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재근의 족집게로 문화집기] 박항서 열풍은 왜 뜨거울까

하재근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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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1-29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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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근의 족집게로 문화집기] 박항서 열풍은 왜 뜨거울까
하재근 문화평론가

한국의 박항서 열풍이 뜨겁다. 2019 아시안컵에서 한국팀 못지않게 베트남 대표팀에 대한 응원 열기가 나타났다. 2018 아세안축구연맹 스즈키컵은 우리에게 생소한 대회임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이 출전한 결승 1차전의 스포츠 채널 시청률이 무려 5% 가까이 나왔다. 이에 놀란 지상파 방송사가 결승 2차전을 생중계하기에 이르렀는데 시청률이 18.1%까지 치솟았다. 동시 동계한 스포츠 채널에서도 3.8% 시청률이 나와 총 21.9%라는 엄청난 수치를 기록했다. 베트남 대표팀의 경기에 한국 경기 버금가는 관심이 쏟아진 것이다.

우리 대표팀은 답답하고 지지부진한 느낌을 줬는데 그에 반해 베트남 대표팀은 열정을 다 한다는 느낌이었다. 그것이 과거 우리 대표팀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면서 현재 대표팀의 경기에 실망한 국민들에게 위안을 줬다. 우리 대표팀은 과거에 '악바리'처럼 투혼을 불사른다고 해서 '붉은 악마'로까지 불렸는데, 베트남이 그런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박항서 감독도 '우리는 부유해졌기 때문에 과거와 같은 헝그리 정신을 요구하기 힘들다'면서 반면 베트남 선수들에게는 '80년대 한국 축구와 같은 헝그리 정신이 있다'고 말했다. 이러니 한국 축구팬들이 베트남 선수들에게서 투혼을 불사르던 우리팀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마침 베트남 유니폼이 붉은색이어서 더욱 붉은 악마의 추억이 떠오른다.

이렇게 본다면 베트남 박항서호 신드롬에는 우리 대표팀에 대한 실망을 보상받는 대리만족과 더불어 일종의 복고 콘테츠적 성격도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말하자면 80년대 세계 청소년 대회 4강, 2002 월드컵 4강 신화를 떠올리는 것이다. 베트남의 경제 상황도 꼭 우리의 옛날 같기 때문에 '응답하라' 시리즈와 같은 복고적 감흥이 더 강해진다. 승리 후에 베트남 시내가 인파에 뒤덮이는 것을 보며 우리의 과거 거리응원을 떠올리고 자기도 모르게 웃음 짓게 된다. 이러니까 베트남 대표팀에 감정이입하는 것이다.

축구협회나 한국사회에 대한 불신, 불만이 박항서 감독의 성공을 기원하는 열기로 전환된 측면도 있다. 아시안게임 직전에 김학범 감독이 개인적 인연이 있는 황의조 선수를 대표로 선발하자 엄청난 반발이 일었다. 황의조 선수의 일본 성적은 충분히 대표에 선발될 수준이었지만 사람들은 개인적 인연에 극단적인 거부반응을 보였다. 인맥 선발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과도하게 민감한 반응이 나올 정도로 축구협회와 대표팀에 대한 불신이 뿌리 깊다.

한 마디로 '인맥축구'라는 것이다. 학연을 바탕으로 축구행정이 '그들만의 리그'로 이뤄진다고 사람들은 의심한다. 히딩크 감독을 축구팬들이 아직도 그리워하는 것은 히딩크가 이러한 폐쇄적인 인맥사회의 외부자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히딩크가 학연지연 등 인맥주의를 혁파하고 오로지 실력에 의거해 공정하게 대표를 뽑았다고 믿는다. 그래서 박지성 같은 인재를 발굴했다는 것이다. 2002년이 가장 공정했고 그래서 가장 강했다고, 가장 대한민국의 자부심에 어울리는 팀이었다고 여긴다. 박항서 감독은 바로 그 2002년 신화의 주역 중 한 명이다.

하지만 2002년 이후 한국 축구는 점차 답답해졌다. 같은 기간 박항서 감독의 커리어도 하향세였다. 사람들은 히딩크가 사라지자 인맥축구로 대표되는 불공정 고질병이 다시 도졌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축구 경쟁력도 떨어지고, 박항서 감독도 인정을 못 받았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퇴출 위기에 몰렸던 박항서 감독이 베트남에 가서 2002년의 기적을 재현하자 사람들은 이것이 '정의'라고 여겼다. 한국 축구 행정에 대한 불신이 크면 클수록 박항서 신드롬이 커진 이유다.

축구 행정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 대해서도 내세울 것 없는 '흙수저'는 성공하지 못하는 사회라는 불신이 크다. 이럴 때 내세울 스펙과 연줄이 없는 박항서 감독의 성공이 사람들의 속을 후련하게 해줬다. 사람들은 흙수저 박항서를 마치 자신처럼 생각하며 응원하게 됐다.

최근 사회경제적으로 답답한 상황이었다. 국민의 속을 풀어주는 소식이 없었다. 이럴 때 국민이 감정이입한 박항서 감독이 과거 우리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베트남 대표팀을 이끌고 연일 기적의 승전보를 알려왔다. 베트남의 거리 열기를 보며 마치 내가 현장에 있는 듯 대리만족의 흥분도 전해줬다. 모처럼 국민의 속을 시원하게 해준 사건이다. 이러니 한국에서 박항서 신드롬이 뜨거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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