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석] `러시아` 이름표 떼고… 정체성 되찾는 `우크라이나` 예술인들

강대국에 주권 빼앗기면서 '문화'까지 제재받아
전통악기 '반두라' 연주자는 정권 희생양되기도
최근 역사적 비극의 희생자들 기리는 작품 늘어
민속음악 '두마' 활용·전역 돌며 유산 알리기 활발
무용·연극은 재정 지원에 대중성 얻긴 했으나
모국어 사용 제한·사회비판 금지 등 제약 많아
자극받은 현대작에선 국가신화 모티브에 주력

  • 프린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객석] `러시아` 이름표 떼고… 정체성 되찾는 `우크라이나` 예술인들
우크라이나 민속무용을 공연하는 모습



월간객석과 함께하는 문화마당

우크라이나 공연예술


우크라이나는 유럽에서 두 번째로 넓은 영토를 지녔다. 그것도 아주 비옥한 곡창지대여서 '유럽의 빵바구니'라고 불렸다. 그러나 이곳에서 생산된 농산물은 이 땅을 지배한 러시아 제국과 소련에 의해 징발되기 일쑤였다. 주변 강대국을 배불리는 동안 우크라이나 민중은 굶주려야 했다.

문화라고 다를 바 없었다. 정체성의 동화를 강요받으며 전통예술은 메말라갔다. 이를 지키려 한 이들은 결국 목소리를 빼앗겼다. 많은 인재가 더 큰 시장이 형성된 상트페테르부르크 등지에서 수학하거나 활동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들에게는 편의상 '러시아 예술가'라는 이름표가 붙었다.

우크라이나의 대표 시인 파블로 티히나(1891~ 1967)는 1920년 작 '시험(A Test)'에서 답답함을 토해냈다. "맙소사, 팔 걷어붙이고 뭐라 답 좀 해봅시다. 우리에게 '문화'라는 게 있는지 묻고 있잖아요!" 100년이 지난 오늘을 살았다면, 그의 설움이 조금이나마 풀렸을까? 우크라이나에서 나고 자란 프로코피예프, 호로비츠, 피아티고르스키, 나탄 밀스타인, 에밀 길레스 등에게 '소련의' '러시아 태생의'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니는 현실은 이 질문에 낙관할 수 없게 만든다.

늦게나마 변화의 불씨가 지펴졌다. '러시아 예술'이라는 용어가 포괄적으로 쓰였지만, 이 게으른 관례를 바로잡을 때라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지난 4월에는 영국 내셔널 갤러리에 소장된 에드가르 드가의 '러시아 무용수들'이 '우크라이나 무용수들'로 개명됐다. 묘사된 의상과 장신구, 당시 사회상 등에 대한 수년간의 논의 끝에 그림 속 무용수는 정체성을 되찾았다.

클래식 음악을 비롯한 공연예술계에도 제국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그 아래서 우크라이나의 유산은 여전히 숨 쉬고 있다.

◇가려져 있던 우크라이나

지난 2021년 도쿄 올림픽에는 러시아 국가(國歌) 대신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이 울려 퍼졌다. 작곡가의 대표작임은 물론, 국가를 상징하는 권위까지 얻었지만 이 곡에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차이콥스키의 애정이 묻어 있다. 특히 3악장의 도입부, 맛깔스러운 당김음이 특징인 피아노 주제 선율은 키이우 인근 카미안카의 시장에서 들은 민요를 차용한 것이다.

차이콥스키의 증조부는 우크라이나의 전통 군사공동체인 코사크의 일원이었고, 조부는 키이우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으나 러시아로 징병 됐다. 차이콥스키는 러시아 봇킨스크에서 태어났지만, 20여 년간 매해 우크라이나를 방문해 몇 달씩 지내며 30여 곡을 썼다. 교향곡 2번에는 민속음악이 가장 광범위하게 쓰였다. 1악장과 2악장에는 우크라이나풍으로 변형한 러시아 민요를, 피날레 악장에는 우크라이나 민요인 '황새(The Crane)'를 활용했다. 당대 유명 음악평론가였던 니콜라이 카시킨은 곡의 짙은 우크라이나 정서를 근거로 '소러시아'라는 부제를 붙였다. 소러시아는 당시 우크라이나를 낮게 가리켜 부르던 말이다.

