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방문화와 脈을 잇다] 러시아 역사의 중심에서 만나는 한국 독립운동의 기억

외세침략때 크렘린 지키는 요새 역할
1524년 세워져 황실여성 수도원 명성
영내 교회 수령·상류층 묘지 만들어
저명 음악인·우주인·옐친 등 안치
최고급 1묘역에 한국인 김규면 묘
봉오동전투 이끈 독립운동의 주역
혁명유공자로 훈장받아 부인과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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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4-05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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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문화와 脈을 잇다] 러시아 역사의 중심에서 만나는 한국 독립운동의 기억
[북방문화와 脈을 잇다] 러시아 역사의 중심에서 만나는 한국 독립운동의 기억

[북방문화와 脈을 잇다] 러시아 역사의 중심에서 만나는 한국 독립운동의 기억
이은경 한국외대 국제지역연구센터 HK+국가전략사업단

통일한반도를 향한 한 걸음… 북방문화와 脈을 잇다

③ 유라시아 역사문화 탐방 - 노보데비치 수도원(2)


기록하지 않으면 기억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인류의 역사에서 지나온 시간을 기억한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고대로부터 인류는 그림과 문자, 사진과 영상을 통해 끊임없이 기록하는 작업을 지속해왔다. 이런 노력은 건축물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건축은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종합예술로, 이를 통해 정치와 사회뿐 아니라 역사와 문화적 특성까지도 읽을 수 있다.

러시아에는 11개의 자연유산과 18개의 문화유산 등 총 29개의 유네스코 등재 유산이 있다. 이는 유네스코 세계 유산을 등재한 국가 중 9위에 해당하는 순위이다. 문화유산 중에는 상당수가 교회 건축물이다.

공동기획

한국외국어대학교 HK+ 국가전략사업단

디지털타임스




러시아인은 역사에서 중요한 과업을 이룬 순간마다 신께 감사하며 교회와 수도원을 지었다. 그중에서도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된 노보데비치 수도원은 우리에게도 뜻깊은 장소이다. 치열했던 러시아 역사의 한복판인 이곳에 놀랍게도 한국의 독립운동에 기여했던 한 인물에 대한 기억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러시아 역사의 굵직했던 순간들을 장식한 노보데비치 수도원 역사와 이곳에 안장된 한국인의 기억과 서사를 따라가 보는 것은, 향후 모스크바를 방문할 사람들에게 해당 장소의 역사적 의미와 한국과의 정서적 친근감을 연결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노보데비치 수도원은 모스크바의 대표적인 바로크 양식 건축이다. 17세기~18세기 유럽의 궁전과 교회 건축에서 자주 보이던 이 양식은 생동감이 있으며 극적인 효과가 특징적이었다. 다양한 색깔의 대리석과 화려한 도금 장식을 사용했으며 천장화(天障畵), 벽화 등의 시각적 효과가 두드러졌다. 러시아의 건축물들이 규모가 크고 화려한 것은 이러한 건축 양식 덕택이었다.

노보데비치 수도원은 1524년 모스크바 대공 바실리 3세가 러시아 서북부의 스몰렌스크를 탈환한 기념으로 건설되었다. 바실리 3세는 리투아니아가 점령한 스몰렌스크를 탈환하면 수도원을 건설하겠다고 서원했고, 이로부터 9년 뒤 이 기도가 실현되었다. 그는 수도원 건립을 위해 은 230kg과 3000 루블을 기부하고 영지를 하사했다. 노보데비치 수도원은 스몰렌스크의 성모 마리아 이콘인 '호데게트리아 성모(인도자 성모)'를 기리기 위해 설립되어 스몰렌스크 성모 수도원으로도 불린다. 수도원을 지은 건축가에 대해서는 크렘린의 아르한겔스키 교회를 지은 알레비즈 노비라는 설과 키지 섬의 프레오브라젠스카(예수변모) 교회를 지은 네스토르라는 설이 존재한다.

수도원 명칭에 관해서는 다양한 의견들이 있다. '노보데비치'라는 말은 '노보(새로운)'와 '데바(처녀)'라는 말의 합성어로, 타타르 몽골인이 킵차크한국으로 보낼 어린 소녀들을 이곳에서 선발했다는 전설에서 비롯되었다. 또는 1525년 봄, 바실리 3세의 명령에 따라 포크롭스키 수도원의 수녀 18명과 함께 이곳으로 이주해 온 최초의 여자 수도원장 옐레나 데보츠키나의 이름을 기려 지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소녀들을 위한 수도원이라는 데서 유래했다는 말도 있다.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말에 이르는 동안 황실과 귀족 가문의 여인들이 이곳에서 수도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노보'라는 접두어는 모스크바 크렘린 부근에 있던 스타로데비치 보즈네센스키 수도원의 '스타로(오래된)'와 구별하기 위한 것이었다.

