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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일 칼럼] 韓제조업 삼키려는 美·EU, 中과 다를 게 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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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일 산업부장
[박정일 칼럼] 韓제조업 삼키려는 美·EU, 中과 다를 게 뭔가
"미국 놈 믿지 말고, 소련 놈에 속지 말라." 해방 직후 신탁통치를 둘러싸고 좌·우 갈등이 심할 때 유행했던 민요의 한 구절이다. 극단적이지만 이 민요가 새삼 떠오른다. 미·중간 패권을 둘러싼 보호무역의 쓰나미가 한국을 덮쳐오고 있어서다.

최근 미국과 EU(유럽연합)가 잇따라 내놓은 반도체·배터리 공급망 관련 법안의 핵심은 결국 삼성전자와 LG에너지솔루션의 반도체·배터리 핵심 기술을 빼 내가겠다는 건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 표면적인 명분은 중국의 '굴기(몸을 일으킴)'를 견제하겠다는 것이지만, 결국 자국 산업을 위해 우월한 외국 기업의 기술을 도둑질하겠다는 것이 아닌지 의심할 대목이 많다.

한국무역협회가 최근 공개한 'EU 핵심원자재법(Critical Raw Materials Act)'의 내용을 보면, EU 역내에 있는 배터리와 반도체 제조업체들은 2년 간격으로 공급망에 대한 감사를 받아야 한다. 모터를 쓰는 전기차 제조업체들은 제조사 정보와 영구자석 관련 정보 등의 정보를 제공하도록 했다.

법안의 명분은 친환경 전환에 필요한 핵심 원자재의 특정 국가(중국)에 대한 광물자원 의존도를 완화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같은 이유로 기업들에게 공급망 정보를 제출하도록 했고, 여기에는 핵심 원천 기술이 들어갈 가능성이 높다.

특히 반도체와 배터리의 경우 원재료 공급망 정보가 제품의 경쟁력과 직결된다. 주요 화학물질을 어떤 방식으로 쓰고, 또 어떤 공정으로 만드는지가 품질과 수율을 결정하는 핵심 경쟁력이기 때문이다.

2016년 유럽 내 배터리 자급화를 목표로 출범한 노스볼트가 아직까지 세계 전기차용 배터리 톱10 순위에 이름도 올리지 못하는 이유도 이때문이다. 물론 가정이지만, 만약 노스볼트가 유럽에 진출해 있는 LG에너지솔루션이나 SK온, 삼성SDI가 10여년 동안 쌓아온 핵심 공급망 정보를 고스란히 받아 분석한다면, '중국을 제외한 세계 1위' 자리에는 이 기업이 이름을 올릴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2018년 유사한 논란이 있었다. '화학물질관리법(화관법)'이 통과될 당시 화학물질 정보를 온라인으로 공개할 경우 국내 기업들의 반도체 노하우가 통째로 중국에 넘어갈 수 있다고 우려한 바 있고, 이에 산업부는 반도체와 정밀화학 등 국가 핵심기술에 대한 정보공개법 예외 규정을 법제화해 해외유출 방지 장치를 마련했다.


미국의 반도체 지원법(CHIPS Act·칩스법)도 마찬가지다. 미국 정부의 보조금을 받고 싶으면 투자 규모와 운영 계획, 생산설비까지 공개하라는 것인데, 이 역시 핵심 공정기술이 유출될 가능성이 크다.
반도체 종주국인 미국이지만 메모리반도체에 한해서는 한국에 밀리고 있다. D램의 경우 한국 업체들이 시장점유율 80%에 이르는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고, 낸드플래시 역시 반도체 세계 최강인 인텔이 도전했음에도 삼성전자는 물론 SK하이닉스에게도 밀리고 있다. 빅데이터와 챗GPT의 등장으로 메모리의 수요가 향후 10년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을 고려하면, 미국 정부가 자국 메모리 산업을 키우고 싶은 욕심은 당연한 일이다.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 역시 지난 8일(현지시간) 미국 정부와의 협의를 앞두고 이 같은 독소조항에 대해 설득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김선우 메리츠증권 연구원은 "기술 노출 가능성과 정보 공개 위험이 내포돼있고, 자금 활용과 향후 사업 확장 국면에서 감시에 가까운 제한을 받게 된다"고 전망했다.

과거 쌍용자동차를 인수했다가 '먹튀 논란'까지 감수하면서 발을 쏙 뺀 중국 상하이차의 사례가 떠오른다. 쌍용차를 인수할 당시 투자약속은 지키지 않았는데, 업계에서는 쌍용차가 가지고 있던 다임러AG의 기술을 노린 것 아니냐는 주장이 지금까지도 끊이지 않고 있다. 상하이차는 지난 1월 기준 중국 완성차 브랜드 가운데 최대 수출업체다.

뻔한 말이지만, 강대국들의 보호주의 물결에서 살아남는 길은 자체 경쟁력을 키우는 수 밖에 없다. 최근 WBC 2023에서 한국 야구대표팀이 호주와 일본에 연패한 것을 두고 일부 평론가들은 외국인 용병에만 의존하다가 자국 투수를 키우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야구보다 더 냉엄한 국제통상의 마운드에서 수출 코리아를 이끌기 위해서는 시속 160㎞를 던질 수 있는 자국 선발투수가 필요하다. 스타트업부터 잘 육성해 어떻게 국가대표 기업으로 키울 수 있을지 정부와 업계는 머리를 싸매야 한다.

박정일 산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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