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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종훈의 근대뉴스 오디세이] 100년전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 이채로운 수상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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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종훈 19세기발전소 대표·아키비스트
[송종훈의 근대뉴스 오디세이] 100년전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 이채로운 수상자들

격찬 받은 기생 오산홍의 사군자 한 폭
여류작가 방무길의 서화, 큰 인기 끌어
경탄 자아낸 초등 6학년 박창래의 서예
운현궁 가정교사 정연세의 신묘한 초서


100년 전인 1924년 6월 1일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조선미전)가 열렸다. 비록 일제의 문화정치 일환으로 시작된 것이지만 많은 인기를 끌었다. 당시 입선· 전시된 총 219점 중에서 조선인 입선작은 겨우 60점에 불과했지만 어린 학생, 기생, 신진 여성 등 이채로운 조선인 수상자들이 많이 나와 눈길을 끌었다. 세상의 편견을 뚫고 '예술 혼'을 불태운 예술가들을 한번 찾아가 보자.

1924년 6월 2일자 매일신보는 관심을 끌고 있는 조선미전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조선미전은 제3회에 접어들어서는 개막 첫날 아침부터 많은 사람의 인기를 집중하여 오전 중에 벌써 입장자가 2,000여 명에 달하고 계속하여 회장(會場)으로 모여드는 중이며, 전날의 초대일에는 초청장을 가지고 들어 갔던 사람이 1,500여 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많은 작품 가운데 기생 오산홍(吳山紅)의 사군자 한 폭이 눈길을 끈다. 이 작품은 심사위원들의 격찬을 받았다. "제3부 사군자에 입선 진열된 15점 중에 가장 소탈한 묵란(墨蘭) 한 폭이 그 1위를 점령하고 가장 많은 인기를 끌었다. 그 난초를 그려낸 주인공은 현재 대정권번에 기적(妓籍)을 두고 경성부 내 황금정 1정목 76번지에 거주하는 오산홍이란 당년 19세 된 기생으로, 본명 오귀숙(吳貴淑)이란 여자이다. 그는 일찍이 그 부친을 잃고 모친 슬하에서 귀여움을 받으며 지내면서 인천 영화(永化)여학교에 3년 동안 다니다가 가세의 형편으로 그것도 졸업을 하지 못하고 14살 되는 해에 기생의 몸이 되어 (중략) 기생이 된 그 해부터 서화 공부를 시작하여 소호(小湖) 김응원(金應元) 화백과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씨에게 나가서 약 1년 동안 공부를 하다가 (중략) 이번 출품은 불과 30분간 장난삼아 그렸던 것이 뜻밖에 입선되었다는 바, 자기는 이후로 어떠한 일을 당하던지 서화를 전문으로 공부할 결심이라 굳게 말하는데, 오산홍은 서화가 능한 외에 거문고와 양금(洋琴)에도 기교가 매우 능란하다더라." (1924년 6월 2일자 매일신보)

[송종훈의 근대뉴스 오디세이] 100년전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 이채로운 수상자들
신진 여류작가 혜연(惠淵) 방무길(方戊吉) 여사도 관심을 받았다. "이번까지 세 번째 전개되는 조선미술전람회에 번번히 입선되어 많은 인기를 끌며 보는 사람의 심안(心眼)을 놀라게 하는 숨은 서화가 한 사람이 있다. 그는 깊은 규중에서 위로 부모와 남편을 모시고 아래로 삼 남매의 자녀를 양육하고 있는 당년 27세 된 혜연(惠淵) 방무길이란 신진 여류 화가이다. 일찍이 숙명여학교를 졸업하고 여가를 이용하여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씨 문하에 나가서 글씨와 사군자 등을 배우는데 (중략) 미술전람회가 시작된 이후로 초서와 액자 등의 글씨와 사군자 등으로 가장 많은 환영을 받고 이번에도 횡란(橫蘭) 한 폭과 풍청월명수려산명(風淸月明水麗山明)이라 쓴 초서 두 가지가 모두 입선되어 매일 수천여 명의 관람자에게 많은 찬송을 받고 (중략) 미술전람회가 처음 열렸을 때에는 여자의 출품자가 겨우 한 명 밖에 되지 못하였고 제2회에는 2명에 불과하던 것이 이번에는 여자의 출품이 많고 그중 입선과 입상된 사람이 적지 않다 함은 무엇보다 기쁜 일이다. 우리 조선에서도 여자들이 모여서 공부할 만한 미술 연구기관이 없음을 한(恨)한다." (1924년 6월 2일자 매일신보)

