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석] 백남준이 갈망한 `형편없는` 연주… 그녀는 현을 켜는 대신, 활을 내리쳤다

작곡가·첼리스트 지박
'롤모델' 백남준 90주년 기념전 영상작가로 참여
텍스트 악보에 적힌 '형편없는 연주' 지시에 맞춰
쌀 넣은 바이올린 흔들고, 활로 악기 툭툭 치는 등
일반·전통적 공연 아닌 사운드적 실험 가깝게 표현
관객들 난해하다는 평에 "경험·교육의 부재 아쉬워"

  • 프린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객석] 백남준이 갈망한 `형편없는` 연주… 그녀는 현을 켜는 대신, 활을 내리쳤다
지박은 클래식 음악을 전공한 후 보스턴 뉴잉글랜드 음악원 석사과정에서 현대음악을, 홍익대학교 석사과정에서 영상디자인을 전공했다. 2014년 '9000Km+' 음반으로 데뷔 후 여러 음반을 발매했다. '지박컨템포러리 시리즈'를 통해 다원예술작품을 꾸준히 선보이고 있다.

지박을 처음 만난 건 판소리 공연에서였다. 그의 첼로는 소리꾼의 구슬픈 목소리와 함께 애절하게도 울어댔다. 그 이후 현대무용 공연에서, 다른 음악가와 함께한 즉흥연주 앨범에서, 미디어아티스트와의 공연에서 그의 이름을 종종, 아니 자주 보았다. 무언가 만나고 엮이는 실험적인 곳에는 '지박'이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 그를 이번에는 전시 작가로 만났다. 작곡가이자 미디어아티스트 백남준(1932~2006)의 탄생 90주년을 기념한 전시 '완벽한 최후의 1초-교향곡 2번'(3.24~6.19)에 지박이 영상 작가로 참여했다. 백남준이 텍스트 악보로 남긴 '20개의 방을 위한 교향곡'(1961)을 시연하는 이번 전시에서 지박은 악보의 한 부분을 맡아 재해석했다. 영상 작품의 제목은 '형편없는, 경계를 허무는, 독특한'(2022, 3채널 영상, 사운드, 30분).

그야말로 예술의 경계를 허무는 독특한 예술가, 지박이 궁금했다. 그에게 메일을 보냈다. 일주일쯤 뒤, 그간의 여정을 꼼꼼히 써내려 간 답변이 돌아왔다.

-백남준에 관한 작업은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2020년 백남준을 오마주한 음악을 발표하고 '백남준 : 스트링 콰르텟을 위한 노마딕(Nomadic) 모음곡' 음반으로도 발매했어요.

"가끔 롤모델이 누구냐는 질문을 받아요. 항상 없다고 대답했어요. 특정 음악가만을 꼽기도 어렵고, 특정 시각예술가만을 꼽기도 어려웠거든요. 그런데 시간이 흘러 제 작업을 돌아보니, 백남준이 저의 롤모델이었어요. 새로운 기술에 대해 열린 자세나 위트 있고 간결하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점 등 여러 면에서요. 음악가이면서, 미디어아트, 행위예술 등 장르의 경계를 허물었던 백남준의 인생과 작품 그 자체가 저에게 큰 영향을 주었어요. 예전부터 지금까지 쭉."

-당시 전통적인 현악 4중주 편성에 미디어아트를 하나의 악기처럼 더한 '미디어퀸텟'을 실험했죠.

"언젠가는 백남준을 재해석하는 작업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어요. 그 시작이 2020년 작업이었죠. 백남준의 미디어 작품을 미디어 아트로 시각적으로 변형했고 그의 퍼포먼스 작품과 예술에 대한 가치관은 음악에 담아냈어요. 간결한 설득력을 가지려 했고 때로는 위트 있는 음악적 장면을 작곡하기도 했어요."

-영상과 음악은 서로 다른 매체인데 지박의 세계에서는 그 둘이 밀접하게 결합합니다. 영상으로 표현하고 싶은 음악, 예컨대 작곡할 때부터 영상화를 염두에 두는 음악이 따로 있나요?

"저에게 영상은 음악을 표현하는 것과 같은 개념이에요. 작곡할 때 음악의 시각적 이미지를 항상 생각해요. 이후 영상 작업을 할 때도 영상이 단지 음악의 배경에 그치는 걸 지양하죠. 음악과 영상에 유기적으로 에너지를 배분해, 전체적인 전달력과 완성도를 높이는 데 초점을 맞춰요. 때로는 기호학처럼 어떠한 영상 이미지가 음악과 유기적으로 연결될 때도 있고, 혹은 영상의 운동성이 굉장히 빠른데, 음악은 굉장히 느린 경우도 있어요."

