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후 '과학교육국'서 키운 진흥의 꿈 전쟁으로 꺾여
'기술진흥 5개년 계획' 통해 인력 확보·산업 발전 매진
1976년 R&D 투자 600억 넘어 1980년엔 2100억 달해
'기술진흥 5개년 계획' 통해 인력 확보·산업 발전 매진
1976년 R&D 투자 600억 넘어 1980년엔 2100억 달해
■ 과학기술 50년, 미래 50년
(2) 식민통치·전쟁 딛고 틔운 '과학기술의 싹'
대한민국에 과학기술이 싹을 틔운 1966년, 최초의 과학기술연구소인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설립 이후 50년 동안 과학기술은 조선, 철강, 자동차, 반도체, 휴대폰 등 주력 산업의 기반을 마련하며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고도성장을 이끌어왔다.
지금은 개발도상국들이 부러워하며 배우고 싶어하는 과학기술 발전 모델을 가진 한국이지만, 1960년대 이전 상황을 돌이켜보면, 이 땅에 과학기술이 뿌리를 내린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1·2차 세계 대전 이후 냉전 시대까지 현대과학은 강대국들의 군사적, 정치적 필요성과 맞물려 거의 무한정의 사회적·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성장해왔다. 하지만 오랜 일제 식민통치와 해방 이후 전쟁으로 초토화된 한반도에는 과학기술의 씨를 심을 작은 텃밭조차 없었다. 부족한 자금과 인적 자원, 열악한 정부 시스템과 산업 기반 등 모든 여건이 과학기술 발전을 뒷받침하기에 부족했다. 무엇보다 당장 국민이 기아와 질병에 허덕이고 있는데 모자라기만 한 국가 살림을 과학기술 발전에 쏟는다는 결정 자체가 쉽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후손들에게 잘 사는 나라를 물려 주기 위해 과학기술 진흥을 꿈꿨던 과학기술인들의 의지와 국가 리더의 결단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전혀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해방 후 과학기술 진흥 노력= "우리나라 과학을 진흥하자면 어떻게 하느냐고 입으로만 따지지 말고 먼저 실천을 해야 하겠습니다."
1948년 국내 최초의 화학박사이자 서울대학교 문리대 초대 학장을 지낸 이태규 박사는 해방 후 정부 수립을 앞두고 한 언론과의 대담에서 이같이 강조하며 "(과학 진흥을)어느 부의 부속기관으로 맡기는 것은 부당하다. 과학기술부를 만들어 거기서 근본정책을 세우고 공업발전계획이나 과학진흥계획 같은 계획을 세워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제강점기에 배출된 조선인 이공계 대학 졸업자는 약 300명, 박사학위 소지자는 고작 12명에 불과했다. 한반도에 설치된 과학기술 기관들은 일본에 있던 과학기술 중앙기관들의 분소로 대개 규모가 작았고, 독자적인 운영 체계를 갖추지 못했다. 게다가 일본인들은 과학기술 기관들을 운영하며 고급 행정과 교육, 연구 활동에 조선인들을 거의 참여시키지 않아 전문인력도 매우 부족했다.
해방과 함께 맥아더 장군은 '일본이 물러간 기관은 조선인들이 접수해 질서를 잡으라'는 전단지를 뿌렸고, 몇 안 되는 과학기술인들이 주인이 없어진 연구소를 맡아 활동했다. 하지만 일제가 자국으로 돌아가며 파괴한 연구 현장에서 국가적인 과학기술 지원 체계조차 없이 제대로 된 연구활동을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해방 이후 과학기술계와 교육계는 과학기술 진흥의 중요성을 주장하면서 정부가 앞장서서 과학기술 중추기관을 설립하고 과학교육에 힘써줄 것을 요구했다. 이태규 박사를 비롯한 과학기술계 주요 인사들은 당시 국정을 담당하던 미 군정에 '과학교육진흥책'과 '과학기술부 설치안'을 제출했다.
당시 과학교육진흥책에 따르면 한반도의 생산시설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과학기술자 수는 약 4만 명이었지만, 실제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인원은 1100여 명에 불과했다. 이런 생산인구 부족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과학기술계는 고등교육 정책에서 문과계와 이과계 졸업자 수 비율을 3대 7로 조정하고, 향후 25년 동안 의학 6개교, 이공학 3개교, 농학 3개교, 수산 2개교, 사범 4개교의 고등교육 기관을 늘리자고 제안했다.
이어 발의한 과학기술부 설치안에는 기존 과학기술 기관들을 독자적 운영체계로 개편하고 전국의 과학기술 연구기관을 국가의 통제 아래 두고 관리한다는 구상을 담았다. 국내 최초의 과학기술 행정체계안이라고 볼 수 있는 이 안에서는 기술행정과 특허, 과학진흥 사무와 두 개의 연구기관 관리기구 등 5개 국을 두고, 과학기술 행정에 대한 자문과 의사결정에 관여할 과학심의회, 일본의 이화학연구소와 같은 종합연구소를 설치하자고 제안했다.
