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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문화와 脈을 잇다] 기득권 지닌 귀족 개혁, 군사력 증강·조세 개편으로 외세에 맞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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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산업화 등 19세기 격동의 시기
조선 - 중앙亞 국가지도자 정책 유사
흥선대원군, 삼군부 신설 무력 장악
비변사 없애고 서원도 대부분 폐지
아미르 나스룰라, 부족 수장들 견제
유럽식 신식군대 '사르바즈' 창설
자주성·외국문물 선별적 수용 필요
[북방문화와 脈을 잇다] 기득권 지닌 귀족 개혁, 군사력 증강·조세 개편으로 외세에 맞서
흥선대원군(오른쪽)과 아미르 나스룰라(왼쪽)는 19세기 서구열강의 침입에 맞섰다는 측면에서 공통점이 있다. 일러스트 윤소영

[북방문화와 脈을 잇다] 기득권 지닌 귀족 개혁, 군사력 증강·조세 개편으로 외세에 맞서
흥선대원군의 지시로 강화도의 광성보 등 포대의 총병과 포병이 증강되었다.

통일한반도를 향한 한 걸음… 북방문화와 脈을 잇다

⑤ 중앙亞, 과거를 넘어 미래로 - 열강에 맞선 조선·중앙亞의 지도자(7)


한반도와 북방지역 사이 문화적 접점을 찾기 위해 중앙아시아의 역사를 살펴보는 '중앙아시아: 과거에서 미래로' 시리즈도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다. 이번주와 다음주는 19~20세기 근현대 시대 한반도와 중앙아시아의 공통된 역사적 경험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근대화의 물결과 식민 지배 아래 놓였던 중앙아시아 사람들이 갖던 고민을 한반도의 우리 민족도 인식하고 있었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아이디어 역시 다르지 않았다. 특히 19세기 중엽 아시아에 영향력을 확대하던 세계 열강에 맞서 조선의 흥선대원군, 중앙아시아의 아미르 나스룰라 같은 국가 지도자들은 나라를 지키면서도 생존을 위한 변화를 추구했다.

공동기획

한국외국어대학교 HK+ 국가전략사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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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는 세계적 격동의 시기였다. 전반기에는 유럽 전역에서 증기기관을 기반으로 산업화가 진행되었다. 영국에서 건설되기 시작한 철도는 프랑스나 독일에도 도입되었다. 러시아의 경우 철도는커녕 증기기관을 통한 산업혁명 역시 아직 싹을 틔우는 단계에 불과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나폴레옹 체제가 붕괴하고 러시아와 영국 사이 이른바 '거대한 게임' 혹은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이라는 유라시아 전역에 걸친 전략적 경쟁 관계가 형성되고 있었다.

중앙아시아는 이러한 '거대한 게임'의 중심부에 있었다. 칭기스 칸의 후예들이 '칸'의 권위를 가지고 다스리던 '우즈벡 칸국'은 18세기 유목 부족 집단의 도전을 받아 붕괴되었다. 이후 여러 지역에 걸쳐 부족 집단을 기반으로 부하라, 코칸드, 히바 칸국과 같은 왕조들이 생성되었고, 이들은 자체적으로 경쟁하면서 영토의 확장을 꾀했다. 이러한 중앙아시아의 혼란스러운 정국을 틈타 시베리아에서부터 러시아가, 그리고 인도로부터는 영국이 영향력을 확대했다.

이들이 '거대한 게임'을 펼친 이유를 살펴보면, 영국의 입장에서는 러시아의 팽창에 맞서 영국령 인도를 방어하기 위해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 중앙아시아, 중국의 신장, 티베트의 현지 정권을 연결하려는 전략적인 고려가 바탕에 있었다. 러시아는 시베리아 동쪽 끝까지 길게 뻗은 영토 내 거주하는 무슬림들을 장악하고 이들의 반러시아 움직임을 억제하기 위해서라도 영국의 영향력을 차단하고자 했다. 특히 빠른 산업화로 경제적으로 우월했던 영국산 물품들은 이미 인도에서 중앙아시아로 수입되고 있었다. 이를 차단하는 동시에 중앙아시아를 신흥 러시아산 제품의 시장으로 삼으려 했다.

