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태 디지털뉴스부장
![[DT현장] 젤렌스키와 소프트파워](http://contents.dt.co.kr/images/202204/2022040702102269607001[1].jpg "[DT현장] 젤렌스키와 소프트파워")
초토화된 우크라이나의 현실은 드라마보다 훨씬 더 암울하고 끔찍하지만 드라마속 젤렌스키는 '정치 사이다'로 톡톡 튀었다. 젤렌스키의 리더십이 국제적인 주목을 받게되자 넷플릭스가 재방영을 결정했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이쯤되면 젤렌스키 대통령을 하이브리드형 전사라 불러야할 것 같다. "우리 모두는 여기에 있다. 우리는 우크라이나를 지켜내고 있다." 러시아의 침공이 시작된 직후 그는 키이우 밤 거리에서 30여초 분량의 동영상을 디지털 플랫폼에 올렸다. 면도도 하지 못한 평상복 차림이었다. 그러나 그의 단호하고 비장한 표정은 세계인의 마음을 울렸다.
젤렌스키는 디지털 플랫폼 전사다. 화력면에서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압도한다. 미디어와 엔터테인먼트 분야에서 우러나온 오랜 경험과 재능이 유감없이 발휘됐다. 그는 마법처럼 푸틴과 러시아는 가해자, 젤렌스키와 우크라이나는 피해자라는 선악 구도를 만들어냈다.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젤렌스키를 향해 "그야말로 그의 존재 자체가 소프트파워의 힘"이라고 평가하기까지 했다.
스마트폰을 들고 긴박한 전황을 전하는 지도자는 그가 처음이었다. 그는 기존의 대국민 소통 문법을 파괴했다. 미디어 활용을 극대화해 공감 스토리텔링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그는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등에 실시간으로 연설과 영상, 사진을 올려 우크라이나 국민들을 결집시키고 있다. 청색 티셔츠나 스웨터를 입고 조국을 위해 싸우자고 호소했다. 외신의 찬사는 뜨거웠다. 미 USA투데이는 젤렌스키를 '현대판 윈스턴 처칠'이라고까지 추켜세웠다.
그는 정치권에 뛰어들기 전 배우로 활동하면서 미디어의 생리를 꿰뚫고 있었다. 그는 연기 생활의 대부분을 러시아어로 했다. 러시아에도 꽤 많은 팬이 있다. 푸틴이 침공하기 직전엔 러시아어로 러시아인들에게 직접 호소하기도 했다. 그의 소셜미디어 소통방식은 소탈한 태도와 진솔한 말투가 핵심이다. 그의 스마트폰엔 진정성이 묻어 있었고 이것이 그의 강력한 무기가 됐다.
젤렌스키의 맞춤형 연설도 새삼 주목되고 있다. 그는 최근 2주 동안 10개 국가의 의회에서 잇따라 화상연설을 했다. "여러분이 정말로 유럽인이라는 것을 증명해달라. 그러면 삶은 죽음을 이기고 빛은 어둠을 이길 것"이라며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프랑스 의회에 연설할 때는 '자유·평등·박애'라는 국가 모토를 외쳤고 일본에는 핵폭탄의 아픈 기억을 소환했다. 우리나라 국회에서도 11일 그의 연설이 예정돼 있다. 그는 코미디언과 배우로 활약하며 대중과 소통하는 법을 십분 활용했다. 적당한 쇼맨십과 정곡을 찌르는 직설적인 언변이 국제무대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또하나 흥미로운 점은 KGB 출신 푸틴의 정보조작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러시아는 '트롤'이라는 전문 부대를 동원해 가짜 정보를 쏟아내고 있다. 이번 침공에선 우크라이나 나치 정권이 러시아계 주민의 대량학살을 기획하고 있다는 가짜 정보를 유포했다. 너무 허무맹랑한 소리여서 그같은 가짜 정보는 통하지 않았다.
우크라이나 선전의 이유는 물론 자유와 독립에 대한 우크라이나인들의 뿌리 깊은 갈망 때문이다. 키이우 중심부 유로마이단 광장엔 '자유는 우리의 종교다'란 표어가 적혀있을 정도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자국 영향권 아래 묶을 수 있다는 오판을 했다. 우크라이나의 독립 의지는 2014년 크림 병합이 결정적이었다. 당시 우크라이나는 군대라고 할 것이 없었다. 고작 5000명 수준에 군장비라고는 보잘 것 없었다.
그 후 8년간 우크라이나는 상비군 20만명을 키워냈고 서방의 지도 아래 군사훈련을 정교화했다. 러시아의 크림 병합은 러시아에 대한 분노와 배신감을 자극했고 우크라이나인들이 온전한 정체성을 확립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러시아가 극단적인 무기를 동원하지 않는 한 이번 전쟁의 승자는 젤렌스키로 굳어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미래전쟁은 하이브리드 전쟁으로 변화할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기존의 정규전과 비정규전의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테러·범죄행위를 포함해 사이버 공격까지 포함하는 다양한 형태의 작전들이 동시에 복합적으로 전개되는 게 특징이다. 디지털 기술이 어떻게 글로벌 파워를 바꿔나갈까.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할까. 젤렌스키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김광태 디지털뉴스부장 ktkim@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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