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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희의 정치사기] 조선 사간원의 서경(署經)과 현대 법무부의 인사검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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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희의 정치사기] 조선 사간원의 서경(署經)과 현대 법무부의 인사검증
세종실록 31권, 세종 8년(1426년) 3월 15일 기유 2번째 기사. 좌사간 허성이 병조판서로 임명된 이발을 파면하라는 상소가 담겨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조선시대 임금이 관리를 임명할 때 사건부와 사간원의 동의를 거치는 제도가 있었다. 바로 서경(署經)이다. 지금으로 따지면 인사검증제도다. 임금이 한 관리의 임용을 결정하면 대간(사헌부 혹은 사간원)은 그 관리의 문벌과 품행, 경력을 철저하게 분석한 뒤 국왕의 임명장(고신)에 서명할 지 여부를 판단했다.

검증은 까다롭기 그지 없었다. 본인의 사소한 행적부터 친가·외가, 심지어 4대 조상들까지 샅샅이 살폈다. 관리는 이 과정을 통과해야 관직을 수행할 수 있었다. 기간도 50일까지 주어졌다. 임금으로서는 자신의 인사권에 사사건건 제동을 거는 매우 불편한 제도였다.

성군으로 칭송받은 세종도 서경 앞에서는 꼼짝 못했다. 특히 이발(1372~1426년)과 관련된 일화가 재미있다. 세종은 재위한 지 2년 되던 1420년 이발을 대사헌으로 임명하려 했다. 그러나 바로 사간원에서 가로막았다. 3년전 태종 재위 시기 중국 사행(使行) 때 사사로이 특산물을 대량으로 가져가 내다팔아 외교적 망신을 산 게 그 이유였다. 세종은 계속 임명을 고집했지만, 사헌부 관리들은 "하교를 받들지 못하겠다"며 출근도 거부했다. 결국 세종은 자신의 결정을 철회했다.

세종은 그로부터 6년뒤인 1426년 이발을 다시 슬그머니 병조판서로 임명했다. 이번에도 사간원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3년 전과 똑같은 이유를 들며 이발의 임명을 거부했다. 세종 역시 "다시는 말하지 말라"며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나 우헌납 정갑손은 "소신이 간관으로 있지 않으면 그만이나 간관인 이상 어찌 잠자코 있겠습니까"라며 거부권을 행사했다. 이발은 그해 세상을 떠났다.

태종시기 박자청(1357 ~ 1423년)의 일화도 흥미롭다. 재위한 지 13년 되던 1413년, 태종은 박자청을 지의정부사 정2품으로 임명하려 했다. 박자청은 창덕궁에 제2의 궁, 경복궁 경회루 연못, 사대문의 문루 등 여러 건설 사업에서 두드러진 성과를 거둬 태종의 종애를 받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대간은 박자청의 서경을 거부했다. 1년전 척석(擲石·투석전)놀이를 하고 조사(朝士,조정의 신하)를 구타한 게 이유였다. 특히 구타사건은 형조까지 올라가 논란이 일었다. 심지어 5년전 모화루(慕華樓) 남지에서 공사를 감독할 때 인부를 강압해서 탄핵이 된 일 등도 문제가 됐다. 사간원에서 어지간한 비위는 다 끄집어 낸 셈이다.

최근 검찰 출신 정순신 변호사가 2대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장으로 임명된 지 하루만에 아들 학교 폭력 문제로 낙마하면서 인사검증에 대한 책임론이 제기되고 있다. 인사검증 과정에서 드러난 시스템상 허점까지 도마 위에 오른 상태다.

정 변호사의 아들 정 씨의 행각이 이미 과거 언론에 다뤄졌기 때문이다. 이번 논란이 터지기 전, 2018년 한국방송(KBS)는 정 씨가 벌인 학교폭력을 보도한 바 있다. 더구나 해당 사건은 대법원에서 판결까지 받았다. 지금으로부터 600여년 전에도 4대 조상들까지 살펴서 인사를 검증하는 데, 현대 시기에 외부로 알려진 자녀의 학교 폭력 문제를 알지 못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대통령실과 법무부가 '학교폭력' 사실을 알고도 임명을 강행한 게 아니냐는 비난까지 나온다. 앞서 정 변호사가 윤석열 대통령,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서울중앙지검에서 근무하던 시기에 학교폭력 관련 첫 보도가 있었기 때문에 의문은 더 커지고 있다.

이 사이 새로운 사실도 밝혀지고 있다. 정 변호사의 아들이 학교폭력(학폭) 징계로 받은 '강제전학' 처분도 최초 학교생활기록부(학생부)에 기재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정 변호사의 아들이 재학 중인 서울대에는 이번 인사문제를 비판하는 대자보가 잇달아 붙었다.

상황이 이런데도 인사 검증 실패에 책임을 져야 할 당사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경찰청장이 후보자를 추천하고 실질적인 인사검증은 대통령실과 법무부 인사정보관리단이 하지 않았나.윤 대통령과 한 장관, 윤희근 경찰청장은 "나는 몰랐다", "안타깝게 생각한다", "제대로 걸러지지 않은 것 같다"는 말만 반복할 것인가. 검증 실패에 대해 뼈저리게 반성하고 책임까지 지고 재발방지책을 마련하는 게 상식아닌가.

김세희기자 saehee0127@dt.co.kr

[김세희의 정치사기] 조선 사간원의 서경(署經)과 현대 법무부의 인사검증
정순신 변호사<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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