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타임스

 


[북방문화와 脈을 잇다] 교육으로 민족정신 고취… 식민지배 속 독자적인 근대화 이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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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탄투척·암살 등 무장투쟁과 달라
역사기록 적어 현대인들 관심 낮아
국학자·조선어학회 등 단체활동 활발
일제 탄압에도 주민들 삶 변화시켜
자디드 운동가, 교육 개혁부터 시작
문맹퇴치·연극 공연으로 사상 전파
韓-중앙亞, 젊은 지식인들 노력 비슷
선각자들 피땀 어린 성과 기억해야
[북방문화와 脈을 잇다] 교육으로 민족정신 고취… 식민지배 속 독자적인 근대화 이끌어
무슬림 보수주의자들에게 자디드 운동은 배척의 대상이었다. 중앙아시아 무슬림 근대운동이었던 자디드 잡지 물라 나스렛딘 표지.


통일한반도를 향한 한 걸음… 북방문화와 脈을 잇다
⑤ 중앙亞, 과거를 넘어 미래로 - 한반도 민족 계몽·중앙亞 자디드 운동(8)


중앙아시아와 한반도의 공통된 역사적 경험 가운데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외국의 식민 지배를 경험했으면서도 독자적인 근대화를 이룩해왔다는 점일 것이다. 문맹 퇴치, 전통 사회의 구습 철폐와 함께 근대화된 사고방식의 습득을 위해 벌인 사회 문화 운동은 한반도와 중앙아시아 모두 식민 치하 민족정신을 일깨워 결국 독립을 이루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번 주에는 20세기 일본과 러시아의 식민지배 속에서 사회 개혁을 추구한 우리의 민족 계몽운동과 중앙아시아의 자디드 운동에 대해 살펴본다.
공동기획
한국외국어대학교 HK+ 국가전략사업단
디지털타임스




지난주 우리 정부의 요청과 카자흐스탄 정부의 화답으로 항일 독립전쟁의 지도자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봉환되었다. 작년은 봉오동, 청산리 전투 100주년이었고, 비록 코로나19로 간소하게 치러졌지만 정부 주도로 기념식도 열렸다. 이렇게 독립 전쟁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어 홍범도 장군을 비롯한 독립군 인사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도 시도되고 있다. 드라마, 영화 등이 제작되어 대중의 관심도 높다. 그러나 이러한 무장투쟁과는 달리 우리 민족의 삶의 질을 개선하기 위한 내적 투쟁, 즉 자강 운동에 대해서는 점차 관심이 식어가는 듯하다.

일본의 식민지배 강화로 한반도에서 무장 독립 투쟁이 실질적으로 성과를 거두기 어려운 상황에서 당시 많은 인사들은 독립군에 자금을 제공하는 한편 스스로 강해지자는 자강 운동을 벌였다. 역사학계에서는 '계몽운동' 혹은 '민족문화운동'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식민 치하 사회 개혁을 부르짖은 문화 운동은 비록 독립군이나 폭탄 투척, 요인 암살 등의 무장 투쟁과는 달리 역사적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경우가 많고, 그에 따라 현대인들의 관심도 상대적으로 높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북방문화와 脈을 잇다] 교육으로 민족정신 고취… 식민지배 속 독자적인 근대화 이끌어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수감되어 옥사하신 국학자 이윤재 선생 묘비.



출처:한들

하지만 민족문화운동 혹은 계몽운동은 인재양성 및 대중 교육을 통해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근대화를 이끌어 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무엇보다 민족 계몽운동이 1915년 대한광복회 설립과 1917년 '대동단결선언'으로 '공화주의'를 표방하고 국민국가의 수립을 목표로 했다는 점에서 향후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민족 계몽운동가들은 무엇보다 교육을 중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교육은 엘리트 교육과 대중 교육으로 나뉘는데, 국가지도자 양성은 고등교육기관의 설립과 운영을 통해서, 대중에 대한 교육은 언론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특히 식민 치하에서 민족 정신을 지키기 위해 우리 역사를 연구하고, 우리 말과 글을 교육하기 위한 국학자들과 조선어학회 등 단체의 활동은 맞춤법의 확정, 사전의 편찬과 함께 조선어 강습회 및 농촌계몽운동으로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는 1930년대 초 언론사 등을 중심으로 한글 보급을 통해 문맹퇴치를 추구한 브나로드 운동으로 이어졌다.