초등학교 6학년 박창래(朴昌來)양의 신묘(神妙)한 필법도 소개됐다. "이번 미술전람회에 진열한 총 점수 225점 중에 제일 많은 인기를 끌며 보는 사람마다 경탄함을 마지않게 하는 글씨 한 폭이 있다. 충남 조치원공립보통학교 제6학년생 박창래라는 당년 12세 된 소녀가 출품한 문명사해(文明四海)라 쓴 초서(草書)인데 (중략) 나이 제일 적은 어린 여학생으로 작품이 다른 유명한 서화 대가의 출품을 압도할 만큼 되었으므로, 관중은 두 번 세 번 거듭 보며 그의 천재(天才)를 무한히 칭찬한다는 바 (중략) 그 조부 박동근(朴東根)씨에게 서법(書法)을 배워 익히는 중인데, 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글씨를 전문으로 배울 예정이라 한다." (1924년 6월 2일자 매일신보)

운현궁(雲峴宮) 가정교사 정연세(鄭然世)양도 이목을 모았다. "이번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에는 글씨 55점이 진열되어 있는데, 그중 초서 한 폭이 매일 수천여 명의 관중에게 가장 많은 찬양을 받으며 이채를 드리는 것이 있는데 그 글씨의 주인공은 경성부 인의동 122번지에 사는 규원(圭苑) 정연세(鄭然世)라는 당년 21세 된 처녀인데 작년에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를 우등 성적으로 졸업하고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 화백에게 동양화를, 현백당(玄白堂)과 정대유(丁大有)씨의 필법을 받아서 열심으로 공부하는 중인 바, 작년 가을부터 운현궁에서 그를 가정교사로 고빙했다고 한다. (후략)" (1924년 6월 5일자 매일신보)

그 외에도 이채로운 입선자들이 소개된다. 1923년 9월경에 조선의 서화 대가 수십 명이 신라와 고려 시대의 고유한 미술을 회복하고 개척할 목적으로 조직한 고려미술원(高麗美術院) 동인(同人)들의 작품이 대거 입선한 것이다. 동양화, 서양화 부분 조선인 입상자 8명 중 5명이 바로 이 고려미술원 동인이었다. 그들은 김은호(金殷鎬), 이종우(李鍾禹), 나혜석(羅蕙錫), 박영래(朴榮來), 변관식(卞寬植) 등이었다.

한편으론 웃지 못할 차별도 있었다. "심사위원은 일본인이 섞여 심사하게 되어 동양화, 서양화, 서부(書部)의 각각 한 사람씩을 심사원으로 일본에서 불러 왔다. 그런데 조선인 심사원에게 대하여는 심사 수당을 100원을 보내고 일본인 심사원에게는 한 사람 앞에 1,000원씩 주어 일본인 심사원의 수당은 조선인 심사원 수당의 대략 10배라." (1926년 6월 5일자 동아일보)

이채를 띈다는 것은 기존에 그런 것이 없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따라서 이채를 띈다는 것은 수많은 편견을 깨고 이루어 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기까지의 고민과 고통은 실로 상상 이상이었을 것이다. 100년이 흐른 지금도 먼 훗날 이채를 띠기 위해 분투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도 따스한 5월의 햇살이 쏟아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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