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타임스

 


[북방문화와 脈을 잇다] 인류 최초 포도주 재료 재배… 잇단 분쟁에 反러시아 감정 팽배

프린트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스토리
인구 500만명 소국… 페르시아·러시아 지배 받았지만 독창적 문자 유지
와인, 단순한 술 아닌 민족 정체성으로 인식… 공산권 등 전세계로 수출
소련 민족분리정책 탓에 입하지아·남오세티아 분리독립으로 잇따라 충돌
[북방문화와 脈을 잇다] 인류 최초 포도주 재료 재배… 잇단 분쟁에 反러시아 감정 팽배
조지아의 유명 와인어리인 크바렐리(Kvareli) 와인하우스


통일한반도를 향한 한 걸음… 북방문화와 脈을 잇다
북방 프리즘 - 조지아: 와인과 민족분규(2)

와인은 조지아의 정체성이며 영혼이다. 조지아는 기원전 6,000년경 최초로 인류가 포도주를 재배한 유서 깊은 곳이며, 337년 아르메니아에 이어 두 번째로 기독교를 공인한 국가이다. 조지아는 20세기 들어 소련의 치하에 들어가 소련 공산당 서기장 스탈린(Joseph Stalin)과 냉전이 저물어가는 시기 소련의 마지막 외무장관이며 후에 조지아의 대통령이 된 정치인인 세바르나제(Eduard Shevardnadze)를 배출한 국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미국에서 자국 내 주의 명칭과 동일한 조지아가 일반인들에게 알려진 계기는 1963년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영화 아르고 황금대탐험(Jason and the Argonauts)의 배경이 되어서다. 본 영화는 그리스 전설에서 50인의 영웅을 일컫는 아르고가 황금양모를 구하기 위해 콜키스(Cholkis)로 향하는 모험을 그렸다. 그리스 전설에 나오는 콜키스가 현재의 흑해연안의 조지아이다.

조지아는 남코카서스에 위치하며 흑해를 통해 동유럽과 연결되며 러시아, 터키,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과 국경을 접하는 코카서스 지역의 길목을 점하는 위치에 있다. 이러한 지리적 위치로 조지아는 아르메니아와 함께 기독교 세계와 유럽문화의 동쪽 끝을 경계 짓는 국가라는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북방문화와 脈을 잇다] 인류 최초 포도주 재료 재배… 잇단 분쟁에 反러시아 감정 팽배
송병준

한국외대 국제지역연구센터

HK+국가전략사업단


공동기획
한국외국어대학교 HK+ 국가전략사업단
디지털타임스



조지아는 기원전 4세기경부터 왕국을 세워 번영하였으나 기원전 66년 로마에 점령당하였고 이후에는 페르시아 제국의 오랜 지배를 받았다. 5세기경부터 조지아의 수도가 된 트빌리시(Tbilisi)는 19세기 초 제정 러시아 시대에 코카서스 전역을 관할하는 총독이 거주하였던 곳으로 현재도 코카서스에서 관광과 문화의 중심도시이다.

조지아인들은 1184년부터 약 40여 년간 터키동부와 이란북부까지 영토를 넓히고 문화적으로 번성한 타마르 여왕(Queen Tamar the Great)이 재위한 조지아왕국(Kingdom of Georgia)을 황금기로 생각한다. 그러나 조지아는 짧은 전성기를 뒤로하고 13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몽골, 터키, 이란과 러시아의 지배를 받고, 20세기 초에는 소련에 점령되었다가 1991년 독립하여 현재에 이른다.

◇조지아의 정체성: 와인, 기독교와 문자

조지아인들의 와인에 대한 애정은 각별한데 와인은 단순한 술이 아니라 국가의 상징이며 민족의 정체성이다. 고고학적 조사에 의하면 조지아의 와인제조 역사는 적어도 8,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점토로 만든 큰 독인 크베브리(Kvevri)에서 발효하는 전통적인 와인제조 방식은 현재에도 이어져 2013년에 유네스코의 무형문화제로 지정되어 있다. 조지아에서 인류 역사상 최초로 와인이 탄생한 배경에는 일조량과 기후 등 최적의 기후조건과 포도재배에 적합한 질 좋은 토양으로 구성된 완만한 구릉지가 넓게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조지아에서는 오랜 와인의 역사로 포도덩쿨은 전통적인 건축과 회화는 물론이고 국가의 문양에도 새겨져있다.

