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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서의 글로벌 아이] 불타는 천년고도, 키이우에 봄은 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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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서의 글로벌 아이] 불타는 천년고도, 키이우에 봄은 오는가


우크라이나의 수도이자 슬라브 민족의 고도(古都) 키이우(키예프)가 잠 못 이루고 있다. 1941년 나치 독일에 점령당한 이래 처음으로 겪는 대위기다. 80년 전 소련 적군(赤軍)은 독일군으로부터 키이우를 해방시켰지만 지금은 옛 소련의 맹주 러시아의 표적이 됐다. 얄궂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점령 시도 vs 결사 항전

러시아군은 키이우 공략에 사활을 걸고 있다. 시내 곳곳에선 전투가 계속되어 사상자들이 속출하고 있다. 지금도 공습과 포격은 이어지고 있다. 키이우 TV타워는 파괴돼 국영 방송은 마비됐다. 우크라이나 정부가 길거리에 있는 사람은 러시아측 파괴공작부대 병력으로 간주하겠다고 해서 도시에는 인적이 끊어졌다. 거의 유일하게 들리는 소리는 "쾅" 하는 폭발음과 공습경보다. 지하철 안이나 지하대피소로 피신한 시민들은 난방도 안되는 곳에서 숨을 죽이고 있다. 시민들은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러시아군은 아직까지 키이우에 진입하지 못하고 있다. 당초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48시간 내에 키이우를 수중에 넣을 수 있을 것으로 봤다. 키이우를 점령한 후 우크라이나의 항복선언을 받아낸 다음에 친러 정부를 세우겠다는 전락이었다.

하지만 생각대로 되지않고 있다. 우크라이나군과 시민들의 거센 저항, 보급 문제 등으로 지지부진이다. 그렇다고 러시아가 키이우 점령을 포기할 가능성은 낮다. 속전속결 키이우 장악에 실패한 러시아군이 전략을 포위전으로 바꿀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러시아군은 앞서 우크라이나 접경에 배치했던 병력 중 3분의 1은 여전히 남겨놓고 있다. 현재 키이우를 향한 총공세를 준비 중인 것으로 보인다.

◇1941년 키이우 포위전

키이우는 독소전쟁 때 격전지가 되면서 민간인들이 큰 희생을 치렀다. 이제 전쟁의 재앙이 또다시 키이우를 덮쳤다. 1941년 8월 히틀러는 모스크바보다 키이우를 먼저 정리하기로 결심했다. 모스크바를 먼저 점령해야 한다는 지휘관들의 조언을 무시하고 히틀러는 키이우로 방향을 틀으라고 명령했다. 이로써 동부전선 최대 포위작전이 시작됐다.

1941년 8월 23일 구데리안의 기갑군단이 빠르게 키이우로 전진해 포위망을 형성했다. 스탈린은 키이우 사수를 명령하며 철수를 불허했다. 결국 소련군 60여만명이 포위망에 갇혔다. 포위된 소련군은 9월 26일 항복했다. 독일군의 대승리였다. 역사상 가장 많은 포로가 잡혔다. 히틀러는 이 전투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투"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는 독일군에겐 양면의 동전이었다. 키이우 공격에 소비된 약 4주 동안 모스크바가 공격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키이우 포위전을 끝낸 독일군은 기세를 몰아 모스크바로 향했지만 땅은 온통 진흙탕으로 변했고 추위는 다가오고 있었다. 독일군은 모스크바를 목전에 두고 진군을 멈췄다. 전쟁 개시 두 달 내에 모스크바를 점령하겠다는 히틀러의 꿈은 무산됐다.

모스크바 공략이 실패하면서 전세는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키이우 전투 이후 소련군은 큰 교훈을 얻었다. 독일군에 포위당하는 것을 극도로 피하게 된 것이다. 역으로 소련군은 독일군을 포위 섬멸하는 작전으로 나아갔다. 스탈린그라드 공방전에서 소련군은 독일 6군단을 포위했다. 무적을 자랑했던 6군단은 1943년 1월 31일 항복했다. 9만여명이 포로가 됐다.

스탈린은 스탈린그라드 승리에 힘입어 대규모 반격에 나섰다. 1943년 11월 1일 소련군은 우크라이나 방면을 향해 총공세를 개시했다. 드니프로강을 도하해 독일군 방어선을 무너뜨렸다. 11월 6일 키이우를 탈환했다. 2년 1개월여만에 다시 키이우를 찾은 것이다. 하지만 20만 시민들의 희생이 있었다.

◇영원히 빛날 '황금 고도'

전쟁이 터지면서 슬라브 민족주의의 거점도시 키이우에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키이우는 사적이 풍부한 고도다. 구소련 지역에선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진 도시다. 드니프로강 중류 유역의 이 곳에 큰 마을이 형성된 시기는 대략 서기 6~7세기 무렵이다. 8세기에 들어서자 비잔틴제국 등 동방국가들과의 통상으로 발전했다. 9세기 말 동슬라브족 최초의 도시국가인 '키이우 대공국'이 세워지면서 수도가 됐다. 이후 동유럽의 중심지로 번창했다.

하지만 1240년 바투가 이끄는 몽골군의 침략으로 폐허가 되면서 쇠락의 길을 걸었다. 240여년 몽골 지배의 핍박을 피해 상당수 주민들이 대거 다른 곳으로 이주했다. 이들은 이주한 지역에 도시들을 만들었다. 모스크바는 그렇게 형성된 도시다. 그래서 키이우는 '러시아 도시들의 어머니'라는 소리를 듣는다.

키이우는 14세기 리투아니아 대공국에 병합되면서 점차 번영을 회복했다. 1569년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폴란드가 연합왕국을 결성하면서 키이우는 폴란드령이 됐다. 우크라이나인들의 반(反)폴란드 운동이 확산됐다. '코사크' 라는 용맹한 군사집단은 계속해서 폴란드에 저항했다. 결국 키이우는 1686년 모스크바 대공국으로 귀속이 결정됐다. 러시아령이 되면서 키이우는 남러시아의 상업·문화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19세기 말에 키이우는 러시아 혁명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이듬해 우크라이나에 소비에트 정부가 들어섰다. 1934년 키이우는 소련연방 우크라이나 공화국의 수도가 됐다. 독소전쟁이 터지면서 황폐해졌지만 전쟁이 끝난 후 부흥은 눈부셨다. 소련에선 모스크바, 레닌그라드와 어깨를 견줄 정도의 대도시로 발전했다.

1991년 우크라이나 독립과 함께 수도가 됐다. 인구 300만명의 키이우는 교통의 요충지이고 기계공업이 발달한 공업 중심지다. 녹지율이 높아 도시가 숲속에 들어앉은 분위기다. 특히 문화·예술의 도시로 유명하다. 11세기에 지어진 '성소피아 대성당'과 '황금의 문', 12세기 건립된 '성미카엘 황금돔 수도원' 등 고건축물들이 많다. '키이우 발레단'은 150년 넘는 전통을 자랑하는 발레의 명문이다.

아름답게 빛나는 수도원의 황금돔을 보기 위해 전세계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왔던 이 도시가 전화(戰火)에 휘말려 들었다. 자칫하면 쑥대밭으로 변할 판이 됐다. 수많은 민간인들의 희생도 우려된다. 국제사회는 힘을 모아 비극을 막아야 한다. 키이우의 봄을 찾아주어야 한다.

박영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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