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화의 지리각각] 공원 백 개 만든들 이거 안 바꾸면 허당… 끔찍한 간판들

서로 눈에 잘 띄려고 경쟁하다 모두 묻혀
'간판심리'에도 깨진 유리창 이론 적용돼
소득 높아졌는데, 간판은 80년대에 멈춰
신촌연세로 성공사례 전국확산 벤치마크
간판 안 바꾸면 도시매력도 추락 불가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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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화의 지리각각] 공원 백 개 만든들 이거 안 바꾸면 허당… 끔찍한 간판들
대한민국 간판(옥외광고물)에 대해 누구나 한번쯤 '무질서하다' '혼란스럽다' 심지어 '심란하다'고 느낀 경험이 있을 것이다.

크기, 형태, 색깔, 부착방식이 제각각인 간판들이 건물과 거리에 덕지덕지 붙어있거나 서있는 경우를 매일 접한다. 서로 잘 띄려고 크기도 키우고 색깔도 원색 투성이라서 오히려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지저분하고 난삽하다보니 간판 본래의 역할인 표식의 기능도 잃었다. 사실 간판은 이제 그 기능이 쇠퇴했다. 인터넷과 모바일로 업소를 찾는 시대에 간판은 요란할 필요가 전혀 없다.

간판에도 깨진 유리창 이론(Broken Window Theory)이 적용된다. 범죄심리학에서 쓰이는 깨진 유리창 이론은 작은 흠이나 무질서를 방치할 경우 심각한 피해나 범죄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이론이다. 실제로 실험을 통해 입증된 이론이다. 두 자동차를 보닛을 열어둔 채 한 대는 유리창이 깨진 상태로, 다른 한 대는 아무 이상이 없는 상태로 거리에 방치했더니 유리창이 깨진 자동차는 자동차 부품을 뜯어가거나 훼손했지만, 이상이 없던 자동차는 아무런 공격을 받지 않았다.

간판도 마찬가지다. 처음 법령(옥외광고물 등 관리법과 그 시행령, 각 자치단체 조례)을 약간 어긴 간판이 등장하면, 얼마 안 있어 바로 옆에 위반 정도가 조금 더 세진 간판이 등장한다. 조금 있다가는 제3의 간판이 또 등장한다. 이렇게 해서 결과적으로는 온통 불법 간판이 한 건물과 한 거리를 뒤덮는 사태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깨진 유리창을 방치하면 안 되듯이 법규를 어긴 정도가 약하더라도 불법 간판이 처음 등장할 때 과감하게 퇴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간판은 도시의 얼굴이자 도시 미관의 종결체

도시 미관의 처음과 끝은 간판이다. 아무리 훌륭한 건축물과 거리와 공원이 있는 도시라도 간판이 조악하면 도시는 시쳇말로 '꽝'이다. 지금 대한민국 도시들의 간판을 보라. 멀리 갈 것도 없다. 대문을 열자마자 마주친다. 어떤 경우는 10층 높이까지 다닥다닥 붙어있는 모습을 본다. 끔찍하다.

간판을 바꾸지 않으면 백날 가로공원에 나무를 심고 새 건물을 짓고 페인트칠을 해도 말짱 헛일이다. 간판은 도시의 표정이자, 도시 미관의 종결체다. 이렇게 간판이 도시 인상과 그 나라 사람들의 미감(美感)을 반영하는 데도 그동안 우리는 간판에 상대적으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젠 달라져야 한다.

근년 들어 선진국 진입에 대한 자부심이 높아졌다. 진정한 선진국은 소득이 늘어났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소득은 한 요소일 뿐이다. 도시의 미학적 수준이 담보돼야 한다. 미감과 실용성이 조화를 이룬 도회적 세련성을 지녀야 한다. 사실 우리에게는 경제적 소득 향상에 비해 가장 뒤처지는 분야가 '간판문화'다. 우리 간판문화는 70·80년대에 머물러있다. 잘 봐줘야 90년대다. 생활환경이 시민의 활력 요소가 되고 다시 그 에너지가 환경을 가꾸어가도록 만들 때 삶은 풍미가 깃든다. 간판에 대해 고민하지 않으면 서울 부산 대구 인천 같은 대한민국 대표 도시들은 후진성을 면키 어렵다.