와인산업은 핵심적 산업으로 공산주의 시절에는 몰도바와 함께 공산권의 주요한 와인 공급지였다. 공산주의 말기 1985년 당시 소련의 고르바초프(Mikhail Gorbechev) 서기장은 반알콜 정책을 강력히 시행해 보드카와 맥주와 함께 와인 가격을 인상하고, 판매제한 조치를 취해 조지아 와인산업이 한때 위기를 맞기도 하였다. 그러나 공산주의 붕괴 이후 와인산업은 조지아의 대표적인 산업으로 성장해 전국 각지에 수많은 소규모의 와인어리가 산재해 해마다 많은 방문객이 찾는다. 조지아 내에서는 수도인 트빌리시의 동부에 위치한 카헤티 주(Kakheti)가 대표적인 와인산지로 조지아 포도재배의 70%가 본 지역에서 이루어진다.

조지아 와인은 전 세계로 수출되지만 주 수출지역은 구 소련연방으로 러시아,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 벨라루스 및 라트비아 등이며 역시 공산권 국가였던 폴란드도 주요 수출국이다. 그러나 조지아는 유럽연합 회원국이 아니며, 유럽의 주요 와인 생산국에 비해 마케팅과 물류가 뒤처지고, 인지도도 낮아 가장 큰 와인시장인 서유럽으로의 수출은 미미하다.

조지아의 국기는 십자가를 모티브로 만들어졌고 국명은 성 조지(St. George)에서 유래 할 정도로 기독교는 조지아의 뿌리이다. 그러나 조지아 정교회(Georgian Orthodox Church)는 오래 동안 정교회 내에서 독립교회의 지위를 갖지 못하였다. 최근인 1989년 동방 정교회의 수장이라 할 수 있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총대주교청(Ecumenical Patriarchate of Constantinople)로 부터 독립교회로 인정되었다.

조지아는 2002년 조지아 정교회와 정부간 체결한 정교협약(Concordat)으로 교회의 특별한 지위가 보장되지만 세속국가로서 종교는 정치와 엄격히 분리되어 있다. 조지아 정교회는 동방 정교회(Eastern Orthodox Christian)의 시초로 2008년 역시 정교회 국가인 러시아와 전쟁으로 관계가 악화되었을 당시에도 양국의 정교회는 활발히 교류를 하였다. 이러한 정교회간 유대감으로 조지아 정교회는 러시아를 배제하고 유럽 및 미국과의 관계심화를 꾀하는 정부와 종종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조지아는 인구 500만 명에 불과한 소국이지만 고유한 언어를 갖고, 아르메니아와 더불어 알파벳과 키릴 문자와 무관한 독창적인 문자를 사용한다. 역사학자들은 조지아가 기원전 7세기경부터 고유한 문자를 사용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현대의 조지아 문자의 기원은 기원전 284년 고대 조지아 왕국의 국왕 파르나바즈 1세(King Pharnavaz I)가 그리스 알파벳을 참조하여 창제하여다는 것이 정설이다. 아르메니아의 고대 문헌에는 아르메니아 문자를 창안한 성직자이며 언어학자인 마슈토츠(Mesrop Mashtots)가 조지아 문자도 함께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조지아인들은 이를 부정한다. 조지아 문자는 조지아를 상징하는 포도나무 넝쿨을 모티브로 창제되었다는 설도 존재하며, 아름다운 조형미로 유명하다.

