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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화의 지리각각] 보라카이 밀가루해변에 사이렌이 울릴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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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필리핀 선박에 레이저 쏴 적대행위
필리핀열도는 대만 옆구리이자 뒷마당
가고시마서 마푼섬까지 3300km 장벽
2031년 中 해,공군 전력 미 7함대 버금
긴장 고조, 보라카이 휴식 사라질 수도
[이규화의 지리각각] 보라카이 밀가루해변에 사이렌이 울릴 때


밀가루같이 곱디고운 모래 해변이 곳곳에 산재한 남국의 여행지 필리핀에 최근 안보상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필리핀 정부는 지난 5일 중국 함정과 해안경비정 등 중국 선박 42척이 전날 티투섬(중국명 중예다오) 부근을 침범했다며 중국에 재발방지를 요구했다.

앞서 지난달 6일에는 중국 함정이 남지나해 세컨드 토마스 암초 지역에서 필리핀 선박을 향해 레이저를 투사했다며, 이례적으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이 직접 주필리핀 중국대사를 초치해 경고하기도 했다. 필리핀은 지난해 6월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중국의 영역 침범에 적극 대처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전 로드리고 두테르테 정부의 친중 기조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그동안 필리핀은 대만에 비해 중국의 전략적 타깃이 아니었다. 그러나 상황이 바뀌었다. 중국이 시진핑 집권 3기 내 2027년까지 대만을 완전히 복속하려 한다는 야심이 공공연한 가운데, 대만 공략을 위해서는 대만의 옆구리이자 뒷마당이라 할 수 있는 필리핀 해역을 영향권 안에 둬야 하기 때문이다.

◇중, 남지나해 공략에서 루손해협 장악으로 방향 선회

그동안 필리핀과 중국 간 분쟁은 팔라완 섬 근처 남지나해 스프래틀리 제도나 그 위쪽의 스카보로섬 등에서 영유권 놓고 다투는 것이 주류였다. 중국이 베트남 해안을 따라 쭉 남하해 싱가포르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유역 앞에 걸쳐 그은 '남해9단선' 안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인접국들과 갈등을 빚었던 것이다. 중국의 '우기기'와 '암초의 섬 만들기'는 어느 정도 성공했다. 필리핀과 영유권 분쟁을 벌여온 스카보로섬은 원래 암초였으나 중국이 일방적으로 2018년쯤부터 시멘트를 들이부어 군사기지화 했다. 섬이 중국에 의해 실효지배당하면서 필리핀은 영유권 분쟁에서 밀리고 있다.

그러나 중국이 대만 공략을 노골화하면서 남해9단선 갈등은 중국 측에 의해 이전보다 잦아지는 국면이다. 동남아시아국가들로 전선을 확대해 실리가 없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또 스카보로섬의 예처럼 남지나해 공략은 이미 어느 정도 뜻을 이뤘기 때문이기도 하다. 대신 대만의 뒷마당에 접근하기 위한 필리핀 근해, 특히 대만과 필리핀 사이의 루손해협으로 진출을 노리고 있다. 최근 중국 공군기들은 대만 남쪽 루손해협을 가로질러 대만섬 동쪽 태평양 해상을 돌아 다시 대만섬 북쪽으로 선회하는 비행을 하거나 그 반대 방향의 비행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필리핀제도는 중국이 태평양 진출 위해 넘어야 할 장벽

동아시아 지도를 보면 중국의 해안선은 상하이에서부터 하이난섬까지 길게 이어져 있지만, 태평양으로 진출하는데는 여러 장벽들이 버티고 있다. 일본 큐슈 남단 가고시마에서 오키나와열도를 거쳐 대만섬 북단 및 대만섬 동쪽 일본영토인 야에야마제도까지 약 700km는 일본과 미군에 의해 촘촘히 가로막혀 있다. 길이 390km의 대만섬은 그 자체가 '불침항모'이다. 다시 대만섬 남단에서 루손해협을 지나 필리핀 최대 섬 루손까지 350km도 여의치 않다. 남지나해에서 태평양으로 진출하는 루손해협은 국제 해협이긴 하나 남북으로 대만과 필리핀 섬들이 둘러싸고 있어 중국으로선 이곳도 안전한 진출로가 못 된다.

루손해협 남쪽 끝자락에서부터는 다시 필리핀 루손섬과 여러 열도가 가로막고 있다. 필리핀 열도 남북 길이는 총 1850km나 되는데, 필리핀 남쪽 인도네시아와의 사이 셀레베스해 마푼섬까지 이어진다. 여기에다 필리핀 열도의 동서 폭은 동쪽 푸산곳에서 서쪽 팔라완섬까지 1060km나 된다. 그러니까 중국 해군이 태평양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일본 가고시마로부터 필리핀 마푼섬까지 총 길이 약 3300km에 달하는 두꺼운 장벽을 넘어야 하는 것이다. 보통의 전략적 상상력 갖고는 어림없는 난관이다.

