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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산책] 기술문명 시대 `노동의 미래` 주목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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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규 성균관대 하이브리드미래문화연구소 연구위원
[디지털산책] 기술문명 시대 `노동의 미래` 주목할 때
김종규 성균관대 하이브리드미래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피폐된 국가 재건의 임무가 시급했던 독일에서는 주택 공급 문제 해결에 주력해야했다. 1951년 다름슈타트(Darmstadt)에서 열렸던 한 심포지엄도 동일한 목적하에서 기획된 것이었다. 이 심포지엄의 주제는 '인간과 공간'이었는데, 강연자로 초청된 이는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였다. 건축과 건설 관련 심포지엄이라는 점에서, 강연자로 철학자가 초청됐다는 것은 자못 이상한 일로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이 초청은 어떤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건물을 건설하는 것만이 재건의 목적도 건축가의 임무도 아니라는 점이었다. 이 심포지엄에서 하이데거가 행한 강연의 제목은 '건축함, 거주함, 사유함'이었으며, 그 내용은 지금도 많은 건축가들에게 매우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강연의 제목 그대로 하이데거는 자신의 강연을 건축함과 거주함의 관계를 밝히는 데서 시작했다. 그에 따르면, 건축함이란 그 자체가 이미 거주함으로, 건축함은 거주함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었다. 하이데거는 이 주장의 근거를 건축하다는 말의 옛 독일어에서 찾아냈다. 건축한다는 말은 본래 거주하다는 뜻으로, 이와 더불어 건물을 건립한다는 또 다른 뜻을 이중적으로 갖고 것이었다. 하지만 건축함은 이제 더 이상 이 이중적 의미를 포괄하는 것이 아니었다. 건축함에 있어 거주함의 의미는 상실됐고, 이로써 건축함은 거주함과 별개의 것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거주함은 건축함에 의해 규정되고, 인간의 거주는 한갓 건축된 건물에 머물고 체류하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이해되고 있다. 거주함은 사유의 목록에서 잊히었으며, 그럼에도 이 사유의 부재를 문제로 여기지 않는 상태를 하이데거는 '고향상실'이라 불렀다.

강의실의 이야기를 여기에 옮기려는 것이 아니다. 이야기 나누고 싶은 것은 건축함과 거주함에 대한 그의 사유에서 드러나는 혜안일 뿐이다. 건축이 규정하는 거주와 달리, 거주함으로서의 건축함이란, 아주 간략하게 말해서, 인간의 진정한 삶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건축함이 이뤄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저 빈 공간에 세워지는 건축물을 통해 거처가 마련되고, 그 안에서 생존을 이어가는 것은 결코 인간 고유의 근본적 거주가 아니다. 인간 본래의 거주 가능성은 최소한 인간의 진정한 삶의 의미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건축이라는 물리적 행위가 이루어질 때에야 비로소 확보될 수 있는 것이다. 거주함과 건축함이 별개의 사건이 아닌 한, 그 같은 이해가 수반되지 않는 건축은 진정한 건축함일 수 없다. 하이데거의 말마따나, "우리가 거주할 능력이 있을 때에만, 우리는 건축할 수 있다."

거주가 단순한 생존이 아닌 한, 거주는 인간 고유의 삶의 방식이다. 따라서 건축, 더 나아가 제작(制作)하는 모든 행위 역시도 그것이 인간의 행위이기 위해서는, 그 행위의 주체인 인간의 조건에 대한 우리의 성찰이 늘 마련돼 있어야만 한다. 인간의 삶은 노동을 통해 영위되며, 더욱이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이뤄지는 인간의 모든 제작 역시 노동을 통해 이뤄진다는 점에서, 노동하는 행위자로서 인간의 조건에 대한 성찰은 그의 고유한 권리와 가치에 대한 성찰과 결코 별개의 것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이 후자에 대한 성찰은 하이데거의 시대뿐 아니라 우리의 시대에서도 좀처럼 발견되기 어렵다.

최근 국내의 한 침대 회사 제품들에서 방사능이 검출되었다는 소식이 보도되고 있다. 원자력안전위원회도 이를 사실로 확인했다. 인체에 유해한 정도의 방사능이 매일 사용하는 생활 가구에서 뿜어져 나온다는 것은 너무도 충격적인 일이다. 우리는 응당 사태의 해결과 재발 방지를 위한 조처를 필요로 한다. 우리의 이 필요는 언론에 의해 표출되고 있다. 언론은 폐해와 대처 방안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고, 더불어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의 마련을 촉구하고 나서고 있다. 최소한 이 사태에 있어서 우리 모두는 같은 시각의 소유자들이다. 그래서 더욱 확연히 드러나는 것은 그 시각의 한계다. 그 한계를 우리가 사유하지 못하는 까닭에, 우리는 해당 제품을 제작한 노동하는 존재들의 안전을 여전히 사각 속에 놓아두고 있다.

인간의 모든 문명은 노동을 통해 비로소 이뤄질 수 있었다. 노동은 문명과 운명공동체였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노동은 인간 삶의 근본적 조건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이 근본적 조건에 대한 이해와 고려를 너무도 소홀히해왔다.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노동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이 가져야 할 권리와 가치 그리고 법적 보호 장치에 대한 교육이 거의 이뤄지고 있지 못한 형편이다. 이것은 현재 우리가 처한 노동하는 존재들에 대한 이해 부족의 원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인간 문명 역사를 역행하는 처사이기도 하다.

우리는 새로운 제작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이 새로운 제작의 시대는 인간의 문명 상태를 한 단계 높여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하지만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노동하는 존재는 그 자체로 제작자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에서 새로운 제작의 시대는 새로운 노동의 시대이기도 하다. 새로운 제작의 시대에 우리가 노동하는 존재의 품격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다. 그것은 노동과 노동하는 존재에 대한 깊이 있는 사유에서 출발하며, 이것이 우리가 새로운 제작의 시대를 준비하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이것이 바로 기술문명의 미래가 인간 노동의 미래일 수 있는 조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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