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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인문학] 문화로서 공유와 공유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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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규 성균관대 하이브리드미래문화연구소 연구위원
[디지털인문학] 문화로서 공유와 공유경제
김종규 성균관대 하이브리드미래문화연구소 연구위원
경제만큼 현대인들의 주목을 받는 분야는 없는 듯하다. 우리의 삶에 직결되어 있기에, 그 변화에 우리는 무척이나 민감할 수 밖에 없다. 많은 경우 현실적으로 좌절을 겪곤 하지만, 그래도 보다 나은 경제적 여건을 마련하는 데 많은 사람들은 애를 쓰며 살고 있다. 인간 사회에서 이러한 시도는 지극히 당연한 것일 수 있다. 이 경제적 여건이 인간다운 삶의 충분조건일 수는 없지만, 적어도 필요조건일 수는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수단과 목적이 혼동될 때이다. 이 혼동 속에서 현대인들의 스트레스는 극에 달하게 된다. '부자아빠'는 어떤 영예로움의 호칭이 아닌 강박 그 자체가 된다.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부의 가치를 소유한 것들을 많이 가져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자는 어떠한 유형의 것이든 자본의 가치를 많이 소유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소유의 방식은 배타적이다. 소유의 주체는 '나'일 뿐이다. 문제는 모두가 부자이려 할 때이다. 인격과 도덕보다 부가 더 큰 사회적 가치를 갖는 사회에서 '부자아빠'는 모두의 지향점이 된다. 모두가 많이 갖기 위해서는, 가질 수 있는 것이 많아야 한다. 이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은 '성장' 뿐이다.

이제 우리는 과거와 같은 고도성장을 기대하기 어려운 시대에 봉착하였다. 세계경제지표의 예상 때문만은 아니다. 성장은 시간이라는 조건 속에 놓여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시간을 넘어 있는 무한은 결코 인간과 자연의 개념이 아닌 신의 개념일 뿐이다. 그러니 시간을 넘어 언제든 지속되는 성장은 자연 속에서도 인간 사회 속에서도 존재할 수 없다. 성장은 그저 한계개념일 따름이다. 이에 우리 사회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성장보다는 오히려 쇠퇴의 지연이다. 이 지연을 위해 우리가 다시 생각해보아야 하는 것은 소유의 방식이다.

최근 기존 것과는 다른 소유의 방식이 등장하고 있다. 우버(Uber) 등으로 대표되는 공유 자동차, 위 워크(WeWork) 등으로 대표되는 공유 오피스 등이 그것이다. 이것들의 등장에 따라 일의 방식이 변경되고 있으며, 이 변경에 따른 혼란과 반발도 크다. 그렇다고 이 변화의 흐름이 중단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이며, 더욱이 그것은 과거와는 전혀 다른 인간 삶의 조건을 형성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도 보인다. 현재 이 변화는 단순한 변경이 아닌 하나의 패러다임 전환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사회적으로 회자되고 있는 '공유경제'는 이것에 대해 붙여진 이름이다.

향후 더 다양하고 많은 공유경제들이 등장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아마도 집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대기업들도 점차 공유경제에 뛰어들고 있는 형편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어떠한 공유경제들이 등장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은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주목해야 할 것은 오히려 이 변화를 규정하고 있는 '공유' 그 자체다. 현재 공유는 자연적 개념으로 이해되고 있다. 많은 연구들은 공유의 기원이 인류 태초에서 연원된다고 가정하고 있다. 공기, 물, 땅 등의 자연물에 대한 모두의 자유로운 이용이 곧 공유의 본질적 의미인 셈이다. 이 자연물들이 공유될 수 있는 것은 그것들이 모두에게 속하는 것인 한에서 가능하다. 이에 대한 사적 소유는 추후 인간의 사회화 과정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자연물에 대한 소유는 인간에만 한정된 것일 수 없다. 그 자연물에 대한 이용은 동물과 식물 모두에게도 자유로운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해를 인간 사회의 공유 개념에 그대로 적용하게 되면, 공유물에 대한 인간의 태도 역시 동물과 동일한 수준에서 이해된다. '공유지의 비극'이 바로 그것이다. 생물학자 하딘(G. J. Hardin)은 개인과 전체라는 이분법 하에서 공유지의 비극을 설명한다. 모두에게 속한 공공물은 개인의 소유가 아니며, 개인은 이에 대한 약탈자가 된다. 약탈로 인한 황폐화를 막기 위해서는 이 공유물을 개인의 소유물로 만들거나 국가의 관리물로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하딘의 결론은 추론의 결과가 아닌 전제의 순환일 따름이다. 개인과 전체의 배타적 관계가 전제와 결론 모두에서 반복되기 때문이다. 공유(公有)와 사유(私有)의 이분법에서, 공유(共有)는 소유의 방식으로 이해되지 못한다. 어느 것에도 소유되지 않는 공유물은 개인이 약탈자가 되는 근본적인 원인이다. 그러나 리눅스의 사례가 보여주듯, 공유(共有)는 전혀 다른 맥락 속에 놓여 있다. 리눅스에 대하여 개인은 결코 약탈자일 수 없다. 오히려 그는 참여자일 수 있으며, 더욱이 그것을 배타적으로 소유하지도 않는다. 여기서의 공유는 개인의 배타적 소유도 인정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개인의 소유를 배타적으로 부정하지도 않는다. 이것이 바로 개인이 참여하게 되는 근본적 원인이다. 중요한 것은 공유(共有)의 이와 같은 이중 부정의 특성을 우리는 '문화'의 원리로도 발견한다는 점이다.

미래의 경제를 위해서도 변화의 의미는 좀 더 정확히 읽혔으면 한다. 특히 그 미래의 핵심적 가치인 공유에 대한 이해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이는 단지 새로운 이해만은 아니다. 경제는 우리의 실제적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이 공유가 과거의 방식이 아닌 문화적으로 이해되길 바라며, 경제의 영역에서 우리의 미래가 문화적으로 구상될 수 있기를 조심스럽게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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