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정부 들어서 벌써 55조 규모
정부 지역균형발전 취지라지만
최소한의 검증절차 조차 '패싱'
졸속 땐 지역 경제 되레 압박
정부 지역균형발전 취지라지만
최소한의 검증절차 조차 '패싱'
졸속 땐 지역 경제 되레 압박
23개 사업 `예타 면제`
정부의 대규모 공공투자사업의 예비타당성조사(예타) 면제를 놓고 '혈세 낭비' 논란이 거세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사업 타당성을 거치지 않은 '선심성 퍼주기' 사업이 봇물을 이루면 결국 경제에 부메랑이 될 것이라는 비판이 쏟아지고있다.
정부는 국가균형발전을 명분으로 총사업비 24조1000억원 규모의 23개 사업에 대해 예타를 면제한다고 29일 발표했다. 대규모 예타 면제는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08년 이후 10년 만이다. 경기 하방 압력이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경기를 살리기 위한 고육책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정부는 "지역의 자립적인 성장 발판 마련을 위한 국가의 전략적 투자가 시급한 상황"이라고 밝혔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수도권과 지역 격차가 지금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 오기 전에 반드시 국가균형발전을 이뤄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 예타 면제 조치로 대규모 사회간접자본(SOC)사업이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추진되면 고용유발효과가 큰 건설업 경기가 살아나면서 경기 활성화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10억원을 투입했을 때 늘어나는 고용을 보여주는 고용유발계수를 보면 건설업은 2014년 기준 5.9명이다. 우리나라의 주력 수출품목 중 하나인 반도체(3.1명)의 두배에 달한다. 벌써 전국의 부동산 시장이 들썩이고 있다.
예타 면제 사업 발표에 수도권을 제외한 지방자치단체들은 대체로 환영의 뜻을 밝혔다. 서부경남 주민들이 50년 넘게 기다려온 숙원사업인 서부경남KTX(남부내륙철도)가 마침내 추진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경남도는 환호했다. 광주시도 4000억원 규모의 인공지능 중심 산업융합 집적단지 조성사업이 예타 면제를 받은 데 대해 지역균형 발전의 취지를 잘 살린 결정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국가 재정의 문지기'로 불리는 예타를 거치지 않은 사업을 밀어붙이다 많은 사업이 막대한 세금만 삼키는 애물단지로 전락할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졸속사업 추진으로 기반시설이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부실화되면, 의정부 경전철, 전남 영암 포뮬러원(F1) 사업 등처럼 지역 경기에 부담을 초래할 수 있다. 국가재정법은 총사업비 500억원 이상이고 국가재정지원 규모가 300억원 이상인 공공사업은 예타를 받도록 규정하고 있다. 무리한 SOC사업 추진으로 국민 세금이 낭비되는 일을 막기 위한 것이다. 김태윤 한양대 행정학과 교수는 "예타는 합리적인 의사결정의 주체가 최소한의 타당성을 살피는 것인데 그것조차 하지 않겠다는 것"이라며 "예타 면제보다는 예타가 더 신속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 후 29조5927억원 규모 사업에 예타를 면제한 바 있다. 이번 발표까지 포함하면 면제된 예타사업비 규모가 55조원에 달한다. 규모로 보면 이명박 정부에 이은 역대 2위다.
시민·환경단체들도 우려의 목소리를 쏟아 냈다. 경실련은 이날 '문재인 정부의 토건적폐 경기부양을 규탄한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내고 "과거 토건적폐로 비판했던 이명박 정부의 예타 면제를 현 정부가 따라하고 있다"면서 "예타 면제사업 결정자들의 책임을 분명히 물을 것이며 사업 특혜 등을 철저히 감시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경실련은 "문재인 정부 임기기간 동안 예타 면제 규모는 55조원에 달한다. 50조원 규모의 도시재생 뉴딜을 합칠 경우 전체 규모는 100조원을 넘어설 것"이라며 "이렇게 되면 (예타 면제 규모가) 역대 최대치"라고 밝혔다.
환경부의 4대강 조사·평가단 민간위원장을 맡고 있는 홍종호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문재인 정부 국정과제로 추진된 4대강 재자연화를 위한 조사·평가단장직에서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혔다.
홍 교수는 "4대강 사업은 사업 자체의 타당성도 문제였지만 절차 자체가 위법적이었다는 점을 큰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면서 "이를 비판했던 현 정부에서 천문학적 국민 세금이 들어가는 국책사업의 절차적 정당성과 사회적 합리성을 담보하기 위해 만들어진 예타 조사를 건너뛰어 사업을 추진한다니 망연자실하다"고 꼬집었다.
정부는 대규모 예타 면제 사업에 따른 예산 낭비를 줄이기 위해 보다 치밀하고 객관적인 검증작업과 함께 합리적인 재원조달 계획을 짜야한다. 권대중 명지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24조원의 예타 면제 규모는 적지 않은 금액"이라며 "혈세가 낭비되지 않도록 각 분야에 책임을 묻는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 또 정부가 특정 기업에 예산이 편중되는 일이 없도록 철저하게 감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예진수선임기자·성승제기자 jinye@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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