수도원의 가장 중심건물인 스몰렌스크 성모 성당은 1524년부터 1525년에 걸쳐 건설되었으며 6개의 기둥과 5개의 돔 지붕으로 구성되어 있다. 수도원에는 스몰렌스크 성모 성당 이외에도 여러 교회들이 있는데, 대부분이 1680년대에 건설된 것들이다. 당시 모스크바 강 부근에는 여러 개의 수도원들이 연쇄적으로 늘어서 모스크바의 방어 체계를 이루고 있었는데, 노보데비치 수도원도 그 중 하나였다. 12개의 망루는 전쟁 시 요새를 겸해서 후방의 크렘린을 든든히 지키는 역할을 수행했다.

1km에 달하는 수도원의 웅장한 성벽은 주변의 자연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한다. 수도원은 16세기에서 17세기에 이르는 기간 조성된 벽화들과 모스크바 유파와 노브고로드 유파의 진귀한 이콘화들을 소장하고 있다. 이곳의 명물은 지성소와 회중석을 분리하기 위해 세워놓은 칸막이인 5층의 이코노스타스다. 최상단에는 구약시대의 족장들, 4층에는 선지자들, 3층에는 그리스도의 책형과 부활, 2층에는 그리스도를 가운데 두고 오른쪽에 성모, 왼쪽에는 세례요한 등의 삼체성상(三體聖像)을 비롯하여 미하일과 가브리엘 천사, 사도 베드로와 사도 바울이 그려져 있으며 1층에는 순교자와 성인, 사제들의 성상화가 질서있게 배열되어 있다. 동방 정교의 전유물인 이코노스타스는 15세기만 하더라도 4층 형태가 일반적이었으나 17세기 전반기에 이르러 5층 형태가 널리 퍼지면서 점차 그 크기가 높아지고 화려해졌다.

16세기에서 17세기에 이르는 동안에 노보데비치 수도원은 황실 가족과 명문 가문의 여인들이 삭발례를 올리는 장소였다. 1549년에는 이반 4세(1530-1584)의 딸 안나가 이곳에서 세례를 받고 1년 만에 안장되기도 했다. 이곳 최초의 황실 출신 수녀는 이반 4세의 동생이자 우글리치의 대공이었던 유리 바실리예비치의 미망인 이울리아니야 팔레츠카야였다. 이반 4세의 며느리였던 엘레나 세레메티예바 황태자비도 이곳에 유폐되었다. 1575년 이반 4세의 셋째 아들인 표도르 1세와 보리스 고두노프의 여동생 이리나가 혼인하였다. 명민한 보리스는 황실과 이반 4세의 총애를 받아 차르의 최측근이 되었고, 병약했던 표도르 1세 대신 실세를 쥐었다. 표도르 1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보리스와 이리나는 정적들의 표적이 되어 노보데비치 수도원으로 피신했다. 이후 보리스 고두노프는 바로 이 수도원에서 러시아 차르에 등극한다.

하지만 류리크 왕조 출신이 아니라는 것과 이전부터 지워진 주홍글씨가 계속해서 보리스의 발목을 잡았다. 1591년 우글리치에서 표도르 1세의 동생인 드미트리가 성내에 목이 베인 채 사망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 죽음의 배후로 보리스 고두노프가 지목됐다. 유력한 왕위계승자의 죽음이 보리스 고두노프에게 권력을 가져다주긴 했지만, 이것은 그에게 양날의 검이 되었다. 타타르 출신의 이방인이었던 그에겐 늘 정통성의 문제가 뒤따랐고, 게다가 이 무렵 모스크바에 대기근이 발생하고 내란과 폭동까지 이어져 궁지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죽은 드미트리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폴란드 왕과 가톨릭교회의 든든한 지원을 받으며 러시아로 진군해 들어왔다. 가짜 드미트리의 출현으로 보리스는 점점 수세에 몰렸다. 결국 1605년 뛰어난 정치가이자 개혁자였던 보리스가 급사하면서 7년간의 통치는 끝이 나고 만다.

러시아를 근대화하고 제국의 시대를 연 표트르 대제 역시 노보데비치 수도원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표트르 대제의 첫 번째 부인 예브도키야 로푸히나도 이곳에 유폐되어 삭발례를 당했다. 그의 이복형 이반 5세도 이곳에 오랫동안 유폐당해 있었다. 1682년 표트르 대제는 10살의 나이에 지적능력이 떨어지는 이반 5세와 공동차르에 등극한다. 표트르의 이복누이였던 소피야는 이들을 대신해서 섭정하다 훗날 차르의 자리를 놓고 표트르와 권력다툼을 벌인다. 결과는 표트르 대제의 승리였다. 소피야는 강제로 삭발례를 당한 후 노보데비치 수도원에서 15년을 지내다 생을 마감했다. 표트르 대제는 소피야를 지지한 반역자 1700명을 숙청하고 핵심 인물 세 명을 그녀의 처소 밖에서 처형한 후 그녀가 볼 수 있도록 창문에 목을 매달아놓았다.

