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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문화와 脈을 잇다] 고구려 기상 깃든 역사의 보고… 동북亞 미래 이끌 소통공간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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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비 있는 고구려 수도
장수왕 무덤으로 알려진 장군총에
화려한 유물 전시된 지안박물관도
고구려인 삶과 기상 엿볼 수 있어
한민족 고대·중세·근현대와 연관
우리 미래와도 무관하지 않은 지역
지정학적 가치 올바로 평가하고
북방의 기상으로 힘찬 미래 열어야
[북방문화와 脈을 잇다] 고구려 기상 깃든 역사의 보고… 동북亞 미래 이끌 소통공간 기대
유리누각으로 덮개가 씌워진 광개토대왕비.


[북방문화와 脈을 잇다] 고구려 기상 깃든 역사의 보고… 동북亞 미래 이끌 소통공간 기대
정보은

한국외대 국제지역연구센터

HK+국가전략사업단

통일한반도를 향한 한 걸음… 북방문화와 脈을 잇다

⑦세계문화유산으로 만나는 중국 - 지린성 지안의 고구려유적과 한반도·끝


지안시는 동북 3성 중 지린성의 가장 남쪽에 있는 도시로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의 자강도 만포시와 마주하고 있는 도시이다. 지안은 한민족에게는 역사적 의의가 매우 깊은 곳이다. 바로 고구려 국내성이 있던 '고구려 수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곳은 고구려 역사의 보고가 된다. 지안시 곳곳에는 크고 작은 고구려 관련 역사 유적들이 즐비하다. 고구려 2대 유리왕이 졸본성에서 이주하여 광개토대왕이 평양으로 천도하기 전까지 고구려의 왕성이 있던 곳이니 그러하다. 따라서 지안 시내에는 국내성과 시 외곽지역에 산성, 장군총, 광개토대왕비, 고구려 고분군, 오회분 5호묘를 포함한 고구려 벽화고분 그리고 지안 시내에 있는 고구려 발굴 유물을 전시해 둔 한국에서는 '고구려 박물관'으로 불리는 '지안 박물관' 등이 있다.국내성 북쪽 퉁거우(通溝)에 위치한 고구려19대 광개토대왕의 능비는 광개토왕의 훈적을 담고 있는 돌비석이다. 한국에서는 주로 광개토왕비, 광개토대왕릉비 등으로 불리고, 중국에서는 호태왕비로 불린다.

이 비석은 고구려사뿐 아니라 한국 고대사 최고의 금석문으로 평가받는다. 비는 대석과 비신으로 되어있고, 비신이 대석 위에 세워져 있으나 대석과 비신 일부가 땅속에 묻혀 있다. 비의 높이는 6.39m, 너비는 1.38~2.00m, 측면은 1.35m~1.46m로 불규칙하다. 네 면에 걸쳐 모두 1775자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일제에 의해 훼손된 부분도 있어 판독 여부가 불분명한 부분이 있고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풍화작용에 의한 마모된 정도도 매우 심각하다. 이 비의 존재는 용비어천가에도 나오며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오래되었지만 비가 세상에 드러난 것은 청나라가 봉금령을 해제한 19세기 말경이었고, 금석가들이 문자의 조형을 연구하기 위해 비의 탁본을 뜨는 과정에서 훼손됐다.

2012년에 지안시 마셴(麻線)향 마셴촌에서 또 하나의 고구려 비석이 발견됐다. 바로 '지안 고구려비'이다. 기존의 광개토대왕비와 비교하면 크기는 작지만 새겨진 내용이 유사해 '제2의 광개토대왕비'로 불려지기도 한다.

'지안 고구려비'는 2012년 7월 중국 지안시에서 발견된 뒤 2013년 1월 중국 국가문물국(문화재청에 해당)이 발행하는 '중국문물보'에 발견 사실이 처음 보도됐다. 당시 중국 쪽은 "비문에서 확인 가능한 글자는 140자이고, 주요 내용은 수묘제에 관한 것으로, 광개토왕이 세운 비로 여겨진다"고 발표했다.

'지안 고구려비'를 놓고 고구려인의 기원에 대해서 중국은 고구려가 중국 고대종족의 하나인 고이족이며, 건국 당시 현토군(중국 한나라 무제가 세운 한사군의 하나)의 관할 아래 정권을 세웠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한국 동북아 역사 재단 쪽은 이에 대해 "고구려를 중국 고대 지방 정권으로 보는 시각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지만, '지안 고구려 비'는 이런 이해가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비문 서두에 '시조 추모왕이 하늘과 신령의 도움으로 나라를 세웠고 그 나라가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고 천명하고 있다"며 중국 쪽 주장을 반박했다.