프로코피예프는 러시아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우크라이나 도네츠크에서 나고 자랐다. 집을 나서면 늘 전통악기 반두라를 연주하는 악사들을 마주쳤다. 어깨너머로 들은 선율은 작품에 녹아들었다. 특히 바이올린 협주곡 2번과 첼로 소나타 C장조는 민속음악 '두마'를 바탕으로 한다.

두마는 이웃 나라 체코슬로바키아의 드보르자크가 즐겨 쓴 '둠카'나 '둠키'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본래 15~16세기 우크라이나에서 기원한 시와 민속음악을 가리켰다. 주로 전쟁과 사회 불평등의 주제를 담았고, 반두라나 리라 반주가 따랐다. 두마를 둘러싼 전통은 쇼스타코비치의 기록에도 남아있다.

"예로부터 이 민속음악가들은 우크라이나를 떠돌아다녔다. 이들은 리리키 혹은 반두리스티라고 불렸고 항상 시각장애인이었다. 왜 그런지는 다루지 않겠지만, 간단히 말해서 이건 전통이다. 요점은 그들은 앞을 볼 수 없고 방어력이 없지만, 아무도 그들을 만지거나 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각장애인에게 상처를 주는 것, 이보다 더 저급한 것이 있을까?"

1930년대 반두리스트들은 스탈린 정권의 희생양이 됐다. 1920년대 말 300여 명으로 공식 등록됐던 반두리스트들은 1936년 단 네 명으로 집계됐다.

[객석] `러시아` 이름표 떼고… 정체성 되찾는 `우크라이나` 예술인들
막심 베레좁스키



◇우크라이나 음악 다시 쓰기

키이우 루스는 988년 그리스도교를 수용했다. 교회 합창 문화가 동유럽 지역에 전파된 계기였다. 우크라이나 최초로 영향력을 발휘한 작곡가 니콜라이 딜레츠키(1630~1690)는 그 역사를 딛고 태어났다. 그는 14~17세기에 걸쳐 우크라이나 땅에 자리 잡은 다성 합창을 연구해 '음악 문법'(1675)을 펴냈다. 이 책은 18세기까지 여러 언어로 재출간되면서 동유럽의 음악 이론 기본서로서 권위를 누렸다. 이후 세대의 많은 우크라이나 작곡가는 합창에 민속음악을 결합했다. 주권 잃은 나라의 문화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이들만의 방식이었다.

특히 막심 베레좁스키(1745~1777)는 '합창 협주곡'의 형식을 창안했다. 기법적으로는 이탈리아 바로크의 오스티나토와 모티브를 발전시켜나가는 고전음악의 특성을 아우르고, 내용에 있어서는 민속음악 두마를 활용했다. 그가 남긴 열여덟 합창 협주곡은 오늘날 바로크와 고전, 이탈리아와 우크라이나를 연결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세기 후반에 들어서 주요 도시인 키이우, 하르키우, 오데사, 리이우 등에 음악원이 설립됐다. 학교 소속 합창단들이 여러 작곡가를 고용해 창작을 도모했고, 이 흐름을 타고 민족주의 운동도 활기를 띠었다.

이를 견인한 인물은 미콜라 리센코(1842~1912)다. 그는 민속 선율을 수집해 민족 고유의 음악 특성을 확립하는 데 노력했다. '둠카슘카' '우크라이나를 위한 기도' 등에서 그 흔적을 엿볼 수 있다. 그는 합창단을 이끌고 국내 전역을 여행하며 자국의 음악 유산을 알리기도 했다.