그러나 중국은 포기하지 않을 것이 확실시된다. 중국은 최근 국방예산을 대폭 증액하고 있다. 중국 재정부는 지난 5일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국방비 지출을 지난해 대비 7.2% 늘어난 1조5537억 위안(약 293조원)으로 잡았다고 밝혔다. 중국은 현재 세 척(푸젠함 포함)의 항공모함을 보유하고 있다.

미국 정책연구기관인 전략예산평가센터(CSBA)가 지난해 낸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은 2031년까지 5척의 항공모함과 10척의 핵미사일 탑재 원자력 추진 잠수함(SSBN), 16척의 대형구축함을 갖출 것으로 예상했다.

이밖에 5세대 스텔스 전투기 190대 이상을 보유할 것으로 내다봤다. 여기에 항공모함 킬러로 불리는 극초음속 미사일인 둥펑-17 부대를 현재 1개에서 3개로 늘릴 것으로 전망했다. 이는 항공모함 2척과 약 30척의 서태평양 함선, 300여대의 전투기 등을 보유한 미국 인도태평양사령부의 해군전력에도 뒤지지 않는 공격력을 갖췄다고 볼 수 있다.

중국은 이 같은 군사력 증강을 바탕으로 지금까지 필리핀 해역 및 공역에서 긴장을 고조시킴으로써 필리핀 내의 공포를 이용해 미국과 거리를 두게 하려는 폭풍 전략을 구사해왔다. 이전 두테르테 정부에선 이 전략이 어느 정도 통했다. 그러나 마르코스 정부가 들어서면서 필리핀은 미국은 물론 일본과도 안보협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미국과 동맹 복원하고 일본과 '상호접근협정' 체결

필리핀은 전 정권에서 소원했던 미국과의 관계를 급속히 복원하고 있다. 지난 2월 2일 로이드 오스틴 미국 국방장관이 필리핀을 방문해 칼리토 갈베즈 필리핀 국방장관과 2014년 군사기지 사용 등에 관해 맺었던 방위협력확대협정(EDCA)을 확대하기로 합의했다. 이에 따르면 미군 항공기와 군함을 필리핀 내 공군기지 4곳과 육군기지 1곳에 배치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미국은 필리핀에 총 9곳의 군사기지를 확보하게 된다. 양국은 합동군사훈련과 군사시설 건설 등을 위한 미군의 필리핀 주둔도 합의했다.

필리핀은 일본과의 안보협력도 강화중이다.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은 지난 2월 9일 도쿄를 방문해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갖고 준군사동맹인 '상호 원활한 접근 협정'(RAA; Reciprocal Access Agreement)을 맺기로 원칙적 합의를 했다. RAA는 양국 군대가 상대국에 진입할 때 무기 반입 등을 쉽게 할 수 있는 조약이다. 합동군사훈련을 하는데 용이하고, 유사 시 파병 길도 열어놓는다.

무엇보다도 필리핀 스스로 대만 유사시 필리핀도 평온할 수 없다는 인식을 하고 있다는 점이 이전과 다른 모습니다. 외신에 따르면 최근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은 일본 닛케이(니혼게이자이)신문과 인터뷰에서 "대만 유사시 필리핀이 말려들지 않는 시나리오는 생각하기 어렵다"는 놀라운 발언을 했다. 지리적 인접성으로 인해 유사시 말려들지 않을 수 없다는 의미이고, 그렇다면 적극적 대비를 하겠다는 선언인 셈이다.

필리핀이 이전과 180도 돌변해 대중국 강경자세를 취하자 중국은 당황하고 있다. 중국이 만약 대만을 해상 봉쇄하려 할 경우 필리핀은 반드시 단속해야 하는 지리적 위치에 있다. 가까운 미래에 미군이 필리핀에 주둔할 가능성은 매우 높다. 필리핀은 1992년 수빅만의 미군 기지를 폐쇄하고 철수하기 전 1980년대 한때 최대 1만8000명의 미군이 주둔했을 만큼 미국과 군사적으로 밀접한 관계였다.

중국의 대만 침공 시나리오가 공공연히 제기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군의 필리핀 복귀는 빨라질 것이고, 필리핀도 중국 인민해방군의 타격 반경에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 보라카이의 밀가루, 백설탕 같은 모래해변에 누워 여유로움을 즐기는 어느날, 느닷없이 사이렌이 울리고 중공 인민해방군 전투기들이 야자수 위를 근접 비행하는 광경을 볼지도 모를 일이다.

이규화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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