이러한 러시아와 영국 사이 '거대한 게임'이 전아시아적 규모였던 만큼 중앙아시아 뿐 아니라 조선 역시 이러한 세계적인 정치·경제 변혁의 흐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1842년 아편전쟁 이후 청나라가 급속하게 쇠퇴하고 영국 등 유럽열강의 세력 확대와 러시아의 남하에 속수무책으로 굴복하면서 조선의 위치는 매우 중요해졌다. 특히 1854년 일본을 개항시킨 미국이, 1858년 프랑스의 베트남 침공 이후 프랑스가 동아시아의 식민지 및 시장 개척에 뛰어들면서 조선 역시 서구 열강의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렇게 세계적인 정치-경제적인 변화의 흐름 속에서 중앙아시아와 조선의 대응이 유사했던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중앙아시아의 패자(패者)로 부상한 부하라(Bukhara) 망기트 왕조의 지도자 아미르 나스룰라와 조선의 어린 국왕을 보좌한다는 명목에 실질적으로 국사를 좌우한 흥선대원군의 정책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먼저 조선의 경우를 살펴보면, 근래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에 대한 역사적 인식과 평가는 점차 바뀌고 있다. 이전에는 쇄국정책을 대표하는 인물로 여겨졌었다. 그러나 '쇄국'이라는 용어가 일본에서 유래했을 뿐 아니라 구한말 '쇄국정책'이라는 역사적 개념 자체가 일본의 식민사학에서 유래했다는 인식이 점차 강조되고 있다. 대신 대원군이 추구했던 '부국(富國)'의 목표와 이를 이루기 위한 정책의 실체를 분석하는 데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중앙아시아 부하라 칸국의 아미르 나스룰라(Amir Nasr Allah, 재위 1827~1860)는 흥선대원군과는 달리 직접 군주로서 왕조를 통치했다. 그러나 그 역시 후대 역사가들에 의해 '악당'으로 종종 묘사되어 왔다. 영국 등 서구권에서는 1842년 영국령 인도 정부에서 파견한 2명의 외교 사절을 처형한 사건으로 인해 아미르 나스룰라를 폭군으로 규정했다. 20세기 소련의 역사가들은 그에게 '도살자'라는 별명을 붙이고 이를 대대적으로 확대 유포했다. 이는 중앙아시아의 전통 사회를 '폭정'이 난무한 '후진적' 사회로 규정하면서도, 러시아의 식민 역사를 '근대화'로 미화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근래 현지 사료를 분석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아미르 나스룰라 역시 대내적으로 스스로 부족한 정통성을 보충하기 위해 개혁을 추구했고, 대외적으로는 외세의 침입에 맞선 군주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두 사람의 정책은 다음과 같은 면에서 유사점을 보인다. 첫째, 두 사람 모두 당시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귀족들을 개혁하려 했다. 둘째, 외세의 영향력을 인지하고 국가를 방어하려 했다. 셋째, 외세에 맞서기 위해 군사력을 키웠고 이를 위해 사회 개혁과 조세 제도의 개편을 추구했다.

흥선대원군의 경우 원래 철종 사후 당시 권력을 장악했던 안동 김씨 가문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추대했던 고종의 아버지였다. 그는 왕가의 계통으로나 개인적 행실로나 명문 세가의 권력에 해가 되지 않을 만한 인물로 여겨졌다. 하지만 고종이 즉위하면서부터 대원군은 기존 세도 문벌들의 권력 구조를 깨뜨리기 위해 다양한 개혁을 추진했다. 먼저 삼군부(三軍府)를 만들어 무력을 장악했다. 그리고 안동 김씨들이 실권을 장악하던 비변사(備邊司)를 폐지하고 의정부(議政府)에 자신을 지지하는 인사들을 배치함으로써 명문세가들의 권력 기반을 약화시켰다. 또한 또한 전국 1700여 개의 서원(書院) 가운데 일부를 제외하고 폐지했는데, 이 역시 선비들이 붕당을 이루어 정치를 좌우한 구습을 혁파하기 위한 것이었다.

