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방문화와 脈을 잇다] 한반도-中 오가는 길목… 동북3성 정치·군사·물류 중심지로 부상

조선 말기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한인들 이주 20만 '조선족' 이뤄
현재도 한국 투자기업 다수 진출
북·러시아·몽골 국경 맞대고 있어
중국의 군사·정치적 영향력 행사
금융·유통 등 분야 대외개방 추진
동북아 물류기지로 도약위해 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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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11-15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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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문화와 脈을 잇다] 한반도-中 오가는 길목… 동북3성 정치·군사·물류 중심지로 부상
북방기마민족의 이동식 텐트의 모양을 본떠 만든 선양고궁과 이슬람교와 라마교의 양식이 보이는 서탑. 일러스트 윤소영

[북방문화와 脈을 잇다] 한반도-中 오가는 길목… 동북3성 정치·군사·물류 중심지로 부상
정보은

한국외대 국제지역연구센터

HK+국가전략사업단

통일한반도를 향한 한 걸음… 북방문화와 脈을 잇다

⑦세계문화유산으로 만나는 중국 - 전략적 요충지, 선양의 발견(3)


중국 랴오닝(遼寧)성의 성도(省都)인 선양은 역사적으로나 지정학적인 위치로나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 도시다. 선양은 역사적으로 위나라, 수나라, 당나라 때에는 고구려에 속했으며 창춘, 하얼빈과 더불어 한때 고구려와 발해의 중심도시였고 1625년부터 1644년까지는 청나라의 도읍이었다. 조선 말기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는 가난과 일제의 학정을 피해 많은 한국 사람들이 선양으로 이주하여 지금의 20만 이상의 '조선족'이 되었다. 이들은 주로 19세기 말부터 선양의 '서탑(西塔)' 지구에 몰려 살았으며 1992년 이후에는 이 '서탑'을 중심으로 기업인, 주재원, 중소상인, 학생 등 약 2만여 명의 한국 교민들이 모여들어 세계적으로 유명한 코리아타운을 형성하며 생활하고 있다. 현재 선양은 동북 3성의 정치·군사·외교·경제·물류의 중심지로 부상하고 있으며 한반도로 통하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공동기획

한국외국어대학교 HK+ 국가전략사업단

디지털타임스




중국 랴오닝성을 대표하는 두 도시로는 성도인 선양과 발해만의 다롄(大連)이 있다. 그 가운데 다롄이 중국 속 일본으로 불릴 만큼 일본의 투자기업이 밀집해 있다면 선양은 중국 속 한국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한국 투자기업이 많이 진출해 있는 곳이다. 선양은 총면적 1만2948㎢이며 서울시 면적의 약 21배 크기로 인구 약 820만 명의 동북 3성을 대표하는 최대 중공업 도시로서 베이징, 상하이, 텐진, 충칭과 함께 중국 5대 도시에 포함되고 다섯 번째 직할시(현재 4개의 직할시) 승격 가능성이 있는 도시를 거론할 때 가장 먼저 등장하는 지역이다.

선양은 500년 전 청(淸)태조 누르하치에 의해 건국된 후금(後金)과 그의 아들 청태종 황타이지(皇太極)가 세운 청나라의 초기 수도다. '선양 고궁(瀋陽故宮)'은 청나라 초대 황제 누르하치가 1625년에 착공해 그의 아들 2대 황제 홍타이지가 이어서 1636년에 완공한 궁으로 200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으며 현재 선양 고궁박물관으로 공개되고 있다. 이곳 선양 고궁은 청 나라 초기에 세워진 선양 고궁의 동쪽에 위치한 대정전(大政殿)과 우익왕과 좌익왕 및 팔기(八旗)의 건물로 이루어진 십왕정(十王亭)이 북방 기마민족의 이동식 텐트를 본뜬 건물형식이다. 몽골족·만주족·한족의 건축양식이 모두 융합되어 있어 북방 지역 건축의 기백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청 태종 홍타이지의 무덤인 북릉, 청 태조 누르하치(努爾哈赤)의 무덤인 동릉 등은 이곳이 만주족의 옛 역사가 있던 곳임을 알게 한다. 중국 역사상 만주족 청나라는 바로 이곳을 발판으로 하여 가장 큰 영토를 차지할 수 있었다. 선양은 헤이룽장성의 하얼빈, 지린성의 장춘을 베이징과 연결해 중원으로 진입하는 동북 3성의 길목이 된다.

