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타임스

 


[북방문화와 脈을 잇다] 유교 활용 통치효율성 극대화… 2000여년간 동아시아 패권국 군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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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221년 진시황 이후 1911년 신해혁명까지 시스템 유지
1800년 청제국 1인당 GDP, 영국·프랑스 등 서구 최강국 압도
과거제로 관료 선발 정당성 확보… 교통망도 통치장치로 작용
[북방문화와 脈을 잇다] 유교 활용 통치효율성 극대화… 2000여년간 동아시아 패권국 군림
중화제국의 권력자들은 유가적 통치술인 왕도를 찬양하며 법가의 패도성을 비판했지만, 수면 아래에서는 법가적 통치술이 공고히 작동했다. 실제로는 유가로 법가를 가리는 통치 행태가 일반적이었던 것이다.



[북방문화와 脈을 잇다] 유교 활용 통치효율성 극대화… 2000여년간 동아시아 패권국 군림
박홍서

한국외대 국제지역연구센터

HK+국가전략사업단

통일한반도를 향한 한 걸음… 북방문화와 脈을 잇다

④ 북방과 한반도 안보 - 중화제국은 어떻게 장기간 존속했는가?(2)


중화제국은 페르시아 제국, 로마제국, 오스만 제국, 대영제국 등과 비교해 장기 지속이란 차별성을 갖는다. 기원전 221년 진시황이 전국을 통일한 이후 왕조는 수없이 바뀌었지만, 천자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중화제국 시스템은 1911년 신해혁명까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중화제국의 강성함도 계속됐다. 중국은 2천여년 동안 동아시아 패권국의 지위를 잃지 않았다. 유럽 국가들과 비교해서도 뒤처지지 않았다. 오히려 1800년 청제국의 1인당 GDP는 서구의 최강국이었던 영국과 프랑스를 압도했다. 중화제국의 장기 지속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공동기획

한국외국어대학교 HK+ 국가전략사업단

디지털타임스




◇중화제국의 통치기술= 수많은 왕조의 부침에도 중화제국의 시스템 자체가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제국의 통치체제가 그만큼 효율적이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몽골족이나 여진족 등 이민족이 중원을 장악한 즉시 기존 통치체제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이를 반증한다.

중화제국의 구체적인 통치기술은 무엇인가? 프랑스의 비판이론가 미셸 푸코에 따르면, 지배권력의 통치술은 지배기술과 자아기술로 구분된다. 지배기술은 피통치자들에 대한 권력의 직접적인 통치술이며, 자아기술은 피통치자 스스로 통치하게 만드는 통치술이 된다. 일반적으로 통치행위는 이러한 지배기술과 자아기술이 혼합돼 이뤄진다.

중화제국 역시 다르다고 할 수 없다. 중화제국의 가장 기본적인 지배기술은 무엇일까? 역시 '폭력'을 빼놓을 수 없다. 중앙은 거대한 땅과 백성을 통치하기 위해서라도 힘이 있어야 했다. 힘이 통치의 충분조건이 아니더라도, 힘이 없으면 현실적으로 통치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중국의 경우 중앙의 힘이 약화될 때마다 어김없이 지방세력이 발호했다는 사실은 이를 시사한다.

중화제국의 권력자들은 유가적 통치술인 왕도를 찬양하며 법가의 패도성을 비판했지만, 수면 아래에서는 법가적 통치술이 공고히 작동했다. 실제로는 유가로 법가를 가리는(以儒飾法) 통치 행태가 일반적이었던 것이다.

한편, 중화제국의 통치시스템은 여러 가지 물리적 장치들에 의존한다. 대표적으로 한자는 그 대표적 장치 중 하나다. 표의문자인 한자는 다양한 방언이 존재하는 중화제국의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유용한 텍스트 장치로 기능했다. 황제의 칙령은 전국 각지의 엘리트인 관료와 향신들에게 정확히 전달될 수 있었다.

과거제 역시 중요한 장치라 할 수 있다. 과거제는 역사상 다른 제국에서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중화제국만의 특색을 갖는다. 과거제는 황제의 촉수를 선발하는 장치였다. 각양각색의 지방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중앙의 의지를 전달하고 집행하는 관료체계가 필수적이다. 중화제국은 과거제를 통해 이들 관료를 엄선했다. 그 실상이 어떻든 '공정한' 국가공무원 시험을 통해 선발된 관료들은 그만큼 피통치자들에게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중화질서 속 대표적 국가였던 조선에서 장원급제가 갖는 사회적 의미가 어땠는지를 상상해 보면 쉽게 이해되는 상황이다.