중앙아시아의 아미르 나스룰라 역시 역시 당시 권력의 상층부를 구성하던 부족 집단 출신 귀족들의 권력을 약화시키고자 노력했다. 그는 1827년 선왕의 사망 이후 형제들과 계승 투쟁을 벌였다. 다른 형제들이 수도 부하라 시민들과 농경민들을 지지 기반으로 했던 것과 달리, 아미르 나스룰라는 대대로 조정에서 높은 관직을 누려왔던 유목민을 포함한 우즈벡 부족 집단의 지지를 받았다. 그 결과 무력으로 부하라에서 다른 형제들의 도전을 물리치고 왕좌에 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집권 후에는 조정 대신의 직위를 차지한 부족 수장들의 권력을 축소하려 했다. 이를 위해 왕의 비서실장 혹은 총리 격이었던 쿠쉬베기(Qushbegi, 또는 코쉬베기Qoshbegi)의 직에 있던 무함마드 하킴이라는 자를 통해 귀족들을 견제했다. 무함마드 하킴은 당시 러시아와의 무역을 행정적으로 규제함으로써 이를 통해 부를 축적한 부족 수장 출신 귀족들을 약화시켰다. 이후 점차 무함마드 하킴의 권한이 커지자 이번에는 아미르 나스룰라가 그를 제거하고 친정(親政) 체제를 구축하게 된다.

둘째, 외교정책에 있어서도 조선의 대원군과 부하라의 아미르 나스룰라는 서로 비슷한 정책을 펼쳤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두만강 유역 접경지 관리 문제 등을 통해 프랑스, 러시아, 미국 등 서양의 강대국과 접촉한 대원군의 외교 정책을 보면 단순한 쇄국 정책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학계의 중론이다. 오히려 서양 강대국을 잘 알고 교섭을 통해 국익을 실현시키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병인양요의 원인이 되었던 병인사옥은 프랑스 선교사들의 정치 개입에 따른 조선의 대응으로 평가된다. 미국과는 제너럴 셔먼호 사건 이후 조난선 문제에 오히려 미국에 우호적인 입장이었던 것이 당시 외교 문서를 통해 드러났다. 러시아와의 국경 문제에 있어서도 당시 러시아 영토로 도주하여 정착한 조선인들의 송환을 각서까지 써주면서 치밀하게 진행되는 데에서 쇄국정책과 상반되는 모습을 보인다. 실학파의 사상적 흐름 속에서 개화론자로 간주되는 박규수(朴珪壽) 같은 인물을 통해 적극적인 외교를 펼친 것도 대원군이었다. 이렇게 대원군의 주도면밀한 외교술은 청나라의 '해국도지(海國圖志)'와 같은 서적을 통해 습득한 서양에 대한 지식을 기반으로 가능할 수 있었다.

물론 대원군 집권 후반기로 갈수록 대원군파에 속하는 고위직 인사들 가운데 기존 명문세가인 안동 김씨 출신 인사들의 발언권이 커지면서 조선의 외교정책이 위정척사로 기울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1860년 북경 함락 이후 서양 국가들에 대한 경계심과 우려를 갖고 있던 조선의 입장에서 볼 때, 국내정치에 개입하고 강화도를 포격하는 등의 서양 열강들의 조치가 적극적인 반외세 정책을 촉발시켰다고도 할 수 있다.

