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희 금융부동산부 증권팀장
![[DT현장] 주주행동주의에 명분 준 태광산업](http://contents.dt.co.kr/images/202212/2022121502102269066001[1].jpg "[DT현장] 주주행동주의에 명분 준 태광산업")
태광산업은 조만간 이사회를 열어 유동성 문제에 직면한 흥국생명에 제3자 배정 방식으로 약 4000억원 상환전환우선주(RCPS) 형태의 유상증자에 참여하는 안건을 의결할 계획이었다.
'행동주의'를 표방하는 트러스톤자산운용은 태광산업의 유상증자 참여에 반대하고 있다. 대주주를 위해 소액주주의 희생을 강요하는 처사라는 것이다. 트러스톤자산운용은 대주주가 아니라 회사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독립적 의사결정을 내려줄 것을 요구했다. 만약 유상증자를 단행할 경우, 동원할 수 있는 법적 장치를 총동원해 막겠다고 예고했다. 이사회 결의 효력정지가처분, 이사회 결의 무효 확인 등의 조치가 여기에 포함된다.
트러스톤자산운용은 지난 9일에도 반대 입장문을 내고 '태클'을 걸었다. 흥국생명은 이호진 전 회장(56.3%)을 비롯한 태광그룹 대주주 일가가 지분 100%를 보유한 개인기업이나 다름없으므로 태광산업의 유상증자 참여가 상법에서 금지하는 신용공여 행위로 볼 수 있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태광산업은 흥국생명 주식을 단 1주도 보유하고 있지 않다. 이호진 전 회장 개인이 흥국생명의 대주주이자 태광산업의 대주주일 뿐, 지분상으로 무관한 태광산업이 유상증자를 통해 흥국생명 지원에 나설 이유가 없다는 말이 된다.
태광산업과 이 전 회장이 얽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문득 몇 년 전 '태광 김치 사건'이 떠올랐다. 지난 2019년 이 전 회장 일가가 자신들이 운영하는 골프장에서 김치를 만들고, 이 김치를 그룹 직원들에게 사실상 강매해 왔던 사실이 드러난 일이었다. 직원들에겐 성과급 대신 김치를 지급하고 김치를 만드는 일엔 골프장 캐디 등이 동원됐다.
이렇게 만들어진 김치는 정상적인 유통 경로를 거치지 않고 그룹 내 19개 계열사로 나갔다. 이들 계열사는 사내근로복지기금, 복리후생비 등 회삿돈으로 김치를 사들인 뒤 명절 선물이나 성과급으로 직원에 지급했다. '회장님 김치'의 가격은 10kg당 19만원, 시중 김치보다 2~3배 이상 비쌌지만 식품위생법 기준도 맞추지 않았다.
태광 계열사들은 총수 일가가 100% 출자한 와인 유통사 '메르뱅'을 통해 와인도 46억원어치 사들였다. 과거 태광 계열사에 다니던 한 자산운용사 임원은 "법인카드로 오너 일가가 운영하는 곳이 아닌 다른 업체에서 접대용 와인을 산 임원이 크게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면서 "이 전 회장 일가가 어느 곳보다 투명해야 하는 금융사들을 제대로 이끌어갈 자질이 있는지 의심스러운 대목이다"고 말했다.
공정위원회는 이렇게 김치와 와인을 통해 이호진 전 회장 일가가 벌어들인 돈은 최소 33억원이라고 밝혔다. 김치와 와인 강매로 벌어들인 돈의 대부분이 이 전 회장과 가족들에게 현금배당과 급여 등으로 지급됐다.
그러나 검찰은 이 전 회장이 재무상황 등을 보고받거나 지시 혹은 관여 사실을 입증할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혐의 없음' 처분을 했고, 김기유 전 태광그룹 경영기획실장만 불구속으로 재판에 넘겨져 벌금형을 받았다.
일선에서 물러났던 김 전 실장은 지난해 이호진 전 회장의 출소와 함께 티시스 고문으로 돌아왔다. 이 티시스가 바로 김치를 만든 골프장과 문제의 와인 유통사를 자회사로 거느린 회장 일가의 회사다.
국내 주식시장에서는 흔히들 주주행동주의 사모펀드를 '기업 사냥꾼'이라고 부르면서 두려워하고 꺼린다. 하지만 어느새 제 욕심만 채우려는 오너들이 '주주가치 훼손'이라는 명분을 이들에게 쥐어주고 있다.
트러스톤과 다른 기관 투자자들의 말처럼, 태광산업이 대주주를 위해 흥국생명 지원에 나선다면 태광산업의 자체의 기업가치와 소액주주의 주주가치를 훼손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 증시 저평가)의 사례가 될 수도 있다.
회장님의 김치처럼, 회장님의 흥국생명을 위해서 또 누가 희생돼야 하는가. 파문이 커지기 전에 대주주의 책임 있는 역할을 촉구한다.
이윤희 금융부동산부 증권팀장 stels@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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