요양(遼陽), 안산(鞍山), 무순(撫順), 본계(本溪), 철령(鐵嶺) 등은 선양을 중심으로 반경 100km 내에 있는 위성도시들이다. 요양을 비롯한 안산은 옛 고구려의 전략적 요충지로 고구려 '천리장성'의 핵심에 해당하는 곳이다. 천리장성은 고구려가 당나라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631년(영류왕 14년)에 축조를 시작한 성으로 삼국사기에서는 요동 만주 벌판의 부여성 (중국 길림성 농안/창춘)에서 동남쪽으로 바다까지 1천여 리에 걸쳐 지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요하 하구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성을 축조하는 데는 무려 16년이 걸려 647년에 완공됐다. 선양의 개모성과 무순의 현도성 및 신성, 등탑의 백암성, 해성의 안시성 등은 천리장성의 대표적인 성이다. 그리고 발해만 끝에 있는 대련의 비사성까지 이어지는 이 천리장성은 연개소문이 당나라에 맞서 요동을 지키기 위해 쌓은 성이었다. 특히 안산과 무순은 중국 최대의 철광 산지로 철광산업이 발달한 곳이다. 고구려가 수·당과 맞서 이곳을 지키려 한 이유는 바로 철 때문 인지도 모른다.

선양의 지명은 시 주변을 흐르는 혼하(渾河)의 옛 이름 심수(瀋水)의 북쪽에 있다는 뜻인 '심수지양(瀋水之陽)'에서 유래한 것으로 발해가 심주라는 이름을 쓴 게 최초로 이 지역 지명에 '심'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이며, 이후 심주, 심양 등의 이름을 사용하였다. 이곳은 과거에는 고조선을 거쳐 고구려 영토였으며 고구려의 개모성이 있었다. 고구려 멸망 후에는 당나라가 이 지역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했고, 이후 발해가 이곳을 차지하여 심수의 이름을 딴 심주(瀋州)를 설치한다. 이후 명나라 대까지 심양으로 불리다가 만주족이 세운 후금이 점령하고 수도로 삼았고 '묵던'(Mukden)이라는 만주어로 도시 이름을 고쳤다. 묵던은 중국식으로는 성경(盛京)으로 불렸다. 이때 세운 궁전이 선양의 고궁이다. 1644년 청나라군이 북경에 입성한 후 성경은 수도로서의 위치를 상실했고, 1657년 다시 봉천부(奉天府)로 개명하며 사실상 만주족의 고향으로 남았다. 이곳은 처음에는 만주 일대를 신성시하는 청나라 조정의 방침에 따라 한족의 출입이 금지되었으나, 이후 러시아와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기 시작하면서 땅을 뺏기게 된 청나라가 급하게 출입금지를 해제하여 사람들을 만주에 살도록 하자마자 한족을 비롯한 여러 민족의 사람들이 펑톈(선양)으로 들어왔다. 1900년 전후의 대한제국은 간도와 만주에 대해 제국주의적 집착을 보이기 시작했고, 급기야 펑톈 일대에 군대를 보내 만주 지역의 청나라군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는 사건이 발생하여 청나라는 15,000명 정도의 군사를 만주에 파견하였고 대한제국이 일본 제국에 의해 무력화될 때까지 간도 지역의 실질적 통치권은 대한제국이 행사하게 되었다.

이 도시의 이름인 선양(심양)-펑톈(봉천)의 지명은 정치적 혼란과 맞물려 개명이 반복되었다. 20세기 초에는 북양군벌, 장쭤린-장쉐량으로 이어지는 '봉천 군벌'의 근거지가 되어 1929년 6월 3일, 국민당의 2차 북벌이 행해지고 북양정부의 수도 베이징이 위협당하자 장쭤린은 펑톈을 북양 정부의 새로운 수도로 선포하여 며칠 동안 중국의 수도가 되었으나 장쭤린이 6월 4일 열차 폭파로 사망하고 동북역치(東北易幟)가 일어나면서 무산되었다.

1929년에 장쭤린이 관동군이 일으킨 황고둔 사건으로 폭살당하면서 뒤를 이은 장쉐량은 도시명을 펑톈에서 선양으로 복구시켰으나, 1931년 일제가 만주사변으로 선양을 점령한 후 다시 펑톈으로 만들었다. 지명 자체가 만주족과 일본인들에 의해 강제로 개명된 것이기 때문에 과거에는 한족 출신 선양 시민들은 펑톈(봉천)이란 지명에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슬픈 역사를 지닌 이름이다.