창 너머로 민장(民章)을 든 채로 죽은 자신의 지지자들을 본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는 쉽게 짐작이 될 것이다. 아주 특별한 감옥에서 극심한 고통을 받았던 소피야의 모습은 일리야 레핀(Ilya Repin)의 그림 '소피야 황녀'(1879)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이 그림은 노보데비치 수도원에 유폐된 지 1년 후의 소피야를 그린 것으로, 탄식을 억누르며 분노를 참고 있는 긴장되고 초조한 모습의 소피야와 창문 너머로 어렴풋이 보이는 교수형에 처한 총기병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소피야의 극심한 고통 덕택에 수도원 벽이 마법의 힘을 얻었다는 전설이 있다. 소피야 탑이라고도 불리는 나프루드나야 탑을 방문하거나 탑벽에 기대어 소원을 말하면 모두 이뤄진다고 한다. 이곳에는 질병을 치유하고 행복과 기쁨을 되찾기 원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수도원 근처의 큰 못에는 신비한 분위기가 서려 있다. 얼어붙은 이 못 위에서 표트르 대제가 봉기를 일으킨 총기병들을 참수했고, 그 뒤로 살해당한 자들의 영혼이 사형집행자들을 찾아 끊임없이 저수지 주변으로 모여든다는 소문이 생겨났다. 또한 성소 주위로는 강제로 삭발례를 당한 죄수들의 유령이 나타나 총기병들과 달리 사람들에게 호의적으로 대하고 수도원에 갇힌 여인들을 도왔다고 한다. 수도원은 자선 단체의 역할도 했다. 1724년에는 군장교들을 위한 병원과 버려진 여아들을 위한 고아원이 세워졌다. 1812년 조국전쟁 당시 수도원에는 프랑스군 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모스크바에서 퇴각하기 전 나폴레옹 군대는 건물에 산재해 있던 지푸라기에 많은 양초를 던지고 화약통을 설치해 심지에 불을 붙였다. 이들이 자리를 뜨자마자, 수도원을 지키기 위해 찾아온 수녀들이 제때 이를 발견하고 불을 진압했다. 나폴레옹은 참새언덕에서 수도원에 불꽃이 피어오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방화가 실패로 돌아갈 경우 다시 시도할 심산이었다. 마침 수도원 근처에 살고 있던 한 주민이 이 계획을 알고 자신의 집에 불을 질렀다. 불꽃을 확인한 나폴레옹은 최종적으로 퇴각명령을 내렸다. 승리의 표식을 남기고 싶었던 나폴레옹의 계략은 실패했고, 수녀들과 시민들의 기지 덕택에 수도원은 오늘날까지 보존될 수 있었다.

16세기에 이미 수도원 영내에는 교회의 수령들과 상류사회 고위층들의 묘지가 생성되어 있었다. 19세기에는 이곳에 1812년 조국전쟁의 영웅들이 묻혔다. 이후로 고골, 체호프, 마야콥스키 등 문인들을 비롯하여 프로코피예프, 쇼스타코비치, 샬랴핀, 시닛케, 로스트로포비치, 흐보로스톱스키 등의 음악인, 우주비행사 가가린, 흐루쇼프, 옐친 초대 러시아 대통령 등의 저명인사의 묘가 안치되었다. 이곳은 미국의 CNN이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묘지 10위 안에 꼽히며, 모스크바 시민들이 즐겨 찾는 산책 장소이기도 하다. 러시아의 역사적인 인물들이 잠들어 있는 이곳에서 뜻밖에도 우리 선조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러시아 최고의 1급 묘역인 이곳 벽면묘지 제132구역에는 선명하게 김백추라는 한글 이름이 새겨져 있다. 백추 김규면(1880-1969)은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대한신민단 단장이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교통차장과 고려혁명군 참모부원 등을 역임하며 독립운동사에 많은 행적을 남긴 인물이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인사회당 결성을 주도했고 1927년에는 장개석의 반공쿠테타로 국민혁명이 좌절되자 연해주로 돌아와 블라디보스토크의 한 책방에서 동양서적 판매원으로 일했다. 말년에 외국문학 출판사에서 한글서적 번역 등으로 연명하면서도 항일무장투쟁 동료들을 도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의 현충원과 같은 위상의 장소에 그가 안장될 수 있었던 것은 1967년 볼셰비키 혁명 50주년 기념행사 때 혁명 유공자로 훈장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김규면 선생은 이곳에 부인 김 나데즈다와 함께 합장된 상태로 잠들어 있다.

노보데비치 수도원은 러시아 역사의 주요 순간을 기억하고 있는 건축기념비이다. 러시아 특유의 신비적 분위기가 서린 이곳은 고통스럽고 처절했던 역사의 순간들을 기억하면서 우뚝 서 있다. 유난히 아름다운 이곳이 가슴 시리게 다가오는 것은 한국의 독립을 위해 불철주야로 분투했던 선조들의 삶과 독립 운동사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죄책감 탓일 것이다. 모스크바의 한복판에서 한글로 쓴 묘비를 보노라면 국가와 민족에 대한 책임감으로 멀리 타지까지 가서 독립을 위해 애쓴 선조들의 노고가 그 어느 때보다도 뜨겁고 뭉클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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