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인문학] `관크`와 `뮤덕` 해방된 관객

조만수 충북대 프랑스언어문화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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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2-28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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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인문학] `관크`와 `뮤덕` 해방된 관객
조만수 충북대 프랑스언어문화학과 교수
대부분의 중년남성들에게 공연 관람은 낯선 경험이다. 이들은 간혹 영화관을 찾아 1000만 관객에 합류한 자신의 '취향의 보편성'을 확인하며 안도하곤 한다. 하지만, 연극이나 뮤지컬의 경우 친구의 지인이 관계자라서 얻은 초대권이 아니라면, 혹은 가족의 압력으로 거액의 지출을 결심해야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중년남성들은 자발적으로 공연관람을 하지는 않는다. 그들에게 공연장은 다소 '여성적' 공간이다. 공연장에서는 골프장에서처럼 네트워킹이 이루어지지 않고, 술자리에서처럼 성원 간의 결속력이 만들어지지도 않는다. 그들에게 극장은 독특한 취향을 지닌, 비주류적인 매니아들이 모여있는 공간이며 생산적이라기 보다는 소비적인 공간이다.

그러나,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은 공연장을 찾는다. 연극동네 '대학로'의 100개가 훨씬 넘는 소극장에서 관객이 많건 적건 매일 공연들이 이어지고, 뮤지컬 전용관에서는 화려한 대형 쇼가 펼쳐진다. 우리나라 공연산업은 지난 10여년간 규모면에서 많은 성장을 했다. 도대체 그 많은 공연장에는 누가 가는 것일까?

공연장에 가는 것은 관객마다 각기 다른 선호와 이유가 있을 것이지만, 우리 공연 시장 관객들의 분포에서 의미있는 집단은 30대 여성관객이다. 특히 대형 뮤지컬 공연에서 이 집단의 관객 분포는 더욱 중요해진다. 또한 이들 관객 중 상당수는 '회전문' 관객이라 불릴 만큼 같은 공연을 수차례 혹은 수십 차례까지 관람할 정도로 자신의 선택에 대한 확신이 강하다. 콘서트를 선호하는 20대들과 중년남성은 세대 차이로 인해 공통적인 감수성이 없지만 뮤지컬을 선호하는 30대 여성관객과 중년남성은 감수성에서 대립적인 관계를 형성한다. 그리고 이 대립성이 바로 30대 여성이 극장을 찾는 이유이다. 이들에게 극장은 중년남성으로 대표되는 '남성성'이 지배하지 않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30대 여성관객에게 남성성은 권위적이며, 일방적이며, 거칠고, 배려심 없고, 무례하고, 섬세하지 않은 것들, 다시 말해서 그들이 직장에서, 거리에서, 가정에서 만나는 현실의 일상적인 폭력적 관계들이다.

하루 종일, 혹은 일주일 내내 견디던 일상적 폭력을 피해, 퇴근 후 극장으로 들어선다. 이제 현실이 아닌 허구의 세계가 펼쳐질 것이다. 커튼이 열리고, 조명이 켜지면, 쇼가 시작된다. 안온한 꿈의 세계로 들어가려는 그 순간, 누군가의 핸드폰이 울린다. 그저 빨리 끄면 될 것을 굳이 받아서 작지 않은 소리로 공연 중이라서 못받는다고 대답한다. 또 누군가의 카톡소리는 단톡방에 불이난듯 계속 울린다. 누군가는 액정을 열어 문자를 확인한다. 뒷자리에서는 살찐 다리를 꼬려 애쓰다가 미끄러져 등받이를 발로 차고, 앞자리 사람은 몸을 앞으로 수그려서 뒷자리 관객의 시야를 방해한다. 도무지 공연에 집중할 수가 없다. 오 마이 갓! 현실 속의 그들이 극장에까지 나타난 것이다.