중앙아시아 역시 러시아와 영국 사이 세계적인 패권 경쟁의 무대였던 만큼 서양 강대국의 압력을 받았다. 아미르 나스룰라는 1842년 영국 사절단을 처형하여 오명을 얻었지만, 당시 자료를 분석해보면 아미르 나스룰라의 극단적인 정책은 1839년부터 수년간 지속된 영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프가니스탄과 국경을 맞닿은 부하라는 아프가니스탄을 무력 점령한 영국 측 스파이를 경계할 수밖에 없었고, 영국의 침략 의도에 대해 의심한 결과 영국 사절단을 처형하는 데 이르렀던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몇 년 앞선 1830년대 초중반 부하라를 방문한 영국 사절단에 보여준 우호적인 태도는 아미르 나스룰라가 외국에 근본적인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이외에도 각기 다른 시기 부하라를 방문한 영국, 러시아인들의 기록에서 당시 부하라 측에서 보인 환대와 함께 중앙아시아에서 서양에 대한 관심과 지식이 지속적으로 증대되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셋째, 대원군과 아미르 나스룰라는 외교술 뿐 아니라 근대화된 신식 군대를 건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대원군이 추구한 국방력 강화는 총포의 개발과 총수의 양성에 집중되었다. 총포의 사용이 전쟁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 것은 이미 임진왜란 시기 경험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오랜 평화의 시기 가운데 조선에서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총병-포병을 양성한 것은 19세기 후반부터였다. 1866년 병인양요를 겪은 이후 대원군은 총병과 포병, 즉 포군의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전국에 3만 명에 가까운 총병-포병이 배치되었고, 강화도에만 3천명이 넘는 병력이 배치된 진무영(鎭撫營)을 설치하여 외국 함선이 서울로 들어오는 입구의 방어를 강화했다.

이러한 총병-포병부대를 확대하기 위한 국가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관세를 강화하고 호포법을 실행하는 등의 정책을 펼쳤다. 특히 기존의 상민층에 과세되던 군포제도를 확대하여 양반층에도 세금을 부과했다는 측면에서 호포범의 시행은 사족층의 특권을 철폐하려는 시도와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중앙아시아의 경우 아미르 나스룰라는 유럽식 신식군대 사르바즈(Sarbaz)를 창설한 것으로 유명하다. 당시 오스만 제국과 카자르(Qajar) 페르시아에서 운영 중이던 니잠이 자디드(Nizam-i Jadid)라는 군대를 본 따 만든 신식군대로 특히 압둘사마드('Abd al-Samad)라는 페르시아 출신 장교를 영입하여 지휘를 맡겼다. 비록 페르시아나 러시아에서 포로로 잡혀 끌려온 자들 위주로 구성된 부대였지만, 영국 및 러시아 군대의 훈련법을 도입했다는 점에서 당시로는 획기적이었다. 보병과 포병으로 구성된 사르바즈는 이후 코칸드(Khoqand) 칸국과 같은 다른 중앙아시아 왕조를 정복하는 데 활용되었다. 무엇보다 당시 중앙아시아 군사력의 대부분을 담당하고 있던 부족 집단 출신 기병들을 기반으로 권력을 휘둘렀던 귀족층을 견제하는 효과가 컸다.

이렇게 19세기 중엽 유럽 열강의 식민지 확대에 맞서 대원군과 아미르 나스룰라는 오랜 기간 이어져 내려온 자신들의 국가를 지키려 했다. 후대 역사가들은 이들이 추구한 자주 정책이 당시 이미 세계적으로 대세가 된 근대화 흐름에 역행하는 것이었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이들 국가지도자들은 주권을 빼앗기지 않으면서도 변화하는 서양 문물을 이해하고, 또 신식군대를 포함하여 일부 제도는 선별적으로 받아들이려 했다. 이러한 자주성과 외국 문화나 문물에 대한 선별적 수용은 사실 오늘날 우리에게도 꼭 필요한 태도이다. 무엇보다 19세기 서구에서 비롯된 근대화라는 파도에 당당히 맞선 경험을 공유한다는 측면에서 한반도와 중앙아시아 사이 또 다른 역사적, 문화적 접점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북방문화와 脈을 잇다] 기득권 지닌 귀족 개혁, 군사력 증강·조세 개편으로 외세에 맞서
이광태

한국외대 국제지역연구센터

HK+국가전략사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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