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등단 50주년을 맞은 소설가 박범신(77·사진)은 글쓰기에 몰두한 지난 반세기를 "평생 한 번의 미친 연애"로 비유했다. 그는 "고통스럽고 추락한 나날이 많았지만, (마음이) 격렬하게 부는 바람 같아서 권태에 빠지거나 지루할 새가 없었다"고 지난 세월을 회상했다.
박범신은 최근 서울 종로구의 한 까페에서 가진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문학은 늘 두근거렸던 저를 반영한 결과물"이라며 "제가 살아온 시대가 어렵고 변화가 많았는데, 작가로 살지 않았다면 내면의 자유로운 격정을 발현하고 살 수 있었을까. 고통스러운 행복이자, 누리기 어려운 축복"이라고 말했다.
그는 50주년을 맞아 산문집 '두근거리는 고요'와 '순례'(이상 파람북)를 펴냈다. '두근거리는 고요'는 소소한 일상부터 끊임없이 염원한 문학과 부조리한 세상 이야기를, '순례'는 오래전 출간한 히말라야와 카일라스 순례기를 압축하고 근래 쓴 산티아고 순례기와 폐암일기를 더해 담았다.
그는 "'순례'를 교정하면서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며 "우리 인생 자체가 순례의 길이다. 마지막에 그리는 이 길의 최종 목표는 세상에 흔들리지 않고 부동심(不動心)을 지켜내는 나 자신"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중학교 시절부터 책에 빠졌다. 고교 2학년 때는 대학생이 탐독한 월간지 '사상계'를 정기 구독했다. 그는 "광적인 독서를 통해 염세적인 세계관을 흡수했다"며 "세계와 내가 분리돼 있다는 고독감에 자살 시도를 두 번 할 만큼 위태로웠다"고 기억했다.
위태로웠던 그를 잡아준 것은 바로 글쓰기였다. 박범신은 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여름의 잔해'가 당선되며 문단에 발을 디뎠다. 5년간 무명작가였던 그는 1979년 첫 장편 '죽음보다 깊은 잠'으로 인기 작가 대열에 진입했다.
이후 '풀잎처럼 눕다'와 '불의 나라' 등 잇단 베스트셀러를 내며 최인호, 한수산과 함께 1980년대 대표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이 시기 그는 개발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사회의 욕망을 꼬집는 세태 소설을 주로 썼다. '영원한 청년 작가'라는 수식어도 얻었다. 하지만 그는 1993년 절필을 선언하며 인기 작가라는 명성을 스스로 내려놓았다. 그는 "비판하고 경계하던 것들 속에 제 삶이 깃들어 있단 걸 깨달으니 자괴감이 느껴졌다"며 "1980년대를 겪으며 민주화를 위한 헌신이 지식인에겐 절체절명의 어젠다였는데, 소명을 다하지 못했다는 자책감도 심했다"고 말했다.
시골에 홀로 머물던 그는 어느 날부턴가 풀을 맬 때면 입에서 중얼중얼 이야기가 흘러나왔다고 했다. 말랐던 우물이 찼다고 느낀 그는 1996년 '흰 소가 끄는 수레'로 문단에 복귀했다. 이후 구도에 대한 욕망을 다룬 '갈망 3부작'인 '촐라체', '고산자', '은교'와 자본주의의 폭력성을 비판한 3부작인 '비즈니스',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소금' 등 총 42편의 장편을 썼다.
박범신은 "비교적 자전적인 요소가 강한 소설이 마음에 남는다"며 "가장 안 팔렸지만 속편을 쓸 생각인 '더러운 책상'과 절필 이후 복귀작인 '흰 소가 끄는 수레'이다. 갈망 3부작에도 애정이 간다"고 꼽았다.
박해일·김고은 주연의 동명의 영화로 제작된 '은교'는 2000년대 그의 소설 중 단연 화제작이다. 그는 "영원히 늙고 싶지 않은 인간의 욕망, 영원한 가치에 대한 갈망을 다룬 소설"이라며 "성적인 이미지로 소비되면서 한동안 나와 독자 사이에 거리감을 느끼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는 새로운 문장을 향해 달려가는 삶을 살았다면서 "소설을 쓰며 단 한 문장도 같은 문장을 쓰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한동안 소설을 쓰지 않았다. 2019년에는 폐암 수술을 받기도 했다.
올봄 새로운 단편을 풀어나가고 있다는 그는 "권위 있는 작가가 되고 싶진 않지만 현역 작가, 청년다운 작가로 살고 싶은 바람"이라고 했다. 그는 "이제 그리워하는 건 불멸의 고유함"이라며 "모든 예술가의 꿈은 불멸이다. 육신이 떠나도 작품이 남는 것, 그게 꿈일 것 같다"고 말했다.
박정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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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신 작가가 서울 종로구 평창동의 한 카페에서 연합뉴스와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