그의 제자인 미콜라 레온토비치(1877~1921)는 수백 곡의 민속음악을 합창으로 편곡해 대중화했다. 그중 하나가 '풍성한 저녁(Shchedryk)'으로, 오늘날 크리스마스 시즌이면 들려오는 '종들의 노래(Carol of the Bells)'라는 제목으로 유명하다. 이 곡은 1990년 발표된 영화 '나 홀로 집에'에 존 윌리엄스의 편곡 버전으로 삽입되면서부터 세계적 인기를 누렸다. 레온토비치는 오늘날 '민속 판타지 오페라'라고 불리는 '물의 요정들의 축제'를 미완성으로 남겨둔 채 세상을 떠났다. 볼셰비키 비밀 요원에 의해 목숨을 잃은 것이다.

그의 죽음 이후, 우크라이나는 1922년 건국된 소비에트 연합에 흡수됐다. 초기의 혼란한 틈을 타, 전통 요소를 서유럽의 현대적 기법으로 소화한 새로운 세대가 등장했다. 레브코 레부츠키(1889~1997)가 대표적인 인물로, 그의 교향곡 2번은 민속음악을 당대 서유럽에서 유행하던 인상주의 어법으로 풀어내 주목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작품들은 정부로부터 낙인찍히는 결과로 이어졌다.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의 트라우마는 한 명의 작곡가를 영원히 침묵시켰다. 1930년대부터 그는 악보 편집과 민요 편곡에만 몰두했다.

[객석] `러시아` 이름표 떼고… 정체성 되찾는 `우크라이나` 예술인들
전통의상을 입은 반두라 연주자들



◇우크라이나 음악의 오늘

이데올로기의 압박이 완화되기 시작한 건 1960년대 들어서다. 쇼스타코비치가 후기 작품을 쓰고, 알프레드 슈니트케, 소피아 구바이둘리나, 아르보 패르트, 기야 칸첼리 등이 활동하던 시기에 우크라이나에도 '키이우 아방가르드'라고 불린 작곡가 그룹이 등장했다. 최근까지 활동한 발렌틴 실베스트로프(1937~)과 미로슬라프 스코리크(1938~2020), 예브헨 스탄코비치(1942~)가 이곳에서 태동했다.

젊은 시절 실베스트로프는 12음 기법, 무조음악, 선법 등 이전 세대 작곡가들이 누리지 못한 다양한 음악 언어를 실험했다. 그는 "내 음악은 이미 존재했던 것들에 대한 반응이자 메아리"라고 말하곤 했다. 이후 교향곡 4번과 5번부터는 매우 느린 페이스의 '신비주의' 미학에 천착했다. 최근에는 사회적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2014년 키이우의 시위에서 희생된 시민들을 기리기 위한 '성상화(Dyptykh)'가 대표적이다.

스탄코비치 역시 역사적 비극으로 희생된 이들을 위한 작품을 다수 남겼다. '홀로도모르 희생자를 위한 레퀴엠'(2003)은 스탈린의 산업화 정책과 집단농장 체재가 야기한 우크라이나 대기근을, '바비 야르'(1991)는 독일 나치에 의한 키이우 유대인 집단 학살의 첨예함을 기록했다.

스코리크는 서우크라이나 훗술 지역의 전통무용 리듬을 변주한 바이올린 소나타 1번으로 급부상했다. 그는 '새로운 민족주의 음악'을 이끌었다고 평가될 정도로 독자적인 어법을 구사했는데, 기성세대가 된 이후부터는 키이우 뮤직 페스트를 통해 젊은 작곡가의 창작을 도모했다. 키이우 뮤직 페스트는 우크라이나의 대표적인 현대음악 축제로, 스코리크는 두 차례(2002~2005/2013~2019) 예술감독을 지냈다.

수백 년간 이어진 우크라이나의 음악은 키이우 심포니(우크라이나 내셔널 심포니), 오데사 필, 하르키우 심포니, INSO 리이우 심포니 등과 젊은 음악가들에 의해 보존되고 있다. 특히 키이우 심포니는 현재 유럽 투어를 진행하며 자국의 음악 유산을 알리는 역할을 수행 중이다. 지난해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 오른 최초의 여성 지휘자 옥사나 리니우는 망명한 젊은 음악가들을 위한 캠프 '미래를 위한 음악(Music for Future)'을 후원하고 있으며, 피아니스트 안나 페도로바는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기금 조성 콘서트를 이어가고 있다.