현실의 일상적 폭력성을 환기시키는 이들을 '관크'라고 부른다. '관객'과 '크리티컬'의 합성어로 굳이 풀어쓴다면 타인의 관극을 방해하는 '진상 관객' 정도의 의미일 것이다. 진상 관객은 반드시 중년남성이 아닐 지라도 현실의 남성성의 일상적 폭력성을 상기시키는 존재들이다. 뮤지컬 덕후들은 현실 속에서는 실제적인 권력관계 속에서 감내하였지만, 허구의 공간인 극장에서는 적개심이 직접적으로 표출되며, 그들의 '거친 행동'을 지적하고 교화하고자 한다. 그들을 피해 비싼 돈을 지불하고 극장에 온 것인데, 여기서까지 시달리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 교화의 움직임은 어린이 관객에게도 향한다. 어린이 비중이 높은 작품에서 주의력이 산만한 어린이 관객과 그 부모에게 곱지 않은 시선이 향한다. 관크라 비난당하는 관객들이 공연장에서 시체처럼 있어야 하냐고 항의하면서 대립이 첨예해지고 급기야 극장이 관객 에티켓을 공지하며 중재에 나서기도 한다.

그런데 극장은 원래 어떤 공간이어야 하는가? 우리는 무대에서 벌어지는 장면들을 숨죽이고 목도하며 그 환상 속에 깊이 빠져들기 위해서 극장에 가는 것일까? 아니면 왁자지껄한 집단적 소음 속에서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가는 곳일까? 철학자 랑시에르는 '해방된 관객'이라는 책에서 관객을 '무지한 교화'의 대상으로 파악하는 것은 계몽주의적 교훈극의 오류 속에 있는 것이라 지적한다. 선악을 이원화하고 윤리성을 강조하는 것은 손쉬운 멜로드라마의 구성이며 그 자체로 남성적 폭력을 반복하는 것이다.

뮤지컬 덕후와 관크는 둘 모두 관객이라는 공동체에 속해 있다. 관크는 비록 관극의 에티켓을 체화하지 못했지만, 극장이라는 비일상적 공간을 체험하기 위해 기꺼이 그 자리에 있다. 그러므로 극장에 있는 이들은 억압적 폭력성을 행사하는 '적'이 아니라 함께 호흡해야 하는 공동체의 일원이다. 관크이건 '뮤덕'이건 관객은 사회가 그들에게 할당한 거친 감각들에서 벗어나서. 지배적이고 폭력적인 남성성이 아닌 새로운 감각을 이 공간 속에서 형성할 것이다. 무지하다고 여겨지지만,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관객, 그들이 바로 해방된 관객이다. 비록 현실 속에서 일상적 폭력 속에서 해방되지는 못하였지만, 극장이라는 예외적 공간 속에서 그들은 스스로를 해방시킬 줄 알고 있다.

극장과 관련된 두 편의 오래된 영화가 있다. 그 하나는 마르셀 카르네 감독의 '천국의 아이들'이다. '패러다이스'는 천국을 뜻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극장 객석의 가장 위쪽 자리, 무대에 집중할 수 없게 왁자지껄한 가장 싸구려 자리를 부르는 용어이다. 그 왁자한 자리가 극장의 천국인 셈이다. 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시네마 천국'에서의 극장도 그와 다르지 않다. 꼬마 토토가 드나들던 '파라다이스 극장'은 추잡한 것을 포함하여 삶의 모든 것이 일어나는 곳이다. 그리고 그 공간 속에서 신부님은 외설스런 '키스'씬을 다 가위질하여 관객을 교화하려 한다. 하지만 영사기사 할아버지 알프레도는 잘려진 키스씬들을 다 보관하였고 훗날 유명 영화감독이 된 토토는 알프레도 할아버지가 이 잘려진 키스씬을 이어붙인 한 편의 영화를 본다. 잘라내도 삶의 일부로 남아있는 것들, 교화되지 않는 것들, 그것들의 싸움, 그 모든 것이 극장의 삶을 만든다. 현실 속에서 실패한 싸움을 다시 현실적으로 이어나가는 한정된 공간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이루지 못한 승화를 이루는 공간이 극장이다. '극'이 현실과 허구의 경계 속에 있는 싸움, 갈등의 이야기라면, 극장은 그 갈등이 놀이가 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렇게 '쑈'는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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