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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젤`이 된 서울의대생…"마흔 넘어 발레 유학"[오늘의 DT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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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의 자격취득 후 독일 무용유학… 프로 발레리나 은퇴 나이에 '도전'
미술작가·피아니스트 활동도… "링에서 내려오지 않으면 역전기회 꼭 와요"
`지젤`이 된 서울의대생…"마흔 넘어 발레 유학"[오늘의 DT인]
소아과 의사이자 아마추어 발레리나 윤계진(윤엘레나)



서울의대 출신 발레리나 윤계진

여느 때처럼 교정을 지나던 의과대학생 윤계진(윤엘레나·사진)의 눈에 교내 공연 소식이 들어왔다. 무심코 들어가 앉았는데 관객도 차지 않은 채 공연은 시작됐다. 무대 위의 시골처녀는 사랑에 빠져 연인과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가 하더니 이내 비극적 운명에 부딪혀 괴로움으로 미쳐갔다. 사람들의 몸짓과 음악만으로 전개되는 애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는 대사 한마디 없이도 가슴에 또렷하게 박혀왔다.

1841년 초연 이래 줄곧 명작으로 꼽혀온 이 작품은 '지젤'. 당시 지젤을 연기한 무용수는 후에 한국 발레계의 전설이 된 문훈숙 유니버설발레단(UBC) 단장이었다.

`지젤`이 된 서울의대생…"마흔 넘어 발레 유학"[오늘의 DT인]
2019년 '레이몬다 아다지오'로 발레메이트 그랑프리 콩쿨 금상을 수상했다.

"예술에 대한 관심은 컸지만 어려서 몸이 약하기도 했고 학구적인 집안 분위기에 오래 고민해보지 못한 채 의대에 진학했어요. 의학 공부는 적성에 맞았지만 마음 속에는 지젤에 대한 열망이 자라고 있었나 봐요. 클래식음악 동호회에서 쓰는 닉네임을 지젤이라고 지어서 쓰기도 했을 만큼요."

어렵다는 의학 공부 중에도 서울의대 교향악단 활동에 열을 올렸다. 그에게 있어 의학은 예술과 꽤 닮은 점이 많았다. "결국 사람에 대한 탐구잖아요. 의대에 가기 전까지는 수학을 정말 잘 해야 하지만 정작 의대에서는 수학을 배울 일이 없지요(웃음). 저는 이과 학문 중 의학이 가장 인문학에 가까운 것이라고 느껴요. 인간에 대한 부단한 관심이 필요한 학문이죠."

서울의대 교향악단은 한국 최초의 오케스트라라고 할 만큼 오랜 전통을 가진 데다 멤버 모두가 진심으로 음악에 파고들기에 더 좋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학병원에서 수련의 과정을 마친 뒤 소아청소년과 전문의 자격을 취득했다. 결혼을 해서 아이도 둘을 뒀다. 커리어와 인생 모두 제법 탄탄해지며 입지를 다져가던 시간이었다. 그러다 불쑥 독일에 있는 발레학교에 가기로 결심했단다. 심지어 4년제 프로페셔널 무용학교인 뮌헨 인터내셔널 발레스쿨이었다.

`지젤`이 된 서울의대생…"마흔 넘어 발레 유학"[오늘의 DT인]
2019년 스완스발레단 지젤 공연 당시 지젤로 분한 모습

발레는 특히나 혹독한 것으로 악명 높은 예술이다. 끝없는 연습과 피나는 절제, 무한한 헌신을 요구한다. 사람이 몸으로 표현할 수 있는 그 궁극의 아름다움을 위해서는 거의 모든 인생의 즐거움을 포기하고, 스스로를 극한의 고통으로 밀어붙여야 한다. 게다가 발레를 전공하는 사람들은 고작 너댓살에 토슈즈를 신기 시작해 십대 후반에 전성기를 맞는다. 그런데 발레스쿨에 가겠다고 나섰을 때 그의 나이는 이미 마흔이 넘어 있었다.

"프로 발레리나들도 은퇴를 한 나이죠. 실제로 발레스쿨에서는 열몇살 된 아이들과 같이 수업을 들었어요. 이탈리아와 러시아 등 전세계에서 모인 사람들이었고, 하루에 5시간씩 강도높은 수업과 훈련이 이어졌어요. 그마저도 제게는 딸들이 학교에 간 시간 동안에만 할 수 있는 것이었죠."

한계를 넘고 또 넘는 시간이었다. '하고 싶다'를 '할 수 있다'로 죄다 고쳐 쓴 시간이었다. 세계적인 스타 발레리노인 시릴 피에르가 예술감독으로 이끄는 아마추어 발레단에도 들어갔다. "독일학교에서 만난 선생님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왜 아마추어는 프로보다 잘하면 안돼?' 그 말이 가슴에 울림을 남겼어요. 이미 은퇴한 프로들보다 더 열심히 연습하고 더 잘해내면 되는 거 아니냐고 스스로를 다 잡았어요."

`지젤`이 된 서울의대생…"마흔 넘어 발레 유학"[오늘의 DT인]
2019년 스완스발레단 지젤 공연 당시 지젤로 분한 모습

의사이기에 몸에 대해서는 잘 알았다. 근육의 위치, 뼈들의 구조, 영양 공급…. 결국 몸을 쓰는 법을 알았던 것 같다. 훈련은 한국에 돌아와서도 계속됐다. 국내 최초 성인 아마추어 발레단 스완스발레단에 입단을 했다. 스완스발레단은 작가나 약사, 은행원 같은 다양한 직업의 무용 비전공자들이 주축이 돼 창단한 곳이다.

지난 2019년 아마추어 발레단으로는 처음 전막 발레 '지젤'을 공연했다. 꿈에 그리던 지젤 역이었다. 학교 공연에서 처음 지젤을 본지 거의 30년 만이었다. 그는 "다들 발레를 하기에는 나이가 많아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도전했다"고 말했다. "저는 노력하면 꿈은 다 이뤄진다고 생각해요" 라고 더 힘을 준다.

이후 'ALLEYS 9'이란 작가 그룹과 함께 미술 전시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미술은 싱가포르와 뮌헨 그리고 홍익대 미술대학 평생교육원에서 수학하고 한국아티스트협회 정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간 완성한 작품도 꽤 팔았다. 올해는 오케스트라와 함께 피아노 협연도 해냈다. 오전에는 병원에서 진료를 보고 바로 연습실이나 작업실로 향한다.

그가 지면을 빌어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링에서 내려오지 말아요. 절대." 잘하는 것보다 그만두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 무엇이든 꾸준히 한다면 성장하게 돼있다. 진부한 말로 들릴 수 있지만 '진리'이기도 한 말이다. 노력에 지쳐서, 나이가 많아서, 재능이 없어서, 남들이 비웃어서, 누구나 자신이 싸우고 있는 링에서 내려오고 싶을 때가 있다. 그만 기권하고 수건을 던지고만 싶을 때가 온다. 그럴 때에 오늘의 이야기를 기억해주길 바란다. 링에서 내려오지 않는다면 반드시 역전의 기회는 온다.

이윤희기자 stels@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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