한편 1920년대부터는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으로 많은 독립 운동 및 계몽 운동가들이 일제의 식민지배 타파와 '계급투쟁'을 동일시하기 시작했다. 1925년 조선공산당이 조직된 이후 기존의 계몽-민족 운동노선과 함께 신간회를 구성하게 되었다. 1930년대에는 소규모 그룹이 조직되어 노동, 농민, 형평, 여성, 학생 운동 등을 전개했다. 특히 1940년대 학생조직은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상황에서 독립군과 유사한 조직 체계를 갖추었던 것으로 보인다.

[북방문화와 脈을 잇다] 교육으로 민족정신 고취… 식민지배 속 독자적인 근대화 이끌어
조선어학회에서 발간하려 했던 조선말 큰사전 원고



출처:국가기록원

그러나 이러한 민족 계몽운동은 일제의 탄압을 받기 일쑤였다. 1920년대 온 국민이 십시일반으로 모금운동을 진행한 민립대학설립운동은 결국 일제의 허락을 받지 못하고 좌절되었다. 매년 5000명이 넘는 학생들이 참가한 브나로드 운동은 1835년 조선총독부의 명령으로 금지되었다. 우리 말을 연구하고 가르쳐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던 조선어학회는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해산되고 학자들은 옥고를 치렀는데, 그 가운데 이윤재, 한칭 같은 분들은 일제의 고문 끝에 옥사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글이나 우리 역사에 대한 교육과 계몽 운동은 실제 일제치하 한반도 주민들의 삶을 변화시켰고, 무엇보다 민족 정신을 고취함으로써 독립과 그 이후 역사 발전에 이끄는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1865~1868년에 걸친 러시아의 침략으로 식민지로 전락한 중앙아시아의 역사적 경험 역시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제의 식민지배 아래 놓인 한반도와 마찬가지로 러시아의 식민지가 된 중앙아시아에서 무장 투쟁은 한계가 있었다. 오히려 우리의 자강 운동과 같은 사회 내적인 근대화를 추구하는 움직임이 컸다. 이를 가리켜서 '자디드(Jadid) 운동' 혹은 '자디드주의(Jadidism)'라고 일컫는다. '자디드'라는 용어는 페르시아어로 '새로운'이라는 형용사에서 비롯되었다. 무엇보다 19세기 세계적인 격변의 시기에는 '신식', 즉 '근대식'을 뜻하는 '우술-이 자디드(Usul-i Jadid)'라는 표현이 유행하면서 중앙아시아 무슬림 근대주의자들을 지칭하게 되었다.


'자디드'들은 중앙아시아 대중들의 삶에 근대라고 하는 새로운 형태의 삶의 방식을 정착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들은 서구 열강의 식민지의 처지가 된 다른 지역 지식인들의 유사한 근대화 운동의 영향을 통해 영감을 얻었을 수 있었다.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 뿐 아니라 오스만제국, 이란, 이집트 등 국가들의 근대주의 사상이 투르키스탄(Turkestan) 지역, 즉 러시아 치하 중앙아시아 지역에도 전파되었다. 특히 중앙아시아의 자디드들은 같은 러시아의 지배를 받던 흑해 북안 크림반도와 돈강-볼가강 유역에 있던 타타르인들의 영향을 짙게 받았다. 몽골제국의 후예로 15세기 중반까지 러시아의 전신격인 모스크바 공국을 압도하던 타타르인들은 이후 볼가강 유역의 중심도시 카잔(Kazan)과 아스트라한(Astrakhan), 그리고 크림반도 지역에 근거지를 둔 정치집단으로 나뉘었고, 16세기에는 각각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에 복속하게 된다. 이후 러시아의 지배를 받게 된 타타르인들은 19세기 근대화의 물결 속에 러시아와 오스만 측의 근대화 프로그램에 영향을 받아 무슬림 근대화 운동의 시초가 되었다.
[북방문화와 脈을 잇다] 교육으로 민족정신 고취… 식민지배 속 독자적인 근대화 이끌어
중앙아시아 자디드 운동의 대표적인 인물 압두라우프 피트라트 (가운데)