◇업소·주민·지자체 3자 협력이 필수

그동안 지자체들이 국지적으로 간판 정비 노력을 펼쳐왔다. 성공 사례도 적지 않다. 그러나 제한된 지역에 그친 것이 대부분이다. 간판 정비는 한 번 하고 끝나는 일회성이어선 안 된다. 업소와 주민들이 새 간판에 익숙해지는 숙성기간이 필요하다. 그때까지 지속적으로 관리를 해야 한다.

좋은 성공사례가 서울 서대문구 신촌 연세로다. 이곳은 간판이 정비되기 전에는 돌출 간판들이 다닥다닥 중구난방 어지러웠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작심한 지자체가 업소와 주민들을 설득해 간판 정비사업에 들어갔다. 업소와 주민들이 참여하는 주민위원회를 만들고, 여기서 간판 개선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했다.

주민위의 결의에 따라 돌출간판은 모두 연립간판으로 대체하고 지주간판들은 퇴출시켰다. 주민위는 간판의 크기, 형태, 색상, 부착방식 등에 대한 대략적인 원칙을 정하고 그 안에서 업소가 자율적으로 정하도록 했다. 그러자 간판들이 통일성을 유지하면서도 각자 개성을 갖게 됐다. 창의력 있는 간판들도 등장했다.

간판이 바뀌자 상권이 활성화됐다. 간판에 가려 죽었던 빌딩의 모습이 드러나고, 지주간판이 사라지자 보행공간과 쉼터가 확보됐다. 아름다운 간판들은 부지불식간에 보행인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이는 거리를 밝게 만든다. 이 모든 과정에서 서대문구가 적극적으로 지원 업무를 담당했다.

◇간판 바꾸지 않으면 도시 경쟁력 요원

서대문구 신촌 연세로의 성공사례를 전국으로 확산할 필요가 있다. 광역 도시 차원에서 '간판의 혁신'이 일어나야 한다. 현재 한국의 간판문화로는 아무리 멋진 빌딩을 짓고 거리를 정비하고 공원을 계속 들인다 한들 도시 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은 요원하다. 아무리 명품 수트를 입은들 반짝이 넥타이에 흰 양말을 신고 폼내보려 해봤자 웃음거리일 뿐이다.

지금과 같은 크기, 형태, 색깔, 부착방식 등에서 '무개념·무질서·무법' 3무가 판을 치고 있는 것을 더 이상 방치해선 안 된다. 간판법과 그 시행령, 각 자치단체의 조례를 보면 간판은 원칙적으로 1업소 1개이고 예외적으로 2개까지 허용하지만, 이를 지키는 업소는 거의 없다. 행안부 조사에 따르면 시중 간판의 절반가량이 불법이다. 그럼에도 중앙정부와 지자체, 업소, 주민 모두 개선의지가 보이지 않는다. 어지럽고 지저분한 간판을 늘 보아왔기 때문에 문제의식조차 실종됐다.

간판은 도시의 얼굴이다. 잘 정돈된 가로수와 보도블록, 빼어난 디자인의 빌딩, 잘 가꿔진 공원을 가진들 거기 부착되고 서있는 간판이 후진적이면 다 된 밥에 코를 빠뜨리는 격이다. 현 간판 실태를 놔두고 도시 미학을 말한다는 것 자체가 돼지입술에 립스틱일 뿐이다. 지저분한 간판을 방치한 채 제아무리 도시 혁신을 외쳐도 허당이다. 간판 혁명을 지금 당장 시작하지 않으면, 대한민국 도시들은 경쟁력과 매력도 추락을 피할 수 없다. 그리고 거기 사는 시민들의 미적 감수성 역시 계발은커녕 퇴보를 감수해야 할 것이다.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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