장기계획을 통해 국내 과학기술이 독립된 형태로 체계를 갖출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던 과학기술계의 이 같은 제안은 아쉽게도 실현되지 못하고 폐기됐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당시 과학기술부는 설치되지 않았고, 과학기술 관련 업무는 교육, 과학, 기술, 예술, 체육 등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는 문교부 소관으로 규정됐다. 과학기술 사무를 위해 문교부는 '과학교육국'을 뒀고, 여기에는 과학의 진흥과 보급에 관한 사항을 담당하는 '과학진흥과'가 설치됐다. 과학교육국은 산업, 공업, 수산, 직업 등 실업교육에 주력했으며, 1950년에는 기술교육국으로 이름을 바꿨다. 하지만 애초에 교육이 주된 임무였던 문교부가 업무의 일부였던 과학진흥을 위해 체계적인 정책을 입안하거나 집행하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 전쟁으로 꺾인 과학기술 진흥의 꿈= 해방 이후 비록 하나의 국 단위였지만 '과학교육국'이 설치되며 가까스로 진흥의 싹을 틔운 과학기술은 1965년 6·25 전쟁으로 인해 다시 한 번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전쟁으로 많은 교수진이 사망하고 대학 등 연구 현장이 파괴됐을 뿐만 아니라, 이념 대립 등으로 당시 과학기술 인재의 30∼40%에 달하는 80여 명의 유능한 과학자들이 북한으로 넘어갔다.
1950년대 이승만 정부 시기는 국내 과학기술 발전 역사에서 '잃어버린 10년'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정부 입장에서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치고 시설들이 파괴된 상황에 국가 살림의 일부를 과학기술에 투자하기란 어려운 선택이었다.
6.25전쟁 이후 과학기술 분야의 재건 활동은 국제기구, 주로 미국 원조기구가 수행하는 원조사업의 일부로 수행됐다. 이승만 정부는 시도하고자 하는 기획과 원조기구의 판단 사이에서 늘 긴장 상태에 놓여있었다. 원조기구는 한국 정부가 추진하고자 하는 과감한 시도들을 냉정하고 객관적인 '기술적 판단'에 따라 기각하고자 했고, 한국 정부는 미국의 지나친 국정 및 국책사업 개입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이런 복잡한 정치적 환경 속에 과학기술 재건 사업은 미국의 원조로 이뤄진 '미네소타 프로젝트'를 통한 서울대학교 재건 등 일부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주로 대형 원조사업의 일부로 산발적으로 추진되다 보니 국가 전체의 발전 청사진 속에서 과학기술에 대한 기획이나 정책 역량을 쌓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1959년에는 대통령 직속으로 원자력 연구, 개발, 생산, 이용과 관리에 관한 사항을 관장하는 '원자력원'이 설치됐다. 원자력원은 과학기술과 관련된 최초의 독립 행정기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원자력이라는 제한된 분야만을 관장했고, 과학기술 전반에 대한 체계적인 정책 수립과 실행에는 이르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었다. 원자력원 설립을 위한 원자력법의 입안 과정에서 아예 '과학부'를 창설하자는 제안도 나왔지만, 당시 불안정한 정치적 상황에 의해 구체화하지 못했다.
이처럼 1950년대에는 과학기술계의 의욕에도 불구하고 과학기술 진흥에 관한 종합적인 정책이나 이를 지원하는 통합된 행정체제가 없어 과학기술 발전을 위한 특별한 사업이 이뤄지지 못했다. 사실 당시까지 과학기술이라는 문제 자체가 정부나 정치권의 주된 관심사가 아니었다. 1960년 2월 자유당은 과학기술 진흥을 사상 최초로 공약으로 내세웠지만, 두 날 뒤 4·19혁명으로 시작조차 해보지 못하고 끝이 나고 말았다.
◇ 경제 자립을 위한 과학기술= 1961년 집권한 미국 케네디 정부는 국제수지 악화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대외 무상원조를 감축하려는 움직임을 반영한 '대외원조법' 새로 제정했다. 이 법은 무상원조는 개발차관으로, 방위지원은 경제개발로 대외 정책을 전환하려는 점을 명확히 했는데, 이는 국가 재정의 대부분을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던 한국 정부에 위기를 의미했다.
한국 정부는 당장 경제자립도를 높여야 했기 때문에 경제개발과 자립 경제, 공업화 정책을 국정 최대 현안으로 다루게 됐다. 이승만 정부는 '경제개발 3개년계획'을 수립하면서 농림수산업과 함께 광업, 제조업, 전력, 교통, 통신 등 공업 부문의 투자를 확대한다는 계획을 구상했다. 하지만 이 계획은 4·19혁명으로 실행되지 못했고, 이후 장면 내각 역시 공업화를 중심으로 한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수립했지만 5·16 군사정변으로 실현하지 못했다.