자디드들의 근대화 운동은 학교 교육의 개혁에서부터 비롯되었다. 타타르 출신 무슬림 근대주의자였던 이스마일 가스피랄리(Ismail Gaspirali, 러시아어 표기로는 가스프린스키 Gasprinskii)가 주창한 '신식' 학교는 러시아령 중앙아시아 지역에서도 곳곳에 창설되었다. 기존의 이슬람 성직자를 배출하기 위한 교육기관인 마드라싸에서 쿠란과 이슬람 신학서를 아랍어나 페르시아어로 암송했던 전통 방식과 달리, 수학·지리·역사 과목과 구어인 투르크어를 가르치는 '신식' 교육이었다. 1917년 러시아의 볼셰비키 공산혁명 발생 직전에는 약 100곳의 신식학교에서 1만명에 가까운 중앙아시아 무슬림들이 근대적 지식을 배웠고, 그 가운데 함자(Hamza), 오이벡(Oybek)과 같은 우즈베키스탄 현대문학가들이 배출되었다.

또한 중앙아시아의 자디드 운동가들은 언론을 통해 대중들에게 근대화의 소식을 전하려 했다. 이를 위해 구어인 투르크어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마치 일제 강점기 조선어학회의 학자들이 우리 말과 한글을 통해 문맹을 퇴치하려 했던 것처럼, 중앙아시아 지식인들도 문어인 아랍어나 페르시아어가 아닌 투르크어를 현대화하여 문학어로 삼으려 했다. 당시 오스만 제국에서 쓰이는 투르크어인 오스만어와 중앙아시아-투르키스탄 지역에서 쓰인 투르크어를 뜻하는 차가타이어는 달랐다. 그러나 그 중간 연계자 역할을 자처한 타타르 지식인들에 의해 두 투르크어 방언은 연결되었다.

이러한 통합 투르크어가 발전하면서 이스마일 가스피랄리가 출간한 신문 '번역가(Tercuman)'는 중앙아시아에서 널리 읽혔다. 이외에도 '투르크의 땅(Turk yurdi)'이나 '사이라(Sayra)'와 같은 투르크인들의 단합을 호소하는 이른바 '범투르크주의(Pan-Turkism)' 잡지들도 중앙아시아에서 유통되었다. 중앙아시아 자디드들도 스스로 '거울(Oyna)', '투르키스탄의 목소리(Sadoy Turkiston)' 같은 신문, 잡지를 발행하여 자신들의 목소리를 냈다.

문맹 퇴치와 근대화 교육과 함께 연극의 공연은 자디드 운동의 주요 활동 영역이었다. 당시 중앙아시아 자디드 문학가 베흐부디(Behbudiy)의 '부친살해(Padarkush)'는 1911년 희곡으로 발표된 이후 연극으로 중앙아시아 곳곳에서 공연되었다. 무슬림 사회의 근대 교육에 대한 무관심과 그에 따른 무지의 만연을 고발하는 이 작품은 당시 중앙아시아 청년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계몽 운동이 더욱 확산되는 데 결정적인 불씨가 되었다. 이외에도 압두라우프 피트라트(Abdurauf Fitrat) 같은 사상가·문학가들도 계몽적 내용의 희곡을 집필하여 연극으로 상연했다.

이렇게 학교와 잡지가 다양한 무슬림 근대화 운동가를 생성하고 그들의 사상을 전파하는 통로가 되었다면, 이후에는 문학 써클 등 다양한 형태의 조직이 구성되어 보다 적극적인 근대화 운동이 이루어졌다. 1910년대 투르키스탄 동부 페르가나 출신으로 우즈베키스탄을 대표하는 근대시인이었단 출폰(Cho'lpon, 본명은 압둘 하미드 술래이만)은 '대화(Gap)'이라는 써클을 만들고 활동했다. 역시 페르가나 동쪽 끝에 위치한 안디잔(우즈벡어 표기로는 Andijon)에는 '진보주의자들(taraqqiyparvarlar)'이라는 그룹이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이외 대학 등 고등기관의 설립을 위해 중앙아시아 근대주의자들 역시 노력했다. 이를 위해서는 당시 부유층들의 도움이 절실했다. 예를 들어 1917년 자디드 운동가들의 모임에서 페르가나 지방에 고등기술학교 설립의 필요성을 역설했는데, 당시 부호로 알려진 아흐마드벡이라는 인물이 거액을 기부함으로써 자금 문제를 해결하게 된다.

