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희의 정치사기]고려 시대 이규보의 험난한 과거 급제와 수능 킬러 문항](http://contents.dt.co.kr/images/202306/2023062702109958038001[1].jpg "[김세희의 정치사기]고려 시대 이규보의 험난한 과거 급제와 수능 킬러 문항")
그는 14살이 되자 9재 학당에 입학했다. 고려의 해동공자라 불렸던 최충이 세운 이 학교는 많은 문신관료를 배출한 100년 전통의 명문사학. 이 학교 입학은 과거 합격으로 이어지는 지름길이었다. 더구나 이 학교 출신 관료 대부분이 과거의 고시관이 됐기 때문에, 출제 경향도 쉽게 알 수 있었다. 합격한 이후에도 정부 기관 곳곳에 있는 선배 관료들의 도움을 받아 출세하기도 수월했다. 그만큼 좋은 학교 출신이란 점이 명예롭고 중요하게 여겨졌고, 이 학교 출신들은 설립자인 최충의 호를 따서 문헌공도(文憲公徒)라 불렸다. 당시 과거를 준비하던 유생 입장에선 공립학교인 국자감(國子監)보다 이곳을 선호하는 게 당연했다.
공부하는 과목도 만만치 않았다. 학당에선 주로 9가지 경서와 3가지 역사책을 가르쳤다. 경서는 주역(周易), 상서(尙書), 모시(毛詩), 예기(禮記), 주례(周禮), 의례(儀禮),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 춘추곡량전(春秋穀粱傳)이고, 역사책은 사기(史記),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다. 이런 책들을 정해진 해석에 따라 암기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예컨대 주역은 글자수가 2만4107자, 예기가 9만9010자, 춘추좌씨자는 무려 19만6845자였다. 이밖에 시부(詩賦) 등과 같이 문장을 짓는 수업도 받았다.
과거에 합격하기까지의 과정도 고통스러웠다. 16세에 사마시(司馬試. 예비시험)에 처음 응시한 이규보는 예비시험에서 세 번 낙방하고, 22세에 겨우 합격했다. 그리고 그 다음해인 23세에 최종시험인 예부시에 합격했다. 만 9년만에 최종 합격을 한 셈이다.
이규보가 이처럼 계속 과거에 매달렸던 이유는 과거 시험에 합격해 관료가 되는 것이 사회적 지위를 보장받는 확실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초·중·고 12년간 입시를 준비한 뒤, 수능성적 한 방으로 인생 경로가 판가름 나는 지금의 현실과 다르지 않다.
이주호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지난 26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사교육 경감대책'을 발표했다. 연 26조원에 달하는 사교육비를 줄이기 위해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에서 킬러문항(초고난도 문항)을 배제하고, 유아과정부터 초·중·고교까지 수요에 따른 맞춤형 공교육을 강화한다는 게 골자다. 윤석열 대통령이 공교육에서 가르치지 않은 '킬러문항'을 수능에서 빼라고 발언한 지 11일만에 나온 방침이다.
그러나 수능 시험을 불과 5개월 앞두고 급조한 대책에 학생들은 혼란에 빠졌다. 최근 수능 출제 경향에 맞춰 학습해 온 학생들 입장에선 당연하다. 한 고3 수험생은 "제발 가만히 좀 있어달라"고 절규하기까지 했다. 여야 정치권은 각각 "공교육 정상화의 초석을 마련했다", "수험생들의 혼란에 기름을 부었다"며 극명한 반응을 나타내고 있다. 안 그래도 시끄러운 입시판이 오히려 아수라장이 된 셈이다.
윤 대통령은 한국 대학 입시에 내재된 근본 문제를 잘못 짚은 것 같다.아무리 수능 문제에 변화를 줘도 현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언제든지 달라진 수능 출제 경향을 쪽집개처럼 찝어내는 사교육 업체는 언제든지 다양한 형태로 등장할 수 있다. 여전히 학벌사회에서 학교가 끼치는 영향력은 크고, 자식이 명문대에 가길 바라는 학부모들의 욕망 때문이다. 좋은 대학 출신이 이 사회에서 쉽게 출세할 수 있다는 하나의 상식.이 상식이 깨지지 않는 한 변화는 요원하다.김세희기자 saehee0127@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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