오늘날 선양은 820만의 인구를 가진 동북지방의 정치·군사·경제·문화·교통의 중심도시다. 1980년대까지 선양은 일제강점기에 건설된 공업기반을 바탕으로 중국의 군수산업과 중화학공업을 선도해왔다. 하지만 중국 동·남부 연해지역에서 시작된 개혁개방의 흐름에 쉽게 부응하지 못했고, 그 결과 1990년대 후반부터 선양의 경제는 기울기 시작했다. 국영기업을 중심으로 수많은 기업들이 도산하여 선양지역 기업들의 대규모 구조조정으로 이어져 대량 실업 사태가 일어나 한때는 노동자들의 집단소요가 발생하는 등 지역이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러나 2003년부터 중국 중앙정부가 '서부 대개발'에 이어 중국판 균형발전전략인 '동북진흥전략(東北振興戰略)'이란 새로운 경제발전 계획을 추진하면서 중국 동북지역의 경제가 과거의 비효율에서 벗어나 성장 궤도에 들어서게 되었다. 현재는 광저우와 선전의 주강(珠江)삼각주, 상하이와 쑤저우, 항저우를 중심으로 한 장강(長江)삼각주, 베이징과 톈진의 보하이(渤海)만 경제권에 이어 중국의 제4대 경제 성장축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이렇듯 동북진흥전략의 중심에 있는 도시가 선양이며 선양 주변 100㎞ 범위 내 안산, 영구, 요양, 철령 등 인근 8개 도시(총면적 7만5000㎢, 인구수 2000만 명 이상)는 '선양경제구'라는 거대 도시권으로 재탄생하고 있는 중이다. 2009년부터는 다롄(大連)을 국제물류 기지로 육성하는 것을 축으로 하는 랴오닝 연해경제벨트와 창춘(長春)-지린(吉林)-투먼(圖們)을 연결한 '창지투' 개발 프로젝트가 가동되면서 하얼빈·창춘· 선양·다롄 등 동북 3성 주요 도시를 잇는 고속철이 개통되는 등 교통 인프라도 대거 확충됐다. 덕분에 선양은 동북 3성 물류기지로 비약적으로 발전하며 두 자리 수 성장세를 이어갔다.

선양에는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코리아타운인 '서탑'이 있다. 상하이의 민항취, 룽바이 지역, 베이징의 왕징, 하얼빈의 샹팡취, 산둥성 칭다오의 청양취와 스난취, 창춘의 계림로와 목단가 그리고 광동성 선전의 아오위안쥐 등 한민족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중국의 대도시에는 코리아타운이 많이 생겨났는데 그 중 선양의 서탑이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청 태조 누르하치는 선양에 도읍을 삼고, 고궁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탑을 세웠다. 서탑은 그중에 하나다. 지금의 서탑은 1998년 문화대혁명 시기에 파괴되었던 것을 복원한 것이다. 이슬람교와 라마교의 영향을 받은 듯 보이는 하얀색으로 된 불탑이며 탑의 뒤편에는 사원이 있다.

남탑은 '신발 시장', 동탑은 '비행장', 북탑은 '버스역'이라는 저마다 도시에서 명확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서탑 하면 상징적으로 떠오르는 것은 바로 '한국'이다. 서탑을 중심으로 약 10만이 넘는 조선족들이 거주하고 있기 때문인데, 일제 강점기에 평톈(봉천)으로 불렸고 서간도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국밥집이 하나둘씩 생겨나면서 조선인들의 상권이 형성되었다고 하기도 하고 20세기 초부터는 펑톈으로 조선인들의 이주가 시작되면서 지금의 서탑 주변으로 모여들어 거주했다고도 하며, 20세기 초 '안씨'라고 하는 조선인이 서탑 아래에서 처음 농사를 짓게 되면서 조선인들이 점차 모여들어 마을을 이룬 것이라고도 한다.

선양과 그 주변 도시는 특히 경상도 및 평안도계 조선족들이 대거 모여 사는 곳이기도 하고 서탑은 한국인가게, 북한식당 (평양관-모란관) 등이 한글 간판으로 장식한 상가가 가득 들어서 있다. 이곳 조선족들은 초등학교부터 고등중학교까지 조선어로 언어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또 많은 탈북민들도 선양에서 은신하며 살고 있고 탈북민이 아니더라도 북한 사람들이 많이 살기도 하지만 북한에 대한 제재가 심해지기라도 하면 또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최근 중국 경기 둔화세가 짙어지고 있는 가운데 선양은 과거 국유기업 중심의 경제를 개혁하고 서비스, 금융, 물류·유통 등 분야에서 대외개방을 추진하며 동북아 물류기지로 발돋움하기 위해 전력 질주하고 있다. 그리고 근대 1905년 러일전쟁 당시 제정 러시아와 일본의 30만 대군이 격돌한 지상전의 주 무대도 선양이었다. 당시 선양은 다. 북한, 러시아, 몽골과 국경을 맞대면서 동북아 지역에서 중국의 군사·정치적 영향력을 투사하는 동북 3성 지역의 군사를 책임지는 중국의 7대 군구 중 하나인 선양군구(軍區)의 중추도시인 선양은 예로부터 중국 동북지역의 군사 전략적 요충지였으며 지금도 선양은 북방의 군사 요충지다.

여러 가지 면에서 한반도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선양에는 과거 한반도 고구려의 영광과 조선의 눈물이 스며들어 있고 지금도 한반도의 맥이 흐르고 있다. 전혀 낯설지 않은 선양에서 미래 대한민국의 활발한 움직임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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