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추어 정신·해방' 키워드… 벽화·사운드 등 다채로운 전시
제겐 작업이 시름잊는 진통제, 기력 다할때까지 배우고 싶어요
제겐 작업이 시름잊는 진통제, 기력 다할때까지 배우고 싶어요
![[오늘의 DT인] "예측못한 작업들 굉장히 흥미… 완벽을 향해 가는 과정이죠"](http://contents.dt.co.kr/images/202302/2023022102102132057001[1].jpg "[오늘의 DT인] \"예측못한 작업들 굉장히 흥미… 완벽을 향해 가는 과정이죠\"")
'복선을 넘어서II' 개인전 연 홍승혜 작가
"스스로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니까 실패에 대한 두려움도 없어요. 모든 제 행동이 결국 완벽을 향해 가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서울 종로구 국제갤러리에서 개인전 '복선을 넘어서 II'를 열고 있는 홍승혜(63) 작가는 이번 전시의 키워드로 '아마추어 정신'과 '해방'을 제시하며 이같이 말했다. 다음달 19일까지 이어지는 전시에서 그는 벽화부터 조각, 사운드, 조명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문법을 선보인다.
최근 전시장에서 만난 홍 작가는 "제 성정이 만족하는 스타일이라 주어진 시간 안에서 최선을 다하고 그 결과에 승복한다"며 "계획하지 않고 이렇게 저렇게 하다 보면 예측하지 못한 작업들이 나오는데 그게 굉장히 흥미롭다"고 설명했다.
"예측 불가능성은 제가 계속 작업을 하게 만드는 중요한 동력이에요. 재밌는 건 그렇게 나온 결과물들이 결국 제 안에 있었던 형태들이라는 거죠. 그래서 새로운 작업들을 마주하는 것이 즐겁고 끊임없이 뭔가를 배워가는 거예요. 이번 전시에서는 새로 배운 일러스트레이터 프로그램을 적용해봤습니다."
서울대에서 회화를 전공한 홍 작가는 졸업 후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 국립미술학교를 다녔다. 주로 컴퓨터 화면의 기본 단위인 사각 픽셀을 조합·분해·반복해 유기적이고 역동적인 이미지를 증식시켜왔다. 윈도우 기본 내장 프로그램으로 깔려 있는 그림판에서 시작해 포토샵을 운용하면서 이 세상을 관통하는 시각적 원리와 규칙을 상정해 픽셀로 구성된 자신만의 무대를 꾸준히 확장했다.
홍 작가는 "포토샵 그리드 속에 산 지 25년이 됐더라"며 "그 격자무늬를 저는 '감옥'이라고 표현하는데, 자초한 감옥이라 편안함이 있다"고 운을 뗐다. 이어 "그 안에서 안정감을 느끼며 살아왔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것 말고도 하고 싶었던 게 있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자제가 익숙한 사람이지만 이번엔 그걸 좀 풀었어요. 나이가 들다 보니 자제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조금씩 들었죠.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도리에 어긋남이 없다'는 공자의 말처럼 좀 더 자유로워지고 싶은 마음이었어요."
그는 "과거 작업들을 보니 물감을 타서 그리던 시절의 것도 있었고, 색채는 굉장히 다양하더라"며 "또 유기적 기하학이 아니라 그야말로 유기적인 형태로 그리던 시절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풀과 꽃 등을 그리던 그때가 그리워져 벡터 기반의 벽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일러스트레이터를 배운 것"이라고 밝혔다.
"일러스트레이터의 여러 툴을 이용해 사각형에서 벗어나 다각형(폴리곤)과 꽃, 별 모양 등을 그려보고 선의 굵기도 바꿔봤어요. 기존 작업에 그림자를 넣어보기도 했고요. 새로 시도한 평면 이미지들을 선반이나 테이블 등 가구로도 쓰일 수 있는 입체로 만들고 다양한 색을 입혔어요. 일러스트레이터를 배워가는 과정이 자연스럽고 아름다워 보여서 그대로 표현해 갤러리 1관에 전시했습니다."
서울산업대 조형예술학과 교수로 재직하다 2021년 퇴임한 홍 작가는 배움의 과정에 있는 학생들이 오히려 큰 스승이었다고 전했다. 그는 "학생들과 미술에 대한 얘기를 나누는 게 즐거웠다"며 "대화가 깊어지면 학생들이 제 선생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고 회상했다.
"학생들과의 소통이 제 작업에도 큰 도움이 됐어요. 포토샵을 처음 시작할 때 컴퓨터를 만지다 잘 모르겠으면 애들한테 물어봤고, 이번에 일러스트레이터도 학생들에게 배웠어요. 졸업한 제자가 사운드 제작 프로그램인 개러지밴드를 가르쳐줘서 소리도 만들게 됐죠."
3관에서는 홍 작가가 직접 만든 음악을 들을 수 있다. 그는 "영상 작업에 음악이 있으면 그 움직임이 활성화되는 걸 경험했다"며 "도형의 율동을 구사하는 과정에서 음악이 필요해 처음엔 다른 사람의 음악을 썼는데 제자가 개러지밴드를 소개해준 것"이라고 사운드 제작 계기를 전했다. 이어 "개러지밴드를 장난감처럼 만져보다가 직접 백그라운드 음악을 만들어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며 "노래·춤을 좋아하고 음악에 관심이 많아 내재된 흥을 바탕으로 시도할 수 있는 조건이 된 것"이라고 덧붙였다.
홍 작가는 끝없이 자신의 작업을 복기하며 과거 작업을 재료 삼아 새로운 층위를 쌓아간다. 이번 전시에서도 그 레이어를 보여주는 게 그의 의도다. "가시적인 레이어에서부터 시간이나 의미의 중첩, 그리고 제가 배우고 습득한 여러 가지 재주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동안 쌓아왔던 여러 가지 양상들을 다 버무린 총체적 형식이 3관의 모습이죠. 포토샵과 일러스트레이터, 영상, 사운드를 모두 만날 수 있으니까요."
기력이 다할 때까지 배움을 멈추지 않겠다는 그는 이제 영상 편집 기술에 관심을 두고 있다. 홍 작가는 "빼고 넣고 조립하는 등 지금까지 진행해온 모든 작업에 편집의 과정이 있다"며 "그걸 조금 더 복합적으로 할 수 있는 도구를 배워보고 싶다"고 밝혔다.
"인생사에 여러 가지 근심과 걱정이 있잖아요. 제게는 작업 과정 자체가 시름을 잊게 하는 중요한 진통제 역할을 해요. 또 지켜보고 기대해주는 관객은 제가 40년을 계속 작업할 할 수 있게 만들었고요. 제 영감의 원천인 관객에게는 제 작업이 근심을 눈 녹듯 없애는 진통제가 됐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박은희기자 ehpark@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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