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시사문화평론가
![[포럼] `안시성`의 양만춘과 늦봄](http://contents.dt.co.kr/images/201810/2018100802102369660001[1].jpg "[포럼] `안시성`의 양만춘과 늦봄")
하지만, 올 추석에 '안시성'이 선택되는 이유에는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 존재한다. 바로 3차 남북정상회담이 그것이다. '안시성' 제작진들을 비롯해서 홍보 마케팅을 하는 NEW 팀에서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남북 정상의 과감한 결단은 그 파격에 있어서나 감동에 있어서 오히려 영화자체를 능가하는 힘이 있었다. 2박 3일의 일정 속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 내외가 보여준 따뜻한 환대와 실질적인 종전 선언인 9.19 합의, 영화 '안시성'의 스케일마저 가볍게 제압해 버리는 능라도 경기장 집단체조와 백두산 천지의 장엄한 아름다움, 평양과 삼지연에서 만난 시민들의 열광적인 환호는 그 어떤 콘텐츠보다 재미와 감동이 살아있는 작품이었던 것이다.
대개 이런 상황이 연출되는 시점에는 문화콘텐츠들의 장사가 시들해질 수밖에 없다. 현실이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하다면, 굳이 영화를 통해서 현실을 비춰 볼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안시성'의 흥행 성적은 날이 갈수록 탄력을 받고 있다. 과연 무슨 이유일까? 그것은 작품을 구상할 때부터 배치되어 있는 상징들이 남북정상회담이 만들어 준 감동과 궤를 같이하고 있기 때문에, 그 감동을 되짚어 보기에 적절한 콘텐츠로 변용 해석되기 때문이다.
'안시성'의 갈등 구조는 단순하지만은 않다. 겉으로는 악과 선이 명료하게 구분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절대 약자인 안시성 주민의 입장에서 보면 울트라 갑이나 수퍼 을이나 약자들에게 침략자이긴 마찬가지다. 당은 평양성을 점령하기 위해 안시성을 원하고, 고구려는 평양성을 지키기 위해 안시성을 원한다. 성주 양만춘은 당으로부터 안시성과 성의 주민들을 지켜야 하고, 동시에 군사 쿠데타의 주역 연개소문으로부터도 주민들을 지켜야 한다. 도대체 양만춘은 왜 이런 선택을 해야만 했을까? 그 답은 영화 초입에 있다. 조인성이 분한 양만춘은 첩자들은 단칼에 목을 베는 맹장이지만 성의 주민들에게는 한없이 따뜻하고 친근한 지도자다. 자신의 명을 거역하는 부하가 있더라도 그들의 논리가 설득력이 있으면 명을 거둘 줄 아는 민주적 지도자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참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은 성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면서 주민들의 삶과 부하들의 일상을 살펴서 불편함을 없애는 일이다. 바로 민생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다. 순시 중에 얼마 전 아이를 낳은 부하의 집에 들르는 장면이 있다. 그 아이를 품에 안고 그야말로 해맑게 웃던 양만춘은 아이의 이름을 묻는다. 부부는 머뭇대다가 말한다. '늦봄'이라고. 그저 양만춘만을 알고 이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성주의 이름을 아이에게 붙이는 부부를 통해 양만춘의 덕을 이해하는 정도에 그쳤을 것이다.
하지만 '늦봄'이란 이름을 가진 또다른 영웅을 아는 사람들은 한국 현대사에서 지워버릴 수 없는 그 거인을 떠올리면서 갑자기 멍해질 수밖에 없다. 늦봄 문익환. 그를 떠올리면서 '안시성'을 보면 양만춘의 선택을 이해할 수 있다. 문익환 목사는 울트라 갑인 미국과 중국에 맞서 자주성을 지켜야 한다면서도, 절대로 군사독재정권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에게 하나님은 하늘에 존재할 뿐 아니라 이 땅 한민족이란 실체로 존재했기에, 갈라져 있는 민족을 하나로 있는 다리가 되기 위해서 온 몸을 화살로 쏘아 날렸던 투사 중의 투사였다. 하지만 일상 속에서 약자들을 만날 때엔 그 일상을 돌보고 보살피는 살림꾼이었다. 실제로 문호근 선생과 공연을 준비할 때, 발을 크게 접지른 친구의 양말을 손수 벗기시고는 냄새나는 발을 어루만지며 통증 부위를 묻고 파스 조각들을 꼼꼼히 붙이시던 목사님을 기억한다. 70넘은 할아버지가 손자의 발을 감싸는 그 모습은 투사로 휴전선을 건너는 그 모습과 다른 색깔의 헌신이었지만, 영화 속의 양만춘과 어찌나 흡사한지.
'안시성'이 최종적으로 어떤 성적을 낼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두 남북정상이 우뚝 선 백두산 천지의 사진에 늦봄의 얼굴이 어리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듯이, 영화 '안시성'을 보면서 늦봄 문익환 목사의 삶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줄을 이을 것이다. 마침 올해는 늦봄 탄생 100년이 되는 해다. 이 모든 것이 단지 우연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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