장군총은 고구려 왕릉 광개토대왕비에서 2km 떨어져 있다. 전체가 계단, 무덤방, 기단 세 부분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계단은 모두 7층이고 정교하게 다듬어진 화강암으로 쌓아 올렸다. 장군총에는 금동제의 머리꽂이, 금당 등의 유물이 발굴됐다. 장군총 무덤의 주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지만, 일본에 의해 제기된 장수왕의 무덤설이 가장 잘 알려진 내용이다.

오회분 5호묘는 지안시 통구 중앙에 있는 5기의 대형 봉토적석총 가운데 하나인데 오회분이란 5개의 무덤이 마치 투구를 엎어 놓은 것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안의 무덤 중 유일하게 내부를 공개하는 무덤으로 내부의 널방에는 사면에 사신도가 그려져 있다.
[북방문화와 脈을 잇다] 고구려 기상 깃든 역사의 보고… 동북亞 미래 이끌 소통공간 기대
한국에서 '고구려 박물관'으로 불려 지는 중국 지린성 '지안 박물관',


지안 박물관, 한국에서는 '고구려 박물관'으로 알려진 곳으로 지안에서 발굴된 고구려 유물을 전시한 2층 구조의 박물관이다. 관람객은 대부분 한국인이다. 그리고 중국 내 박물관 중에서 유일하게 입장료를 내고 관람을 해야 하고 관람 중에는 사진 촬영도 불가하며 공안의 감시를 받으며 상당히 불편하게 관람해야 한다. 우리 민족의 유물을 중국 공안의 감시받으며 관람 해야 하는 씁쓸한 느낌을 참아내야 한다. 내부 전시 유물은 고구려 북방의 기상을 한껏 발하는 웅장한 유물로 채워졌을 것이라는 생각과는 사뭇 다르게 세밀한 금세공으로 세련되게 만들어진 화려한 장신구와 생활용품이 많이 진열되어 있어 놀라움을 자아내게 한다. 한반도 역사에서 '금세공의 정수는 신라'라는 공식을 깨기에 충분하다.

중국 측 역사공정에 의하면, 고대 동북에는 상(商), 동호(東湖), 숙신(肅愼), 예맥(穢貊)같은 4개의 큰 종족이 있었는데 최근 연구에서 고구려는 은(상)계통이 사람이라고 확정했다. 이러한 주장은 발굴된 유물에 의해서 기인한 것이라고 한다.


몇몇 학자들은 고구려 문화와 은(상)문화 사이의 밀접한 관계에 주목했고 지린성 지안 경내 고구려 무덤벽화 가운데 용과 뱀의 그림, 기악비천, 복희여왜, 신농황제 및 4신 같은 그림과 형상은 염황문화의 내용을 표현한 것으로 그 외에도 많은 역사 문화의 구성 요소들이 중국 원시 본원 철학사상의 담고 있어 고구려인은 상인에서 나왔다고 주장한다.
"고구려는 상인(商人)이 건국하거나 상인이 중원으로 들어가기 전후 동북방으로 옮겨온 한 종족일 수 있다. 그러므로 고구려의 근원은 상인으로 5제 계통이고 염황문화의 후예이다." 라고 하는 이 내용은 '중국동북사' 1권 6장에 여러 문헌 자료를 인용하여 '고구려는 고조선이 아니다'라고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 주장에 의하면 고구려는 중국 최고의 나라였던 상(은)나라의 후예들이 세운 국가이고 고구려의 시조는 곧 한족이라는 의미이다. 결국 고구려인은 조선인이 아니라는 역사를 만들어 내었다.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은 통합과 관용의 리더십으로 한민족 최대의 전성기를 이끌어 냈다. 신라가 삼국의 통일을 이루어 냈지만, 실상 그 이전 고구려가 이미 신라, 백제와 북방의 소수민족을 아우르며 분권적 통일을 이루어 내었다. 이 사실은 이미 광개토대왕의 비문에 새겨져 있다. 우리의 역사가 한반도로 좁혀진 것은 식민사관과 한반도 분단, 그리고 중국의 영향을 받은 '소중화의식' 때문인지 모른다. 과거 조선이 지향했던 국가의 이념적 정체성을 중심으로 도의정치를 실현하는 것이었지만 실상은 본질보다는 형식만이 추구했고 지배층은 소중화의식에 함몰되어 기형적인 형태로 변모했다. 한민족의 기원을 단군보다는 기자를 더 받아들이고 기자로부터 우리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믿어 제사까지 지냈다. 과학과 기술, 무와 상업을 비천하게 여겨 오로지 문만을 중시했고 한자와 한문을 알아야만 지식인으로 대접받고 출세할 수 있었으며 스스로 만든 세계적인 문자인 한글인 언문을 멸시하고 쓰지 않았다. 오로지 한자와 한문만이 그들 지배층에게는 문명이었으며 모르면 비문명자, 야만으로 치부했다.

