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서의 니하오 차이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우한`

박영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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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서의 니하오 차이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우한`
박영서 논설위원
신형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으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있는 곳이 후베이(湖北)성 우한(武漢)이다. 지난 1월 23일 봉쇄령이 떨어지면서 '유령 도시'로 변했다. 그러나 우한을 '전염병의 온상'으로만 생각하면 오해다. 수천년 역사를 자랑하는 '아름다운' 도시가 우한이다.

우한은 중원의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다. 중국 지도를 보면 대륙의 중앙은 간쑤(甘肅)성 란저우(蘭州)일대 지역이다. 그렇지만 이민족들이 살고있는 서쪽의 신장(新疆)위구르, 시짱(西藏)티베트자치구를 제외하면 우한이 중원의 중심이다. 때문에 우한 사람들은 정치 중심은 베이징(北京), 경제 중심은 상하이(上海), 그리고 지리 중심은 우한이라고 자부한다. 우한을 중심으로 반경 1000㎞ 이내에 베이징, 상하이, 광저우(廣州), 시안(西安), 충칭(重慶), 청두(成都) 같은 대도시들이 모두 자리잡고 있다. 창장(長江) 뱃길을 따라가면 우한 주변 동서남북 9개 성과 모두 통할 수 있다. '아홉 성을 연결하는 네거리'라는 뜻의 '구성통구'(九省通衢) 답게 중국 내륙교통의 요지다. 미국으로 치면 시카고와 비슷하다.

1949년 '우한 삼진'(武漢三鎭)이라는 우창(武昌)·한커우(漢口)·한양(漢陽) 세 도시가 합쳐지면서 지금의 우한이 탄생했다. 위도 30도에 위치해 있어 한국의 제주도(위도 33도) 보다 더 남쪽이다. 무더운 여름 날씨 때문에 우한은 난징(南京), 충칭(重慶)과 더불어 '중국 3대 화로' 중 하나로 불린다. 겨울에는 온도가 그리 낮지는 않지만 찬바람이 많이 불어 한랭하다. 한국으로 말하자면 대구 날씨와 비슷하다. 크기는 서울의 7배 정도 되고 인구는 1100만명에 달한다. 그래서 우한 사람들은 거리낌없이 '대(大)우한'이라고 부른다. 실제로 중국에서 지명에 대(大)자를 더해 부르는 곳은 두 곳 밖에 없다. 바로 '대 우한'과 '대 상하이' 두 곳이다.

우한은 오랜 역사를 간직한 도시다. 우한의 역사는 6000년 전 신석기 시대로 올라간다. 은(殷)나라 시대에 도시 형태가 보이기 시작했다.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에는 초(楚)나라 땅이었다. 우한은 삼국지의 주 무대이기도 했다. 전략적 요충지로 꼽힌 형주(荊州)의 북부 지역이 우한이다. 서기 223년 오(吳)나라 손권(孫權)은 조비(曹丕)와 싸우기 위해서 이 곳에 성을 쌓으며 "무로 나라를 다스려 번창케 하겠다(以武治國而昌)"고 말했다. 이 글귀에서 무와 창을 따서 도시 이름을 '무창'으로 지었다. 이 곳에 세워진 망루가 후에 '황학루'(黃鶴樓)가 된다.

[박영서의 니하오 차이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우한`


남북조(南北朝) 시대에는 주도(州都)가 되었고 당(唐)나라 때 창장 연안의 중요한 상업도시로 발전했다. 이때 많은 시인들이 우한을 찾아와 시를 읊었다. 가장 유명한 시가 최호(崔顥)의 '황학루'다. 그는 '옛 사람이 황학을 타고 떠나니(昔人已乘黃鶴去) 이곳에는 텅 빈 황학루만 남았네(此地空餘黃鶴樓)'라는 명시를 남겼다. 지금도 황학루는 우한의 랜드마크다. 누각에 올라가면 우한시 전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남송(南宋) 시기 악비(岳飛)는 이 곳에서 8년간 주군하면서 고토 회복을 꿈꿨다. 명(明) 태조 주원장(朱元璋)의 6남 주정(朱楨)은 초왕(楚王)에 봉해지자 우창을 근거지로 삼았다. 1858년 톈진(天津)조약으로 한커우가 개항됐다.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일본이 잇달아 조계를 설치해 반식민지가 됐다.

우한은 수천년 봉건왕조를 끝장낸 곳이기도 하다. 1853년 태평천국의 난이 발생하자 우한에서 대공방이 펼쳐졌고 1911년 10월 10일 이 곳에서 봉기가 일어나 신해혁명의 깃발이 올려졌다. 우창기의(武昌起義)다. 1927년 1월 국민당 좌파였던 왕징웨이(汪精衛)가 장제스(蔣介石)에 반기를 들고 우한에 우한국민정부를 수립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지고 그해 12월 난징이 함락되자 우한은 11개월 동안 임시수도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듬해 일본군은 우한을 점령했다. 1949년 5월 인민해방군은 우한 삼진을 장악했다.

신중국의 지도자 마오쩌둥(毛澤東)은 혁명의 도시 우한을 좋아했다. 마오는 여름 때면 이 곳에 머물면서 수영을 즐겼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되기 직전인 1966년 7월 16일 당시 73세의 마오쩌둥은 우한창장(武漢長江)대교 밑을 흐르는 바다 같은 창장을 헤엄치며 건재를 과시했다. 15㎞의 구간을 1시간5분 만에 헤엄쳐 건너갔다. 마오는 창장을 건넌 후 '눈을 들어 넓은 초나라 하늘을 바라본다(萬裡長江橫渡,極目楚天舒)'라는 시를 남겼다. 얼마 후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시작됐다. 우한 사람들은 마오의 창장 횡단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이 다리 밑에서 수영대회를 연다.

1993년 4월 우한 경제기술개발구가 정식으로 발족되어 외국인 투자가 본격화됐다. 자동차 산업을 중심으로 중국 제조업의 중추기지로 변모했다. 시진핑(習近平) 정권이 들어서면서 우한은 국가핵심전략 '중국제조 2025' 시범도시 중 하나가 됐다. 이렇게 쭉쭉 뻗어나가던 우한이 이번 발병으로 역사상 가장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마치 섬처럼 고립되어 사투를 벌이는 중이다. 하지만 우한의 내일은 다시 밝아질 것이 분명하다. 황학루의 황학은 큰 바람 타고 다시 돌아올 것이다.

박영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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