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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인문학] 다문화 사회 속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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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만수 충북대 프랑스언어문화학과 교수
[디지털인문학] 다문화 사회 속 `우리`
조만수 충북대 프랑스언어문화학과 교수
'다문화'가 우리 사회 내에서 점차 낯설지 않은 단어가 되어 간다. 인구 감소, 노동력 부족 등의 문제가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갖는 인구의 우리 사회로의 유입을 가속시키고 있다. 도시의 공장, 농촌, 그리고 어촌에, 그리고 소규모 자영업 사업장에서 낯선 얼굴들에 익숙해져 가고 있다. 다문화는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갖는 구성원들 간 상호적 관계를 필수적으로 가정한다. 하지만 적어도 현재까지 우리 사회 내에서 '다문화'란 '우리'라는 중심 문화와, 그것에 동화되고 통합되어야 하는 이질적 문화들을 총칭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를 정의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생물학적 조건으로서가 아니라 공동의 삶을 영유하는 공동체로서 우리는 과연 누구인가? 그러나 이 질문을 제기하는 것은 공동체의 다수가 아니라, 공동체에 통합을 강요당하는 우리 안의 이방인들이다. 1세대를 지나 2세대에 이르면 혼란 속에서 그들은 당연히 자신이 누구인지를 묻게 된다.

자신이 과연 누구인지를 고민하기 시작하는 시기를 사춘기라고 부른다. 사춘기의 젊은이는 어린아이와 성인이라는 이질적인 두 개의 자아의 충돌 속에서 혼란스럽고, 그리하여 그 무섭다는 중2의 질풍노도를 겪게 된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아직 사춘기의 단계에도 이르지 못했다. 그렇기에 다문화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그 다양성이 일으키는 증상들이 자신을 변화시키는 징후임을 인지하지 못하고, 이것의 의미를 되물어보지도 못한다.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미래에 어떤 모습을 가지게 될지를 알 수 있을까?

와즈디 무아와드는 레바논 출신의 캐나다 작가다. 10살에 레바논 내전으로 위험한 고국을 떠나 가족이 파리에서 망명신청을 하였지만 5년간의 체류 끝에도 정주자격을 얻지못해 15세에 캐나다 퀘벡으로 이민을 온다. 이민자의 나라이고, 프랑스어 사용자에게 호의적인 퀘벡이었기에 유럽에서 보다 정주 절차가 수월했을 것이다.

희곡작가로서 그는 '그을린 사랑'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는다. 이 작품은 드니 빌뇌프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어 더욱 사랑받기도 하였다. 소설가이기도 한 그의 소설 '되찾은 얼굴'은 작가 자신과 유사한 이민의 경험을 지닌 사춘기 소년이 정체성을 확립해가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주인공 와합은 14살 생일이 되던 날, 갑자기 엄마와 가족들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게 된다. 목소리는 그대로인데 그들은 전혀 와합이 알아볼 수 없는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와합은 낯선 이들이 살고 있는 집을 떠나 먼 길을 떠난다. 이같은 설정을 통해 작가는 성숙을 위해 변모하는 주체에게, 가장 본질적인 변모는 혈연성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임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주어진 혈연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그것이 정체성 확립의 첫 걸음이라는 것이다. 물론 혈연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되찾은 얼굴'이라는 제목처럼 어머니의 죽음 이후, 주인공은 어머니의 얼굴을 되찾아 그 초상화를 스스로 그린다.

이 소설에서 흥미로운 것은 집을 나서는 순간, 이제껏 일인칭으로 서술되던 주인공이 삼인칭으로 서술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정체성의 변화와 더불어 일인칭 소설이 삼인칭 전지적 시점 소설로 특이한 서술형식의 변화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후 다시 소설은 일인칭 소설로 복귀한다. 삼인칭화되는 것은 자아 속에 타자를 갖게 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철학자 폴 리쾨르는 정체성을 아이덴티티와 입세이테로 구분짓는다. 이 때 아이덴티티는 '동일성'이라 정의하고, 입세이테는 '자기성'이라고 정의한다. 동일성은 시간의 진행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단단한 것이다. 동일성은 이질적인 것을 수용하지 않는다. 이질적인 것은 동일한 것으로의 변모를 통해서만 받아들여진다. 자기성은 시간의 지속 속에서 변화를 통해서 자아를 유지시키는 것이다. 자아성은 필연적으로 타자를 만나고 그 만남의 결과를 통해서 변모하며 자아를 유지시킨다. 그리고 여기에 다시 서술적 자아가 개입된다. 나는 객관적으로 구축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 속에서 변형되면서 지속된다. 그리하여 나는 내가 아닌 것을 포함하여 이야기된다. 이야기 속에서 타자는 나의 반대항이 아니라 자아의 의미를 구축하는 내밀한 부분이다. 그의 저서 중 하나의 제목인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이 폴 리쾨르의 정체성의 개념의 이해를 도와준다.

세계 여러 나라의 다문화사회는 자신의 정체성의 확립을 위해, 다시 말해서 변화하지 않는 동일성과 변화를 통해 자신을 지속시키는 자기성 사이에서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있을까? 민족, 인종, 혈연, 피부색 등의 동일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경향에도 불구하고, 타자와 함께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사회경제적 조건 속에서 어떻게 자신을 지속시킬 수 있을까? 그들을 유지시키는 것은 이야기하는 주체, 서술적 주체이다. '나'라는 주어진 불변의 주체가 아니라, 나를 나라고 말하는 나, 이야기를 통해서, 허구적으로, 그러나 실재적으로 정의하는 나가 서술적 주체이다. 다문화사회로서의 프랑스는 "계급, 종교 등 특권적 권력이 아닌 시민의 계약에 의해 구성되는 공화국"이라는 이야기로, 미국은 "그 어떤 제약에도 제한되지 않는 자유로운 시민의 나라"라는 이야기로 자신을 유지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만들까? 하나의 언어를 쓰는, 단일한 민족이라는 혈연적 동일성이 아닌 어떤 이야기가 우리를 지속하게 할까? 이제 우리 사회도 자신이 누구인지 생각하고, 가치적 지향점에 대해 이야기해 볼 성숙한 변화를 겪어야 할 때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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