1959년 이스라엘의 베들레헴(Bethlehem)의 교회에서 430년 전에 새겨진 모자이크에 조지아 문자가 발견되어 최소한 5세기경에는 널리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조지아 문자는 11세기까지 시기를 달리하여 성직자들이 쓰는 문자가 추가되어 3가지 형태로 발전하여 현재까지 전해진다. 조지아는 전 세계 인구의 약 0.06%에 불과한데 페르시아와 러시아의 오랜 지배 속에서도 고유한 문자를 유지한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조지아 문자는 독창성과 역사성을 인정받아 2016년에 유네스코의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조지아는 유구한 역사로 특유의 건축양식이 유명한데 일찍이 기독교가 보급되어 교회 건축이 발달하였다. 10세기 무렵에 확립된 둥근지붕과 십자가 형태의 웅장한 외관으로 구성된 조지아 십자돔 양식(Georgian cross-dome style)은 이스라엘, 그리스와 불가리아 등 인근 국가에도 널리 보급되었다. 현재에도 조지아 전역에 전통적인 건축양식의 수도원과 교회 건축물이 산재한다.

◇정치적 안정과 친유럽 노선

조지아는 1991년 소련으로부터 독립 이후 쿠데타와 시민혁명을 겪으며 불안전하지만 서유럽식의 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를 유지하고 있다. 조지아는 독립직후 4년간 쿠데타로 혼란을 겪다 소련의 마지막 외무장관 출신 셰바르나제(Eduard Shevardnadze)가 집권하면서 안정을 찾았다. 그러나 세바르나제 정부는 무능과 부패로 2004년 장미혁명(Rose Revolution)으로 불리는 평화적인 시민혁명으로 붕괴되었다.

이후 시민혁명을 주도한 사카슈빌리(Mikheil Saakashvili)가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전면적인 경찰개혁을 진행하고 부정부패 단속과 관광산업 육성으로 경제성장을 기하였다. 그러나 사카슈발리 대통령은 재임 중 외교적 오판으로 2008년 러시아와 전쟁을 치루고, 집권 후반부로 접어들면서 부정부패로 국민의 신임을 잃어 2013년 선거 패배 후 우크라이나로 망명하였다. 이후 조지아는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코카서스 3국 중 가장 앞선 민주주의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다.

조지아는 1991년 소련으로부터 독립 이후 친미와 친유럽과 탈러시아정책을 표방하고 유럽연합(EU)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유럽연합은 터키 동부에 위치한 지정학적 요인, 정치경제적 낙후 그리고 본 지역에서 러시아의 영향력 등 다양한 요인들로 조지아를 포함한 코카서스 3국은 동반자 관계(partnership relation)로 남겨두어 가입을 배제하였다. 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 역시 국경을 맞댄 러시아를 자극하여 코카서스 전역에서 군사적 긴장을 유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실현 가능성이 희박하다.

이러한 현실을 인지하는 조지아는 유럽연합 보다는 미국과의 관계에 주력하여 폴란드 등과 함께 유럽 내 대표적인 친미국가로 지목된다. 이외에 조지아는 국경을 접하는 러시아와는 2008년 전쟁 이후 정치적 관계를 거의 단절하였다. 그러나 조지아의 에너지 다변화정책에도 불구하고 2018년 기준 천연가스의 약 50%가 러시아로부터 들어오고 관광산업도 러시아 관광객에게 크게 의존하므로 러시아와는 소원한 가운데 실리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또한 국경을 접한 터키와 아제르바이잔과는 에너지, 관광, 운송 및 무역 등 경제적 측면에서 교류가 활발하다.

조지아는 사실상 농업 이외에 별다른 산업이 없는데 2010년 이후 관광산업에 집중적인 투자를 하여 2020년 코로나 펜더믹 이전에 유럽에서 관광객이 가장 빠르게 증가하는 국가였다. 2006년 조지아의 관광객 수는 약 100만 명 수준이었는데, 2018-2019년 930만 명의 관광객을 유치하여 GDP의 7.5%를 점할 정도로 중요한 산업이 되었다.