한국 정부는 점차 농업사회에서 공업 중심 산업사회로 이행하려는 국가 전략을 구체화했지만, 국제 원조기구의 많은 전문가들은 한국에서 공업화가 가능할지 확신하지 못했다. 1945년부터 1961년까지 미국이 한국에 원조한 총액은 56억달러에 달했지만, 한국 경제가 뚜렷이 나아졌다고 볼만한 성과를 찾기 어려웠다. 오히려 1962년 미국 의회 감사보고서에는 미국의 원조로 인해 한국의 부패와 사치, 비경제적 수입이 조장되고 있다는 혹평이 실렸다. 같은 해 차관 도입을 위해 한국을 조사한 국제개발협회(IDA) 역시 한국 정부의 경제개발계획이 비현실적이며 IDA 차관 도입도 쓸모없는 일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5·16 이후 박정희 정부 역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수립하면서 핵심 전략을 공업화에 뒀다. 이 계획에서 광업과 제조업 등 2차 산업의 연평균 성장률은 전 산업 분야 7.1%의 두 배가 넘는 14.8%로 책정됐다. 3차 산업의 연평균 성장률은 5.7%였지만, 그중 전기와 통신 부문 연평균 성장률은 20%, 운수·보관 산업은 10%가 넘도록 계획했다. 이런 야심 찬 '고도성장'을 달성하기 위해선 외국으로부터 차관을 적극 도입해 수많은 공업시설과 인프라를 건설해야 했다.
하지만 외국 차관을 도입하기 위해선 차관 당국에 국내에 경제개발 사업을 추진할 만한 역량이 있다는 신뢰를 줘야 했다. 특히 '기술 역량'은 반드시 필요한 요소였다. 대규모 공장과 산업 시설을 설립한 후, 이를 국내에서 운영할 능력의 상당 부분이 기술적 역량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를 깨달은 박정희 대통령은 1962년 1월 초 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내용을 보고한 경제기획원 업무보고 회의에서 국내 기술 현황에 대해 물었다. "투자 계획을 뒷받침할 기술 차원의 대책이 있느냐"는 지적에 주로 산업별 생산 목표와 투자 계획에 대해 보고를 준비했던 경제기획원 공무원들과 경제 전문가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박 대통령의 질문은 새로운 국가 차원의 과학기술정책 수립으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정부는 단기적으로 경제 개발에 필요한 과학기술을 조달하는 문제부터, 장기적으로 사회에 만연한 기술 천시 문화를 극복하는 문제까지 다루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1962년 수립된 '제1차 기술진흥 5개년계획'에서 국내 과학기술 수준이 세계에서 가장 낙후된 상태라고 진단한 정부는 우선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수행에 필요한 기술인력을 확보하고, 산업 발전과 생산성 향상을 위한 기술 수준을 높이는 것을 목표로 정했다.
◇ 국내 최초의 과학기술 전담 부처 탄생= 박정희 대통령은 과학기술을 단순히 경제개발의 수단으로 한정해 도구화하지 않고, 문화적·역사적 진보를 위한 핵심으로 이해했다.
"인류문명의 역사는 바로 과학기술의 발전사이며, 그 진보의 확보는 국력의 척도가 된다"는 박 대통령의 전문이 담긴 '제2차 과학기술진흥 5개년계획'에서는 경제 성장과 함께 과학기술 자체의 발전을 추구하고자 하는 노력이 더해졌다. 1차 계획이 기술인력 양성에 초점을 뒀다면, 2차 계획은 과학기술에 대한 투자 확대와 제도 구축에 중점을 뒀다.
1966년을 기준으로 1980년까지 과학기술 발전에 힘입어 자립 경제에 도달할 것을 목표로 삼은 2차 과학기술진흥 계획은 1인당 국민총소득이 100달러 안팎인 상황에서 연 100억원을 과학기술에 투자할 것을 명시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에도 장기 투자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를 통해 1976년 연구개발 투자 총액은 600억원을 넘어섰고, 1980년에는 2100억원에 달했다. 이와 함께 과학기술 연구성과를 산업에 활용하기 위해 산업에 필요한 기술별로 개발 목표치를 설정하는 작업이 진행됐다. 이런 연구개발 과제는 1966년 설립된 KIST를 중심으로 수행됐다.
대통령 차원의 과학기술 지원 의지는 점점 강해져 1967년 국내 최초의 과학기술 전담 부처인 '과학기술처'가 설치됐다. 당시 박 대통령은 과학기술처 개청식에 참석해 과학기술처가 '강력한 행정력'으로 과학기술 발전의 중추적 역할을 맡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당시 개발도상국 중 각료급 과학기술 전담 부처를 갖춘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했을 정도로 과학기술처 설립은 과학기술 정책에 큰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남도영기자 namdo0@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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