'사통팔달'로 표현되는 중화제국의 교통망은 또 하나의 통치 장치로 기능했다. 중화제국의 교통망은 주나라 때부터 역참제도가 갖춰지기 시작했으며, 진·한 시대에 들어서는 거의 완비되었다. 모든 도로마다 존재했던 역참은 군정과 행정을 총괄하는 기관으로 중앙의 명령을 신속히 지방 각지로 전달하였다. 완비된 도로는 유사시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서라도 필수적이었다. 결국, 제국의 사통팔달 도로망은 일종의 네트워크와 비슷했다. 전국으로 뻗은 도로는 네트워크의 수많은 링크였으며, 역참은 그들을 연결점인 노드였다.

중화제국의 통치는 이들 지배기술로만 구성되지는 않았다. 통치가 더 효율적이고 완비되고 위해서는 이들을 토대로 삼아 보다 효율적인 통치기술이 필요했다. 그것은 피통치자들 스스로 통치하게 만드는 자아기술이었다. 유교의 강점은 바로 이 지점에서 드러난다. 유교는 한무제 시기 동중서에 의해 국가이데올로기로 정립된 이후 청나라까지 그 위상을 잃지 않았다. 심지어 유물론을 신봉하는 사회주의 중국조차 유가의 핵심 덕목인 '덕치'나 '조화로움'을 강조한다. 공자의 육신은 2천 5백여 전에 사라졌지만, 그의 정신은 영생하고 있는 것이다.

[북방문화와 脈을 잇다] 유교 활용 통치효율성 극대화… 2000여년간 동아시아 패권국 군림
유교는 한무제 시기 동중서에 의해 국가이데올로기로 정립된이후 청나라까지 그 위상을 잃지 않았다. 심지어 유물론을 신봉하는 사회주의 중국조차 유가의 핵심 덕목인 '덕치'나 '조화로움'을 강조한다.

◇유교, 스스로 통치하게 하기= 자아기술로서 유교의 탁월함은 무엇인가? 유교가 최고의 인간형으로 설정한 '군자'의 정치적 의미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군자는 의(義)로부터 깨달음을 얻고, 소인은 이(利)로부터 깨달음을 얻는다"라는 논어의 구절은 의미심장하다. 군자는 소인에 비해 생각의 일관성을 갖는다. 소인은 이익을 추구하기 때문에 자신의 이익에 따라 어떠한 행동이라도 가능하다. 주군을 갈아치울 수도 있고 기존 사회체제를 변혁하려 들 수도 있다. 군자는 그렇지 않다. 의라는 것은 쉬 변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군자는 그만큼 체제수호적인 성향을 갖는다.

"군자는 홀로 있을 스스로 삼간다"라는 중용의 구절도 군자의 체제순응성을 드러낸다. 일반적으로 권력은 피통치자에 대한 일상적 감시를 통해 지배 효율성을 극대화하려 한다. 민주화된 국가라도 그렇다. 미국의 국가안보국이 인터넷을 면밀히 감시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런 측면에서 유교는 물리적 감시 장치를 아예 피통치자의 정신에 이식시킨다. 너희들은 군자이기 때문에 스스로 삼가야 한다는 논리를 끊임없이 주입시키는 것이다. 유교 경전을 학습하는 중국의 엘리트 계급은 일생을 체제순응적 군자가 되려고 노력하며, 반대로 소인을 격멸하도록 주체화된다. 막대한 영토와 인구에 대한 물리적 감시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에서 이러한 통치방식은 매우 뛰어난 가성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중화제국은 유교의 자아기술을 내치뿐만 아니라 대외관계에서도 구사하였다. 조선과 같은 중화질서의 핵심 구성국은 스스로 군자의 나라임을 천명하면서 상국인 중국에 대해 끊임없는 충성심을 드러내었다.

또한, 그들 국내정치에서도 유교를 활용해 통치효율성을 극대화하려 하였다. 1627년 인조반정 사례는 조선의 지배엘리트가 얼마나 유교 통치술을 내면화하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쿠테타 직후 반정세력은 인목대비 명의의 반정 교서를 내린다. 교서는 광해군이 재조지은을 망각하고 오랑캐 후금과 내통함으로써 예의의 나라인 조선을 '금수의 나라'로 만들었다고 성토하였다. 심지어 조선의 엘리트 계급은 명이 몰락한 상황에서조차 만동묘를 만들어 명황제를 기릴 정도였다. 그만큼 그들이 유교의 자아기술에 포획당해 있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주변국이 군자나라가 되려는 열망이 강할수록 중국은 힘들이지 않고 중화질서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만큼 주변국을 무력으로 복속시키는데 소요되는 재정적, 군사적 부담을 질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한나라 이후 중화제국의 통치자들이 과도한 힘의 투사를 경계했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렇다. 한무제는 후손들에게 제국의 과잉팽창을 경계하라는 유훈을 남겼다. 한무제는 재임 당시 흉노족에 대한 공격이나 고조선에 대한 한사군 설치 등 공세적 대외 확장을 추구했다. 그러나 그 결과 한나라의 재정상황이 악화되자 세력팽창이 결코 현명하지 못하다는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명나라가 30여년에 걸친 쩡허의 대원정을 영락제 사후 전격 중지한 배경에도 과잉팽창에 대한 경계가 있었다. 광대한 영토를 가졌던 원나라의 전성기가 불과 백년여에 불과했던 사실 역시 반면 교사가 되었을 것이다.

