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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인문학] `다를 권리`를 인정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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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규 성균관대 하이브리드미래문화연구소 연구위원
[디지털인문학] `다를 권리`를 인정하라
김종규 성균관대 하이브리드미래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지난 9월 초 부산 기장에서 개최되었던 18세 이하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가 막을 내렸다. 축구와 더불어 국민스포츠로 자리 잡은 종목이 야구이기에, 많은 야구팬들은 미래의 스타들을 미리 보는 마음으로 우리나라 선수들의 선전을 기대했다. 이 대회의 우승은 대만에게 돌아갔으며, 우리나라도 3위라는 높은 순위를 차지하였다. 선전에 대한 자랑스러움과 더불어 아쉬운 패배에 대한 안타까움 역시 참여한 선수 및 스텝, 관전한 국민들 모두 함께 느꼈을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도 이러한 감정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만, 안타까움의 대상이 단지 패배에만 국한될 수는 없었다. 경기 외적으로 느껴지는 안타까운 감정 또한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너무도 흔하여 지나칠 수도 있는 것이지만, 선수들의 두발 스타일은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하였다. 국가를 상징하는 야구모자에 가려져 있기는 하였지만, 우승을 한 대만을 비롯하여 우리나라와 일본 선수들은 그야말로 운동선수 같은 두발 스타일을 하고 있었다. 예전에 소위 빡빡머리라 불리던, 스포츠형 두발 스타일이 그것이었다. 이에 비하여 미국을 비롯한 남미 국가들이나 유럽의 선수들은, 비교적 단정하게 정리된 상태를 유지하고 있기는 하였지만, 저마다 머리 스타일을 달리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중등교육 과정에서 두발 자율화가 이루어진 것은 꽤나 오래 전의 일이다. 완전한 자율화에 이르렀는가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형식적으로 두발 자율화를 교육적으로 인정하고는 있다. 머리카락 길이와 형태를 규정하였던 두발 규제는 통제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두발 형태가 소속을 나타내는 일종의 표식으로 작용하였기 때문이었다.

두발의 통제는 곧 자신의 신체에 대한, 자기 자신에 대한 결정권을 침해하는 것이 된다. 문제는 이 통제가 교육이라는 미명 하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교육이 자신에 대한 결정에 있어 영향을 줄 수 있다고 하더라도, 교육은 결코 그 결정권 자체를 침해할 어떠한 권리도 갖지 못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두발의 자율화는 획일성 탈피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여전히 군대에서는 두발 제한이 이루어지고 있다. 물론 이것은 특수한 목적에 따른 조치라는 점에서 중등교육 과정에서의 두발 제한과 비교될 수는 없다. 다만 두발 형태가 갖는 사회적 의미는 한 번쯤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일반인과 다른 군인이라는 특수성의 표식이다. 이것은 일종의 '차이의 이중적 장벽'이 된다. 스스로의 시각에서도, 그들을 바라보는 타인의 시각에서도 그 형태는 서로의 차이를 인식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청소년 국가대표팀 선수들의 머리 형태를 다시 생각해본다.

두발 자율화 시대에서도 그 자율화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학생들이 있었다. 흔히 운동부라 불리던 학생들이었다. 물론 운동부 학생들의 두발 형태의 제한이 위생과 같은 필요에 의한 조치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다른 방식으로 해결될 수 있는 매우 사소한 이유로서, 학생 개인의 신체적 결정권을 임의적으로 제한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오히려 두발 제한은 일반 학생들과 운동부 학생들을 차이의 이중적 장벽에 가두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더 나아가 교사들도 이 이중적 장벽에 갇혀 버리는 경우가 많다. 이중적 장벽이 세워지면 서로는 서로에 대한 편견을 형성하게 된다. 심각한 문제는 이 편견 속에서 '다름'이 아닌 '차별'이 촉진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 장벽은 그저 운동을 하는 학생들에서만 세워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사실 우리 사회가 교육의 다양화라는 명목으로 이와 유사한 여러 장벽을 세워 온 것도 사실이다. 최근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던 외고 등 특수 목적고 역시 교육적 다양성 보다는 차이의 이중적 장벽이 돼가고 있다.

다양성은 본질적으로 복수성을 전제로 한다. 복수성은 그저 여럿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타인 지향의 태도 속에서 비로소 형성되는 관계의 방식이다. 소통은 그 관계 방식의 대표적인 예이기도 하다. 이러한 복수성은 차이의 이중적 장벽과 결코 양립되지 못한다. 그 장벽은 복수성이라는 관계의 형성을 방해할뿐더러, 이를 통해 소통을 교란하여 장벽 내에 스스로를 고립시키도록 만들 따름이다. 그 장벽이 공고해질수록 다양성의 가능성은 그만큼 더 줄어든다. 교육이 이 장벽을 방치하지 말아야 하는 근본적 이유이다.

이것은 원리와 원칙의 문제이지 제도의 문제는 아니다. 따라서 제도의 고안을 통한 통제로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성공하기 어렵다. 차별적 시선이 아닌 진정한 '다를 권리'가 인정되어야 할 것이며 이를 바탕으로 교육 공간 내에서 학생과 학생들이, 그리고 학생과 교사들이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소통할 수 있는 장을 스스로 형성할 수 있는 다양한 시도와 노력이 동반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곧 교육이 다양성을 지향할 수 있는 근본적 조건을 마련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제도가 반드시 불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제도 만능주의는 경계의 대상일 따름이다. 제도는 최소한의 조건일 뿐이다. 자율화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제도의 중요성은 그 제도를 규정하고 있는 원리와 원칙의 실천에서 마련되며, 이 실천과 무관한 제도는 그저 허울일 뿐이다. 원리와 원칙이 부정되지 않는 이상, 제도의 실천을 통해 그 원리와 원칙을 실현해야 한다. 이 과정은 결코 어떠한 이해득실이나 편의에 의해 좌우되지 말아야 한다. 원리와 원칙을 살펴 제도를 실천하는 모습이 교육의 현장에 가득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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