◇민족의 용광로

조지아는 아르메니아와 유사하게 1990년대 초 독립과 함께 민족분규에 휩쓸려 정치적으로 큰 혼란을 겪었다. 조지아는 인구 500만에 불과해 유럽조지아는 아르메니아와 유사하게 1990년대 초 독립과 함께 민족분규에 휩쓸려 정치적으로 큰 혼란을 겪었다. 조지아는 인구 500만에 불과해 유럽의 아일랜드와 비슷한 규모이지만 민족의 용광로라는 표현이 걸맞게 다양한 민족이 거주하였던 지역이다. 이러한 역사로 북서부 흑해연안의 압하지아(Abkhazia) 그리고 북부의 남오세티아(South Ossetia) 지역은 러시아의 지원을 받는 소수민족이 사실상 반 독립상태에 있다. 또한 조지아 정부는 서남부 흑해연안에 거주하는 또 다른 소수민족인 아자리아인(Adjarian)의 독립을 저지하기 위해 아자리아 자치공화국(Autonomous Republic of Adjar) 지위를 부여하여 각별하게 관심을 기울인다.

아르메니아는 아제르바이잔 영토내 자국인이 거주하는 나고르노-카라바흐를 두고 아제르바이잔과 두 차례에 걸친 전쟁까지 벌이며 갈등이 이어지고 있다. 반면 조지아는 영토 내에서 러시아가 지원하는 압하지아와 남오세티아 내 소수민족의 분리독립으로 분쟁을 겪는다는 점에서 조지아의 민족갈등은 조지아와 러시아와의 충돌이라고 할 수 있다.

압하지아와 남오세티아는 모두 국제사회에서 조지아의 영토로 인정받고 있지만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고 실질적으로 러시아가 관할한다. 2014년 11월 러시아는 압하지아와 동맹과 전략적 동반자 관계 협정(treaty on alliance and strategic partnership)을 체결하여 안보는 물론이고 여러 인프라를 제공하고 있다. 이에 대응하여 2016년 조지아 정부는 현실적 방안으로 압하지아를 자치지역으로 결정하여 행정구역상 자국영토임을 주장하고 있다. 한편 조지아 정부는 남오세티아에 대해서는 기존의 행정구역인 츠한빌리지방(Tskinvali Region)으로 두고 별다른 지위부여를 하지 않고 있다.

압하지아와 남오세티아의 분리독립의 근본적 원인은 1921년 조지아를 점령한 소련의 민족분리정책에 기인한다. 조지아를 점령한 소련은 남오세티아를 자치주(Autonomous Oblast)로 분리하였고, 1931년에는 압하지아에게 자치공화국(autonomous republic) 지위를 부여해 민족간 연대를 차단하였다. 이후 1990년대 소련을 계승한 러시아는 압하지아와 남오세티아를 자국 영토인 북코카서스와 코카서스 3국이 위치한 남코커서스간 일종의 완충지역으로 삼아 영향권아래 두는 정책을 취하여 왔다. 따라서 조지아는 압하지아와 남오세티아 분쟁의 근원은 러시아의 지정학적 이해로 생각하며 궁극적으로 분쟁 대상국은 러시아라는 시각이 짙게 드리워있고, 반러시아 감정이 팽배하다.

◇압하지아 분쟁

압하지아는 기원전 9세기부터 고대 조지아 왕국의 영토였으며 기원후에도 조지아의 통치를 받았고 이후 조지아와 함께 오스만제국과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다. 조지아 역사학자들은 압하지아와의 오랜 관계를 들어 이들이 조지아인의 일파라는 주장을 통해 영토 통합의 근거를 제공하였다. 1991년 소련으로부터 독립후 조지아의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 감사후르디아(Zviad Gamsakhurdia)는 압하지아와 남오세티아의 완전한 통합을 주장하는 민족주의였다. 이에 1992년 8월 감하후르디아 대통령의 영토통합 정책에 위기를 느낀 압하지아 분리주의자들과 조지아간 무력충돌이 발생하였다.

13개월간 진행된 압하지아와 조지아간 충돌은 소련 붕괴 이후 독립국가연합 내에서 일어난 가장 격렬한 전쟁으로, 약 5,400여명이 사망 혹은 실종되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압하지아 분리주의자들은 본 지역인구의 절반을 점하는 조지아인에 대한 인종청소를 단행하여 25만여 명의 조지아인이 추방되었다. 이후 압하지아는 러시아의 비호하에 조지아의 통제력이 미치지 못하는 자치지역으로 남았다가 1999년에 독립을 선언하였다. 압하지아는 독립을 선언하였지만 산업기반이 전무해 러시아의 경제적 지원과 관광객만으로 재정을 유지하며 사실상 러시아의 보호 하에 있다.