이러한 자디드주의 즉 근대화운동에 대한 중앙아시아 무슬림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지식인들과 실업가들은 자디드 운동에 적극 호응했다. 하지만 중앙아시아에서 역사적으로 엘리트의 지위를 누려왔던 무슬림 종교 지도층은 근대주의자들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자신들의 특권이 이슬람이라는 종교에 대한 지식을 근본으로 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학문과 지식을 추구하는 자디드들을 위협세력으로 간주했다.

식민통치자였던 러시아 정부에서도 자디드 운동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이들의 주장을 통해 중앙아시아인들의 민족주의가 발흥하여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반란과 독립을 추구하지는 않을까 두려워했다. 특히 오스만-타타르 지식인들의 영향이 이른바 범투르크주의나 범이슬람주의로 확대될 것을 우려했다. 결국 1915년 대대적인 정부의 탄압에 따라 자디드 신문과 잡지들은 줄줄이 폐간되었고, 좌절한 자디드들은 혁명을 포함한 정치적 해결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자디드들이 선택한 정치적 방향 역시 각양각색이었다. 1917년 소비에트 공산혁명이 발생하자 몇몇은 소비에트 공산혁명 정부에 가담하였다. 하지만 많은 수의 자디드들은 중앙아시아 독립을 추구했다. 그러나 구 러시아 제국의 중앙아시아 총독부가 위치해 있던 타쉬켄트(Tashkent)에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 자디드들이 꿈구던 중앙아시아의 독립 계획은 산산조각나고 말았다. 소련 성립 초기 높이 평가를 받던 자디드 출신 공산주의자들도 1930년대 스탈린에 의해 숙청되고 만다. 이른바 '민족주의자 자디드'와 그 '잔존분자'에 대한 숙청 작업은 2차 세계 대전을 거쳐 1953년 스탈린 사망 시까지 계속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굴곡 때문인지 1991년 소련이 붕괴되고 중앙아시아 5개국이 독립할 때까지 자디드들의 발자취는 크게 거론되지 않았다. 단지 독립 이후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자신들의 근대화를 위해 노력한 이들을 기리기 시작하면서 재조명되었다.

과연 이러한 자디드들의 활동에 대해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역사학자들은 자디드들의 성공보다는 실패에 주목하는 것 같다. 다양한 스펙트럼과 목표, 그리고 이들이 꿈꿨던 서로 다른 근대의 모습이 오히려 근대화 운동이 통일되지 못하고 분열되는, 그래서 공산 혁명 이후 소련 정부에 각개 격파되어 버린 점을 지적한다.

그러나 오히려 이러한 자디드들의 노력과 현실의 괴리감은 일제 치하 한반도의 계몽 운동가들을 떠올리게 한다. 전통 사회의 파괴자로 손가락질 당하면서도 식민 정부의 핍박을 받았던, 그러면서도 교육, 언론, 그리고 그룹 결성을 통해 식민지로 전락한 고국의 근대화와 사회 개혁을 위해 힘썼기 때문이다.

한국과 중앙아시아의 민족문화운동은 식민지배 속에서 민족의 근대화와 발전을 통해 민족 정신을 고취하고 궁극적으로 독립을 꿈꿨던 젊은 지식인들의 노력이라는 공통 분모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자강운동은 20세기 치욕의 역사를 겪은 한반도와 북방지역 사이 혹은 식민지배를 경험했던 다른 지역을 아우르는 역사의 보편성을 보인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무엇보다 1945년 한반도의 독립, 1991년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독립의 바탕에 자신의 민족을 세계 어느 국가에 견주어 부끄럽지 않은 국제 감각과 현대적 자체 발전 역량을 갖춘 사회로 만들고자 하던 '선각자'들의 피땀 어린 노력이 있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북방문화와 脈을 잇다] 교육으로 민족정신 고취… 식민지배 속 독자적인 근대화 이끌어
이광태

한국외대 국제지역연구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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