◇무용과 연극, 민족성을 잃지 않다

무용과 연극은 조금 다른 길을 걸었다.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시기, 두 예술 장르는 막대한 재정 지원에 힘입어 대중성을 얻었다. 농민 문화를 바탕으로 한 민속 무용이 공동체 의식을 고취하고, 가벼운 주제의 연극이 사회의 안정을 불러올 수 있다는 점에서였다. 이로써 20세기에 걸쳐 민속 무용 앙상블과 극단, 극장이 줄지어 등장했다.

특히 바실 베르호비네츠(1880~1938)는 민속 무용을 무대에 정착시켰다. 1935년에는 영국 런던에서 개최된 제1회 국제 민속 무용 축제에 우크라이나를 대표하는 작품을 출품했다. 키이우 오페라 발레, 하르키우 오페라 극장 등과 협업한 이 작품은 코사크 무용의 일종인 고팍을 활용했고, 이후 '런던 고팍'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

한편 우크라이나의 민속 무용은 지역마다 고유한 특징을 보였다. 중앙 지역을 대표하는 코사크 무용에는 군사적 영향도 스며있다. 무용수 간의 화합이 중요한 요소이고, 남성 무용수는 넉넉한 품의 바지를 입거나 때로 검을 들었다. 서쪽 지역에서는 더욱 다채로운 의상과 뛰어오르는 움직임이 특징인 카르파티안 무용이나 훗술 무용의 전통이 전해진다.

연극계는 정부 지원을 받는 대형 극장들을 중심으로 운영됐다. 활동 반경은 멜로드라마나 뮤지컬 코미디에 국한됐다. 우크라이나어의 사용은 불법이었고, 사회 비판적 내용도 금지됐다. 이에 따라 연극계는 당대 만연하던 혼란과 위기를 담아내는 사회적 역할은 해내지 못했다.

20세기 초, 연출가 레스 쿠르바스(1887~1937)는 이러한 제약을 넘기 위한 최초의 시도를 했다. 관객이 극의 완곡한 어법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상징주의 연극을 도입했고, 1922년 최초로 제작 스튜디오 성격의 베레질 극단을 설립해 새로운 표현 기법을 실험하는 장으로 활용했다.

1991년 구소련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상황은 급변했다. 각 극단은 독립적으로 작품을 제작하거나 상연할 수 있었다. 베레질 극단 이후 처음으로 제작 극단의 탄생이 줄을 이었다. 다만 늘어난 공급에 수요가 발맞추지 못해 많은 단체가 기존 레퍼토리 상연을 이어가다 결국 문을 닫았다. 그중 살아남은 곳들이 과거 우크라이나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무대를 선보였다.

특히 1994년 출범한 다흐 현대 예술 센터는 제작 극단으로서뿐만 아니라, 세계의 작가들과 연극 트렌드를 소개하고 배우를 양성하는 종합 플랫폼으로 역할 했다. 국가라는 신화와 문화 정체성 등을 모티브로 한 작품들에 주력했다. 2007년 출범한 우크라이나 최초의 종합예술 축제인 고골페스트(GOGOLFEST)에서는 특히 현대 무용의 발전이 이뤄졌다. 이곳에서 꾸려진 무용가 콜렉티브 '무용 실험실'은 '포스트 우크라이나의 몸'(2012), '희생자의 독재'(2017) 등의 작품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최근까지도 주립과 시립 극장은 국가 정체성에 관한 논의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었다. 예술가들에겐 자극제가 됐다. 이들은 새로운 표현 수단으로 20세기의 역사적 트라우마를 끊임없이 들춰내며 오늘의 예술사를 써나갔다.

박찬미(독일 통신원)




[저작권자 ⓒ디지털타임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가장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