2008년 조지아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러시아는 전격적으로 압하지아의 독립국 지위를 인정하였다. 당시 전쟁에서 패한 조지아의 사카슈빌리(Mikheil Saakashvili) 대통령은 압하지아 문제는 더 이상 조지아내의 이슈가 아니라 러시아와 나머지 문명국가간 대결이라고 주장하며 국제사회의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미국과 유럽국가들은 코카서스의 작은 국가 내에서의 내분으로 치부해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다만 국제사회에서는 압하지하를 조지아의 영토로 인정하고 러시아를 비롯한 일부 국가만이 독립을 인정하고 있다.

◇남오세티아 분쟁

조지아는 독립과 동시에 같은 기간 압하지아와 함께 남오세티아에서도 분쟁을 치렀다. 조지아 측의 주장에 따르면 남오세티아는 역사적으로 조지아 영토로 이란계 민족인 오세티아인이 19세기 이후 정주하였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남오세티아인은 자신들의 선조가 고대 이래로 코카서스 산맥 일대서 여러 타 민족과 함께 공존하였다고 한다. 양측의 거주기원 논쟁은 상이하지만 20세기 초까지 양민족간 통혼도 활발하고 별다른 충돌 없이 공존하였다.

그러나 소련의 붕괴로 조지아인과 오세티아인의 오랜 공존은 끝나고 생존권을 위한 갈등이 야기되었다. 1991년 조지아가 소련으로부터 독립하자 남오세티아 자치주(South Ossetian Autonomous Oblast)의 오세티아인들은 조지아로의 병합을 거부하면서 현지 조지아인과 갈등이 야기되었다. 1989년 소련의 붕괴 직전 남오세티아 인구의 67%는 조지아인이었고 오세티아인은 30%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오세티아인은 조지아로 병합시 추방 혹은 소수민족으로 전락한다는 위기감을 가졌다.

1991년 1월 조지아군은 남오세티아 수도 츠한빌리(Tskhinvali)로 진격하면서 양측간 교전이 발발하였다. 그러나 압하지아와 두 개의 전선에서 싸울 여력이 없는 조지아는 1992년 3월 러시아의 중재로 휴전을 맺었다. 본 전쟁으로 10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본 지역의 조지아 주민 23,000여명이 조지아로 피신하였고 오세티아 주민 4만여 명도 러시아로 이주하였다. 휴전의 결과 남오세티아에서는 조지아와 오세티아 반군이 영토를 양분하고 러시아군까지 주둔하면서 전쟁도 없지만 평화도 없는 긴장관계가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그러나 2007년 11월 압하지아와 뒤이어 2008년 8월 남오세티아 분리주의자들이 기습적으로 조지아인 거주 마을을 습격하였고, 이에 조지아는 군을 동원해 츠한발리에서 남오세티아 분리주의자들을 격퇴하였다.

남오세티아는 조지아의 영토이지만 사실상 러시아의 지원과 관할로 유지되는 곳이다. 러시아는 자국 영토 침범을 명분으로 정예군을 동원하여 조지아군을 몰아내고 조지아 국경을 넘어 스탈린의 고향 고리(Gori)까지 진격하였다. 결국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의 개입과 당시 프랑스의 사르코지(Nicolas Sarkozy)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중재에 나서 조지아에서 러시아군이 철수하면서 전쟁은 종료되었다.

2008년 조지아-러시아간 5일간의 전쟁은 남오세티아에서의 민족간 충돌에 기인한다. 그러나 이면에는 2004년 장미혁명으로 집권한 조지아의 사카슈빌리(Mikheil Saakashvili) 대통령의 노골적인 친서방 정책을 저지하고 남코카서스 일대에서 지정학적 이해를 고수하려는 러시아의 대응이라는 분석이 유력하다.


[ 저작권자 ⓒ디지털타임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