중화제국은 각종 담론들을 생산하고 유통시킴으로써 과잉팽창에 대한 자제를 정당화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이이제이'이나 '기미책' 그리고 '속국자주' 같은 개념들을 활용해 제국의 패권유지 비용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려 했다. 특히, 조선과의 관계에서 속국자주는 늘 그런 식으로 소비되었다.

19세기말 병인양요와 신미양요가 발발하자 서구 열강은 청에게 조선의 종주국으로서 문제해결을 해달라는 요구를 했다. 그러나 청은 '전통적으로 조선은 중국의 속방이지만 외교와 내치는 자주'라고 주장하면서 개입요청을 거부하였다. 속국이되 자주라는 일종의 형용모순에는 중화질서는 유지하되 패권유지 비용은 최소화하려는 중국의 실리적 태도가 드러난다.

물론, 그렇다고 중화제국이 항상 대외개입을 최소화하려 했던 것은 아니다. 중국의 사활적 이익이 걸린 문제가 발생할 경우 직접적인 군사개입이나 정치적 간섭을 통해 제국의 이익을 보호하려 했다.

예를 들어, 임진왜란 시기 대규모 군대를 파병해 왜군을 격퇴한 것은 소위 순망치한으로 표현되는 지정학적 가치를 지키기 위한 행태였다. 또한, 청일전쟁 직전 위안스카이를 조선에 보내 직할통치에 상응하는 내정간섭을 자행했던 사실도 마지막 남은 조공국 조선이 중화질서로부터 이탈할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한 행태였다.

◇중화제국의 관성= 중화질서의 현재적 의미는 무엇일까? 중국의 급속한 부상에 따라 많은 이들은 중국위협론을 주장하고 있다. 특히, 일각에서는 중국이 봉건시기 때와 같이 동아시아에서 위계적 국제질서를 추구할 가능성이 있다며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2017년 4월 미중 정상회담에서 시진핑이 했다는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다"라는 발언이 국내에서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미래는 열려 있기 때문에 지금보다 강성해진 중국이 주변국에 어떠한 모습을 보일지는 단언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주권 존중을 핵심 외교 원칙으로 강조하는 중국이 근미래에 타국의 주권을 노골적으로 침해할 가능성은 높아 보이지 않는다. 그러한 행위는 홍콩이나 신장, 그리고 타이완 문제에 있어 '내정간섭'을 강력히 반대하고 있는 중국 자신의 행태와 정면으로 배치되기 때문이다. 특히, 아편전쟁 이후 서구 열강에 의해 백여년간의 '민족적 굴욕기'를 경험하면서 주권을 신성시화하고 있는 중국이 타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은 명백한 자기모순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2천여 년 지속된 중화질서의 관성이 모두 소멸됐다고 볼 수는 없다. 차라리 중화질서의 규범이 근대 주권 규범과 어우러질 가능성을 전망해 볼 수 있다. 실제로 중국내에서 '신천하체계론'은 중요한 학술 담론으로 부상한 지 오래다. 이들은 주권국가로 분절된 근대 국제질서는 국가간 대립과 충돌이 일상적이며, 특히 일부 국가는 힘의 논리에 따른 패권을 휘두른다고 비판한다.

반면, 가-국-천하라는 연결구조를 갖는 중국의 전통적 천하관은 국제정치의 첨예한 무정부 상태를 극복할 수 있는 이론적 토대가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북방문화와 脈을 잇다] 유교 활용 통치효율성 극대화… 2000여년간 동아시아 패권국 군림
가-국-천하라는 연결구조를 갖는 중국의 전통적 천하관은 국제정치의 첨예한 무정부 상태를 극복할 수 있는 이론적 토대가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중국 정부도 공식적으로 유교와 연결된 대외관을 드러내고 있다. 후진타오 정권 시절 '조화로운 세계'를 강조한다거나, 현재 시진핑 정권이 일대일로 참여국들을 '운명공동체'라는 개념으로 포괄한 것 등은 천하관의 요소를 일정하게 포함하고 있기도 하다. 향후 실제 외교과정에서 중국이 현실주의적 행태를 보인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명분적으로는 중화질서의 규범을 현대적으로 변용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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