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양수 칼럼] 독재는 `민족주의 피`를 먹고 자란다

박양수 수석논설위원

  • 프린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박양수 칼럼] 독재는 `민족주의 피`를 먹고 자란다
박양수 수석논설위원
해방된 지 75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우리에게 일제 식민시대의 고통과 굴욕의 기억은 여전히 현재형이다. 그래서 어떤 이를 지칭해 친일파(親日派)라고 하면 적어도 한국 내에선 가장 심한 욕이 된다. 친일파란 민족 반역자, 매국노 등의 의미와 동일시된다. 미국이나 중국과 친하게 지낸다는 의미의 친미(親美), 친중(親中)에서 느껴지는 말의 느낌과 결이 전혀 다르다. 상대를 더 심하게 모욕하고 공격하려면 '토착왜구(土着倭寇)'라고 몰아붙인다. 현 정치판에선 주로 여당과 진보 진영이 야당과 보수 인사를 공격할 때 자주 쓰인다. 지난 15일 광복절 기념식에선 고 백선엽 장군의 묘를 파내야 한다는 김원웅 광복회장의 주장에 세상이 뒤집어졌다. 잔불은 쉽게 꺼지지 않고 오래 갈 것으로 보인다.당장 국립현충원에 안장된 '친일 반민족 인사' 69명의 파묘를 내용으로 국립묘지법을 개정하려 들지도 모를 일이다. 그 와중에백 장군이 과연 독립군 토벌에 앞장 선 친일파냐를 놓고 계속 시빗거리를 만들지도 모른다.

문재인 정부 들어 토착왜구란 말이 더 자주 애용되는 건 우연이 아니다. 반일 민족주의를 내세운 좌파 세력이 보수진영 인사들을 꽁꽁 묶는 몇 가지 프레임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일본을 두둔하는 듯한 말이나 행동을 한 야당 의원들은 여지 없이 이 올가미에 걸려든다. 국민의 반일 감정을 이용한 일종의 '왕따 만들기'다. 황교안 전 자유한국당 대표, 나경원 전 원내대표가 그 희생양이 됐다. 심지어 윤미향 정의기억연대 전 이사장의 회계부실 비리를 폭로한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가 갑자기 '토착왜구'로 좌파의 공격 대상이 된 건 웃지 못할 넌센스다.

그렇다면 친일이 보수만의 전유물일까. 당연히 답은 '노(No)'다. 문 대통령조차 이 문제를 빗겨가지 못했다. 지난해 산케이신문의 서울특파원 구로다 가쓰히로 기자는 칼럼에 문 대통령의 딸 다혜 씨가 일본의 고쿠시칸(國士館) 대학에 유학했다고 밝혔다. 고쿠시칸 대학은 메이지 시대 이래 대륙 침략의 향도 역할을 한 겐요샤(玄洋社·현양사) 소속 인사들이 주축이 돼 1917년 도쿄에 설립됐다. 겐요샤는 몰락한 무사들의 결사단체로, 이들 중 몇 명은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에 직접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구로다는 "일반 국민과 마찬가지로 가족과 측근은 일본을 즐기고 있는데 대통령 본인은 친일 규탄에 열을 올리고 있다"며 "이를 '관제(官製) 민족주의'라고 비웃는 목소리도 들린다"고 비꼬았다. 사실 확인은 안 됐지만 한 국가의 대통령이 조롱 당하는 듯해 기분 나쁘다.

친일파 기준이 좌익이냐, 우익이냐에 따라 들쭉날쭉 달라지는 건 문제다. 우익 인사들에게 과도한 친일 기준을, 좌익 인사들에겐 엄격하지 않은 기준을 적용하는 등 이중잣대를 들이댄 게 원인이다. 민족문제연구소가 2008년 4월 펴낸 친일인명사전이 그러하다. 연구소는 일제 말기 징병을 권유한 글을 쓴 좌익 계열의 여운형을 명단에서 빼버렸다. 반면 1905년 '시일야방성대곡'이란 명문을 남긴 우파 계열의 민족주의자 장지연은 친일파로 분류했다. 1916년 일본총독 부임을 환영하는 넉 줄짜리 한시를 썼다는 게 그 이유다. 이쯤 되면 친일 인사 명단을 만든 저의가 의심되는 건 당연하다.

민족주의는 극단으로 치달을 때 위험해진다. 개인의 정체성이 사라지고 집단이 부각된다는 측면에서 자칫 파시즘이나 독재로 흘러갈 공산이 크다. 특히 민족주의가 다른 민족에 대한 배타적 증오심과 결합하면 파괴적 행태를 보이게 된다. 역사적으로 보면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독일 나치즘이 그 대표적 사례다.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결합은 그보다 더 위험하다. '남조선에서 민중혁명이 일어나면 최우선적으로 해야 될 일은 이 사회의 민족반동세력을 철저하게 죽여 없애야 한다. 그 숫자는 대략 200만 정도가 될 것이다. 우리에게 반동세력의 피는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한 차원 높은 애국이요, 진정한 민족주의자의 길을 가는 숭고한 행진곡이다.' 1970년대 북한의 적화통일노선에 따라 남한에서 활동하다 적발된 자생적 공산주의 조직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의 강령에 나오는 대목이다. 섬뜩하다. 독재와 전체주의는 민족주의의 피를 먹고 자란다.

박양수 수석논설위원

[저작권자 ⓒ디지털타임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