◇형편없는 음악을 전시하다

-백남준아트센터가 위촉한 영상 작품 '형편없는, 경계를 허무는, 독특한'(2022)은 백남준을 탐구하는 연장선에 있다고 보입니다. 백남준 '20개의 방을 위한 교향곡'(1961) 중 '형편없는 연주자들로 구성된 자유 오케스트라'를 재해석한 작품인데요.

"'20개의 방을 위한 교향곡'에 관한 논문과 백남준을 다룬 여러 서적을 참고했어요. 일반적인 공연이 아닌, '음악전시'로 접근하기로 결정했죠. 음악과 비음악의 경계를 허물고 가변성에 의한 과정의 예술로 작품을 표현하기로요. 악기 연주도 전통적인 방법으로 하지 않아요. 사운드적인 실험에 가깝죠. 바이올린을 책상에 내려치는 백남준의 퍼포먼스 작품 'One for Violin Solo'(1962)에서 영감을 받아 부서진 바이올린을 사용하기도 하고요."

-텍스트 악보를 받아들고 도대체 어떻게 '연주'해야 할 지 난감하지 않았나요? 악기와 테이프, 장난감, 호루라기라는 독특한 편성에 지시문에는 '형편없는 연주'라고 적혀있으니….

"쇤베르크(1874~1951)는 무조(無調), 존 케이지(1912~1992)는 무작곡(無作曲), 그리고 백남준은 스스로 명명한 무음악(無音樂)의 개념을 제시했어요. 이에 기반해 텍스트 악보를 해석했고 즉흥음악 전문가 열 분에게 공통적으로 '형편없고,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연주를 요청했어요. 이외에는 해외 연주자에게는 자유에 맡겼고 한국에서 촬영한 퍼포먼스는 연주자들과 동선과 콘셉트 이미지 정도만 공유한 채 각자 아이디어를 준비해 와서 현장에서 호흡을 맞췄어요.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어요. 특히 함께한 브리(VRI) 스트링 콰르텟 멤버들과는 최근 몇 년 동안 이러한 실험을 해왔거든요. 퍼포먼스 영상을 모아 제가 의도한 음악적인 흐름대로 정리하고 최종 편집은 미디어디렉터를 맡은 정순영 감독과 의논했습니다."

-영상 속 연주자들은 각자가 생각하는 '형편없는 연주'를 합니다. 바이올린 안에 쌀을 넣어 흔들고, 악기를 활로 툭툭 치고, 알아들을 수 없는 가사를 불러요. 이 모든 '소리'가 하나의 '음악'이라는 건데, 전시장 한구석에 앉아서 관람객의 반응을 살피니 물음표가 가득해 보였어요.

"아주 솔직히 말하자면 '난해한 음악'이라는 감상평에는 공감이 잘 안 가요. 제가 어릴 적부터 존 케이지 같은 현대음악 작곡가를 좋아하기도 했고, 일상적인 현장의 소리나 장치된 악기의 사운드로 음악을 만드는 건 벌써 20세기부터 쓰인 오래된 방식이잖아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듣기 힘들어하는 사운드에도 마치 멜로디처럼 다양한 정서와 감정이 섬세하게 내포되어 있어요. 어쩌면 관객이 이러한 음악에 노출될 기회가 별로 없었거나 제 작품이 안 좋았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교육적인 요인도 크다고 봐요. 만약 제가 고교시절에 코넬리우스 카듀(1936~1981)의 그래픽 스코어를 연주해본 경험이 있었다면, 다양한 현대음악의 세계에 조금 더 일찍 눈을 뜰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가끔 들거든요."

◇협업을 통한 예술 세계의 확장

-장르를 오가는 당신의 음악을 두고 융합예술이나 현대음악 외에도 많은 장르를 열거할 수 있습니다. 클래식 음악, 실용음악, 크로스오버 음악, 즉흥음악, 재즈, 무용음악 등등이요. 출발점은 클래식 음악이었습니다.

