 기업의 자율적인 구조조정에만 의존할 경우 조선업과 마찬가지로 구조조정 지연에 따른 대형 부실기업이 다시 등장할 위험이 커질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산업의 경쟁력 약화와 정부 지원책의 한계라는 공통된 구조적 문제 속에서 제2의 대우조선해양 사태가 현실화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양준모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중국이 조선, 철강, 화학, 자동차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 산업의 생명줄을 위협하고 있어 선제적인 구조조정과 지원 정책이 절실한 상황"이라며 "기활법 같은 법적 제도를 활용할 때 재벌 특혜라는 비판을 의식해 일정 규모 이상의 대기업에는 혜택을 주지 않도록 제한을 거는데 미국, 중국, 유럽 모두 국가 주도의 산업 정책을 강화하는 흐름에서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박한나기자 park27@dt.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