따라서 중국이 세계관의 중심이고 중국을 벗어나면 야만인 것으로 간주했던 '소중화의식'에 매몰되어 있었고 그로 인해 우리는 우리의 북방을 점점 잊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고대의 한민족은 거대하게 북방을 경영했다. 우리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명확한 것도 불분명하게 각색되고 훼손되어지고 있지만 그 명확한 기록은 지린성 '지안'이라는 도시에 고스란히 남아져 있다.

한민족과 중국의 동북지역은 결코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는 특별한 관계다. 고대, 중세 뿐 아니라 근현대 역사를 통해서도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중국 동북지역에 대한 관심은 상당히 표피적이다. 이 땅에서의 과거 조상들의 웅장했던 역사를 말하지만 일시적인 감상적 표현일 경우가 많다. 근대 이후에는 일제 치하의 독립운동의 무대로 역사상 가장 치열한 삶을 살았을 그들이지만 이제 그 땅에서 지난 한 삶을 살아낸 사람들의 역사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다. 이 땅의 역사와 이곳 사람들이 겪었던 슬픈 역사는 그저 옛이야기일 뿐이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마저도 희미해져 간다.

그러나 동북지역은 근대 한민족의 흔적이 켜켜이 쌓여 있으며 현재도 조선족 동포들에 의해서 역사는 만들어지고 있다. 중국 동북지역은 두만강과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한반도의 반쪽인 북한과 맞닿아 있다. 쉽게 갈 수 없는 닫힌 공간이지만 휴전선을 통해 바라보는 북녘땅과 두만강 압록강 너머로 바라보이는 북녘땅의 느낌은 다르다. 중국 동북지역만이 우리에게 주는 특별한 선물이다.

또한 중국 동북지역은 한반도와 대륙을 연결할 수 있는 유일한 곳으로서 한민족이 대륙의 꿈을 안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땅이다. 그리고 중국 동북지역은 한민족이 숙명과도 같이 함께 껴안고 가야 하는 그런 곳이다.

21세기의 새로운 역사적 트렌드 속에서 중국 동북지역은 동북아시아의 미래를 견인할 소통의 공간이 될 수 있다. 북한의 문이 아직 굳건히 닫혀 있지만, 이 지역은 점점 주변 국가들이 관심의 대상이 된다. 머지않아 현실이 될 수 있을 동북아시아에서 새로운 질서가 전개되고 동북아시아 공동체의 비전이 가시화 될 때를 생각하면 지금 우리는 너무도 안일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중국 동북지역의 지정학적 가치를 올바로 평가하고 이곳에 사는 조선족 동포들 과의 좋은 관계성은 미래로 나가기 위한 비전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아직 중국 동북지역에 대한 관심은 표피적이고 조선족 동포들과는 여전히 갈등이 있다. 근대 이후 이곳에서 이루어진 한민족의 역사와 광복 후 이곳에 정착해 중국의 '공민'으로 살아온 그들의 삶에 마음으로 다가가 보는 자세가 필요할 듯하다. 이렇듯 동북지역은 한민족의 고대와 중세 그리고 근현대 역사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고 우리의 미래를 논할 때도 켤코 무관하지 않다. 이곳은 역사의 굽이마다 한민족이 겪은 희로애락이 점철된 삶의 터전이고 역사이며 한반도와 북방과 연결되는 맥이며 북방문화의 교차로이다.

화려한 현재를 살고, 찬란한 미래를 구상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과거 역사의 부침에 대한 깊은 반성과 이해는 화려한 현재를 사는 것과 찬란한 미래를 꿈꿀 수 있게 하는 동력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북방 민족, 특히 한반도와는 과거, 현재, 미래가 밀접하게 연결 되어 있는 곳, 동북은 한민족에게 한반도 북방의 기상을 다시 상기시키는 역할을 하므로 우리가 새로운 시선, 새로운 해석으로 사려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 맥을 이어야 하는 곳이 되었다.

북방을 바람같이 누비고 다녔을 광개토대왕의 모습을 기억하며 그곳 동북에서 시작하여 더 멀리까지 북방의 기상을 한껏 발휘하며 힘찬 미래를 열어가는 '한반도의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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