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재근의 족집게로 문화집기] 불매운동, 집단지성 발동했다

하재근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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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8-13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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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근의 족집게로 문화집기] 불매운동, 집단지성 발동했다
하재근 문화평론가
얼마 전 서울 중구청이 일본 보이콧 깃발을 시내에 내걸자 누리꾼들이 강력하게 반발한 사건이 있었다. 결국 중구청은 반나절 만에 깃발을 수거했고 구청장이 사과하기에 이르렀다. 누리꾼들은 일본의 아베 정부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지 일본이라는 나라 자체, 일본 국민 모두를 적대시하는 것이 아닌데 지자체가 반일 깃발을 내걸면 마치 한국이 일본 자체를 적대시하는 것처럼 오해 받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 민간의 자발적인 불매운동이 마치 관의 주도로 이루어지는 것 같은 인상을 주는 것도 문제라고 했다. 그러면서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 반대 청원을 올리는 등 적극적인 반대운동에 나서서 중구청의 철회를 이끌어낸 것이다.

이것은 의외의 사건이다. 일반적으로 대중은 애국주의 선동에 취약한 존재로 여겨진다. 아베 총리가 한국을 때리는 것엔 애국주의 선동으로 자국 여론을 다잡으려는 측면도 있다. 보통 외국과 마찰이 생길 때 정치권이 애국주의 선동에 나서면 대중이 강력하게 호응하게 마련이고, 이런 대중의 호응에 고무된 정치인과 언론이 속속 애국주의 마케팅에 편승하면 애국주의 열풍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된다. 그 결과 회복하기 어려운 적대감정이 자국과 상대국 모두에서 생기거나 심하면 전쟁까지 일어난다.

독일 국민들이 히틀러의 애국주의 선동에 넘어간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유럽이 주도하는 현대철학은 이 사건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했다. 그래서 현대 지성인들은 애국주의 또는 민족주의 선동, 그런 선동에 호응하는 대중운동을 매우 경계해왔다. 대중을 그런 선동에 취약한 존재로 여기기 때문에 집단에서 독립된 개인의 지성을 강조했다. 지성인들이 이런 관점에서 대중을 꾸짖는 듯한 모습을 자주 보여서 '지식인의 훈장질'을 대중이 성토하는 풍경도 인터넷에서 자주 나타났다.

이번 일본 불매운동도 처음엔 한국에서 활동하는 걸그룹의 일본인 멤버를 공격하는 등 무분별하게 확대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지식인들이 우려하며 차분한 대응을 강조하다 악플에 시달리기도 했다. 일본이 결국 화이트리스트 한국 배제를 강행하고, 연일 일본 정치인들의 망언 소식이 전해지며 대중의 분노가 더욱 커져 폭주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런데 지자체가 내건 일본 보이콧 깃발을 누리꾼들이 내리라고 한 것이다. 누리꾼들은 일본 정부와 일본인을 구분하자며 보다 냉정해지자고 했다. 대중에 대한 일반적인 선입견과는 다른 이성적이고 성숙한 모습이다.

한국 걸그룹의 일본인 멤버를 공격한 것과 같은 초기의 거친 행태도 어느덧 정리됐다. 다카하시 쥬리가 속한 신인 걸그룹의 쇼케이스에선 우리 매체 기자가 다카하시 쥬리에게 한일갈등에 대해 물었는데, 누리꾼들이 그런 난처한 질문을 한 기자를 비난하며 다카하시 쥬리의 성공적인 한국 활동을 응원했다.

지자체나 단체가 대중의 수준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다. 강릉시는 16~18일에 예정됐던 한중일 여자컬링 친선대회에 일본팀을 초청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정치경제적 대립과 별개로 스포츠 교류는 이어갈 수 있는 것인데, 굳이 예정됐던 초청을 취소해야만 했을까? 우리 컬링팀이 일본에서 열린 컬링대회 출전을 취소하기도 했다. 한국여자농구연맹은 박신자컵 서머리그에 일본팀 초청 결정을 재검토한다고 한다.

제천시의회는 제천국제음악영화제의 일본 영화 상영 중단을 요구했다가 누리꾼의 빈축을 샀다. 영화제 측은 시의회의 요구를 묵살하고 일본 영화를 예정대로 상영했고, 다른 영화제들에서도 일본 영화 상영이 이어져 인터넷상에서 지지를 받았다.

일본 우익세력과 정권이 한국을 적대시한다고 해도 그들이 일본 자체는 아니다. 일본은 우방관계를 회복해야 할 우리 이웃나라다. 일본엔 우익에게 동조하지 않는 국민들도 많다. 그들과 연대해서 한일관계를 풀어가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일본 자체를 적대시하고 교류를 끊으면 더 많은 일본 국민이 우익의 선동에 넘어가 반한세력이 될 것이다. 그런 일을 막기 위해 문화교류를 평상시처럼 이어가야 한다.

무조건적인 반일 열기로 폭주할 것만 같았던 일반 대중이 이런 문제들을 스스로 제기하면서 타격점을 반일에서 반아베로 정교하게 다듬어가는 과정은 놀랍다. 이야말로 한국 누리꾼들의 '집단지성'이 발현된 사례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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