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스스로 해결책 모색… 연구개발 패러다임 전환

기존 R&D시스템 한계극복 가능
연구자 중심서 '소비자'로 이동
유럽선 400여개 프로젝트 진행
"성과 바탕 제도적 체계 더할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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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스스로 해결책 모색… 연구개발 패러다임 전환


■사회문제 해결 나선 과학기술
(2)시민과 함께 숨 쉬는 실험실 '리빙랩'



"처음엔 제가 안저카메라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전문가라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허황된 것처럼 보이던 비전문가들의 아이디어가 제품을 혁신적으로 바꾸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지난 20일 서울 상암동 누리꿈스퀘어에서 열린 '소프트웨어(SW) 융합 기반 서비스 연구개발(R&D) 지역 확산을 위한 리빙랩 활용 방안 연구 세미나'에서 안저카메라 개발 사례를 발표한 김윤택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안저카메라는 눈(안구) 안쪽을 찍을 수 있는 의료장비다. 증상이 잘 드러나지 않는 망막 질환을 조기에 발견할 수 있지만, 가격이 비싸고 사용하기 어려워 공공 의료기관에선 찾아보기 어렵다. 김 교수는 독거 노인들이 두 눈의 시력을 모두 잃을 때가 돼서야 겨우 병원을 찾는 것을 보고 좀 더 저렴하고 사용하기 쉬운 휴대형 안저카메라를 개발해 보급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이 분야에 관심이 많아 기반 기술 특허까지 갖고 있던 전문가였지만, 실제로 제품을 완성시킨 건 의사부터 일반인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참여한 '살아있는 실험실', '리빙랩'(Living Lab)의 힘이었다.

리빙랩은 실제 생활 현장에서 사용자와 생산자가 공동으로 혁신을 만들어가는 실험실을 말한다. 리빙랩의 '랩(Lab)'은 물리적인 공간보단 기술의 최종 수혜자가 되는 시민이 스스로 문제를 발굴하고 R&D를 통해 해결 방안을 탐색하는 혁신 활동 전반을 의미한다. 리빙랩의 등장은 연구자 중심에서 수요자 중심으로 R&D의 패러다임이 이동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김 교수의 경우 제품을 가장 많이 사용할 전문가 그룹인 한국망막학회 회원들의 의견을 구해 제품에 들어갈 기능이 무엇인지 선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시제품을 만들어 대학병원과 안과의원, 의료복지 사회적 협동조합 등 다양한 현장에서 의사와 간호사, 사회복지사 등의 실제 사용 경험을 청취했다. 이를 통해 개발한 제품은 처음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됐다. 제품 자제만 개선된 게 아니라 제품을 더 잘 사용할 수 있도록 메뉴얼과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고, 판독을 위한 지표도 개발됐다. 리빙랩을 통한 지속적인 개선 끝에 현재 이 안저카메라는 의료기기 판매 허가를 받고 해외 진출도 모색하고 있다. 김 교수는 "실제 사용 경험에서 나온 의견이 아니었다면 생각하기 어려웠던 일들이 많았다"며 "첫 시제품과 현재 제품은 재원 상으론 2∼3가지 차이밖에 없었지만, 실제론 전혀 다른 제품이 됐다"고 말했다.

유럽에선 이미 리빙랩이 '오픈 이노베이션'(개병형 혁신)을 위한 핵심 연구 수단으로 자리를 잡으며 400여 개의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고, 아시아 최초로 리빙랩을 도입한 대만은 새로운 정보통신기술(ICT) 혁신 모델과 실험 플랫폼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렇게 리빙랩이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는 이유는 기존 R&D 시스템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되기 때문이다. 리빙랩을 통해 R&D는 기술 개발에서 멈추지 않고 환경·에너지·의료·복지·안전·고령화 등 다양한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질적인 대안을 마련하고, 그동안 수동적인 사용자에 머물던 시민이 직접 참여해 전문가들과 함께 지역과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는 혁신 경험을 쌓으며 사회혁신의 주체로 거듭나게 된다.

한국에서도 그동안 서울, 성남, 대전 등 지역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나선 '1세대 리빙랩' 들이 다양한 경험을 쌓아가며 한국형 리빙랩의 가능성을 보여줬고, 최근 정부도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R&D 체계인 '국민생활연구'를 도입하며 리빙랩을 핵심 실천 도구로 내세워 지원 기반을 마련할 채비를 하고 있다. 성지은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 연구위원은 "최근 리빙랩은 기존 R&D의 한계를 극복하고 탈추격 시대의 새로운 혁신 수요를 발굴할 수 있는 수단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뜨거운 주목을 받고 있다"며 "그동안 실험적으로 수행된 리빙랩들이 보여준 의미있는 성과들을 바탕으로 제도적 체계를 더하면 본격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남도영기자 namdo0@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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