"어릴 때 거실에 있었던 전축으로 아버지께서 클래식 음악 LP를 들려주시곤 했어요. 조금 큰 이후에는 그 LP 중에서 좋아했던 차이콥스키나 드보르자크 교향곡을 틀어놓고 춤을 췄던 기억이 나요. 그러다가 유리탁자에 걸려 넘어져 얼굴을 꿰매기도 했죠.(웃음) 서양화가이신 어머니께서는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어요. 어느 날 어머니께서 첼로를 연주하시는 모습을 보고 저도 배워보고 싶다고 말씀드렸죠. 배우던 바이올린은 당장 그만뒀어요. 아무래도 바이올린보다는 첼로가 제 성격에 맞는 음역이란 걸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 같아요."

-순수예술과 대중예술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지만 클래식 음악을 전공하다가 실용음악의 길로 들어서는 건 지금도 파격적입니다.

"대구에서 경북예고를 졸업하고 바로 계명대 관현악과에 진학했어요. 예고 동기들과 같이 입학한 데다 이미 배운 내용을 대학에서 또 다시 배우자니… 좀 지루했던 것 같아요. 어느 날 학교 연습실에서 하이든 첼로 협주곡 2번을 연습하고 음반도 듣는데, 문득 엉뚱한 생각에 사로잡혔어요. '이렇게 훌륭한 대가의 연주가 이미 많이 있는데, 왜 나까지 이 곡을 연주해야 하지?' 뭔가 새로운 것, 나만 할 수 있는 것을 열망하게 됐어요. 기차표를 끊어서 서울로 레슨도 다니고 좋은 공연과 전시를 보며 더 넓고 새로운 세상에 매력을 느끼던 와중이었죠. 서울로 편입을 해야겠다고 다짐한 그때, 실용음악과에 진학한 친구가 현악기도 뽑는다고 얘기해줬어요. 그날이 제 인생을 바꾼 터닝 포인트이지 않나 싶어요."

-지금 작업의 바탕이 된 즉흥연주를 깊이 배운 건 미국 뉴잉글랜드 음악원에서였어요. 이곳에서 현대음악을 전공했죠.

"2015년 '뉴욕 아트 오마이(Art-OMI)' 상주예술가로 활동할 때 만난 미국인 사운드아티스트(BlankFor.ms)가 추천해줬어요. 그가 뉴잉글랜드 음악원 재즈 작곡과를 나왔는데, 저보고 이 학교의 '현대 즉흥연주(Contemporary Improvisation)'라는 전공과 잘 어울릴 것 같다면서요. 그길로 전공 교수님인 재즈 피아니스트 안소니 콜맨(1955~)의 공연을 보러 갔다가 흥분을 감출 수 없었어요. 바로 제가 원하던 거였어요! 내가 좋아하는 것을 그대로 해보이면 된다는 사실에 즐겁게 학교를 다녔어요. 콜맨 교수님의 수업 교재였던 마이클 니만(1944~)의 '케이지 너머의 실험음악(Experimental Music_Cage and Beyond)'을 볼 때는 마치 보물 상자를 연 기분이었죠."

-소리꾼 백현호, 현대무용가 이나현, 사운드아트 그룹 코리아(COR3A) 등 다양한 장르의 연주자와 협업해오고 있고, 2020년에는 즉흥음악을 기반으로 하는 브리 스트링 콰르텟으로 팀을 꾸리기도 했어요. 협업을 결정하는 기준이 있나요?

"제일 우선적인 건 그 예술가의 작품이에요. 설명을 듣지 않아도 저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와야 협업이 시작돼요. 보통 큰 주제를 정하고 나면, 음악적인 부분은 저를 믿고 맡겨주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작품이 좋아서 만났는데, 알고 보니 성격도 잘 맞을 때 참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예술적인 것이든, 인간적인 것이든 존경할 수 있는 예술가들과의 교류는 저의 매일 매일을 충만하게 만들죠."

-이 끝없는 예술의 세계를 탐험하려면 무엇보다 참 부지런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지막으로 올해 계획을 말씀해주세요.

"먼저, 요즘은 영화음악을 한창 작곡하고 있어요. 또 10월 발매 예정인 저의 10번째 음반 '파르티타'를 계획 중이고요. '파르티타'라는 바로크 형식을 차용해 첼로 한 대만으로 음악적, 구조적 실험을 해볼 생각이에요. 브리 스트링 콰르텟과 2020년부터 매년 여름 발표하고 있는 시리즈 'Save The Planet III'도 준비 중이고요. 캐나다의 미디어 아티스트 헤르만 콜겐(Herman Kolgen), 영상 작가 정순영, 소리꾼 추다혜와의 협업도 진행하고 있습니다."글=월간객석 박서정기자·사진=본인 제공




[저작권자 ⓒ디지털타임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가장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