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별 1호 '우주강국의 꿈' 시작 나로호 이어 달 탐사 도전으로
우주·해양 등 거대과학 불모지서 가속기 구축 세계서 기술력 인정
설계부터 건설까지 우리 힘으로 한국형 연구용 원자로 수출 성과
우주·해양 등 거대과학 불모지서 가속기 구축 세계서 기술력 인정
설계부터 건설까지 우리 힘으로 한국형 연구용 원자로 수출 성과
■기술로 이룬 70년 성장신화
(5) 거대과학 씨앗 뿌린 1990년대
지난 1992년 8월 11일 한국시각 오전 8시 8분 남미 기아나 쿠루 우주센터. 유럽 12개국이 공동 개발한 '아리안 발사체'가 흰 연기를 내뿜으며 상공으로 힘차게 날아올랐다. 사람들 속에서 우리나라 위성 개발팀도 숨죽인 채 발사 현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발사체 안에는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개발한 인공위성 '우리별 1호'가 실려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별 위성 개발이 시작된 1989년 이전까지 한국의 우주분야는 불모지에 가까웠다. 당연히 인공위성을 만들 수 있는 기술도 전혀 없었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은 인공위성에 관련된 기술을 기초부터 배워오라며 졸업생을 선발해 영국 서리대학으로 유학을 보냈다. 때마침 그곳에서는 '서리대학인공위성 5호'를 준비하고 있어 기술을 습득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유학생들은 서리대학의 기술을 지원받아 인공위성을 만들기 시작했다.
우리별 1호는 무게 48.5㎏에 크기는 길이 67㎝, 높이 35.2㎝, 너비 35.6㎝의 초소형 위성이다. 아리안 발사체에 함께 실린 미국과 프랑스의 합작 위성 '토팩스 포세이돈'의 무게는 무려 2.4t에 달했다. 하지만 우리별 1호는 한국에 우주개발의 싹을 틔울 작지만 소중한 씨앗이었다.우주를 향해 날아간 우리별 1호는 고도 1300㎞, 지구 경사각 66도의 궤도에 안착했다. 우리별 1호가 첫 교신에 성공하자 KAIST 인공위성연구센터 지구국에선 환호성이 터졌다. 한국은 소련이 1957년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를 발사한 지 35년 만에 세계 22번째로 인공위성 보유국이 됐다. 대한민국의 우주 도전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첫발을 뗀 기쁨도 잠시, 우리별 1호는 개발 과정에 서리대학의 도움을 받은 데다 영국에서 모든 부품을 조달해 만들었다는 점 때문에 '남의 별'이란 비아냥을 들어야만 했다. 먼 타국에서 어깨너머로 기술을 배워가며 위성 개발에 매진해온 젊은 연구원들의 자존심은 크게 흔들렸다. 한국으로 돌아온 연구원들은 곧바로 우리별 2호 개발에 착수했다. 비록 위성 자체는 우리별 1호와 같은 모델이었지만, 설계와 조립은 모두 국내 연구원들의 손으로 모두 이뤄졌다. 약 1년 만인 1993년 9월 26일, 우리별 2호는 우리별 1호가 탔던 아리안 발사체를 타고 다시 지구 궤도에 올라갔다.
이후 1995년 8월 한국의 첫 상용위성인 '무궁화위성 1호'가 발사돼 통신방송위성 시대를 열었고, 이어 1999년 12월에는 최초의 실용위성인 '아리랑 1호'가, 2003년 9월에는 '과학기술위성 1호'가 발사됐다. 이 사이 우리별 1호는 2000년에 위성으로서 의 임무를 마감했다. 예상 수명은 5년이었지만 3년 더 작동했다.
우리별 1호로 시작된 우주 강국의 꿈은 2013년 1월 국내 첫 우주발사체인 '나로호'로 이어졌고, 한국은 이제 2020년 달 탐사를 목표로 도전을 계속해나가고 있다.
◇거대과학시설 투자 시작=1999년 한국과학기술평가원에 따르면 당시 우리나라의 전자·정보·통신 기술 분야는 세계 최고기술 수준 대비 71.1%로, 약 2.6년의 기술격차가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가장 기술 수준이 낮은 분야는 환경·지구과학 분야로 세계 최고 수준의 60.6%, 6.5년의 격차가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상대적으로 기술역사가 짧은 반도체와 소프트웨어 등의 분야는 선진국과 기술격차가 작았으나, 역사가 깊은 기초과학이나 우주, 해양 등 거대과학 분야는 격차가 컸다. 이런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1990년대 과학기술인들은 불모지나 다름없던 거대·기초과학 분야에 뛰어들어 21세기 대한민국의 과학기술 경쟁력을 세계 10위권에 올려놓았다.
1987년 말 박태준 포항제철(포스코) 회장은 김호길 포항공대(포스텍) 초대학장의 가속기 건설 요청을 받아들여 당시로는 천문학적인 금액인 1000억원을 투자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동안 간절히 바라던 바였지만, 김 학장은 덜컥 겁이 났다. 당시 국내에는 가속기를 사용해 본 경험자가 10명도이 안 될 정도로 전문가는 전무했고, 사실 가속기 같은 거대과학시설에 대한 개념조차 없던 상황이었다.
포항제철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김 학장과 포항공대 교수진은 방사광가속기 건설을 추진해 포항시 지곡동에 6만5000여평 부지를 조성하고 직경 88m, 둘레 280m의 규모의 가속기를 짓기로 계획을 세웠다. 방사광가속기는 전자를 광속에 가깝게 가속시켜 태양 빛의 수백만∼수억 배에 달하는 밝기의 빛을 만든 후, 이를 이용해 물질을 나노 수준으로 정밀하게 탐색하는 장치다. 기초과학에서부터 신소재 개발, 유전공학, 화학공업, 신약 개발 등 응용과학과 산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 활용된다.
김 학장은 발로 뛰며 외국 전문가들을 불러 가속기 건설 참여를 부탁했지만, 조건이 안 맞는다는 이유로 되돌아가기 일쑤였다. 결국 김 학장은 국내 연구진으로만 가속기를 건설하기로 마음먹었다. 자석제작은 포항공대 재료공학과 교수들에게 맡기고, 가속기 제어는 전자공학과 교수에게 맡기는 식이었다.
1994년 12월 7일, 세계 5번째로 구축된 3세대 방사광가속기의 건설이 완료됐다. 거대연구장치를 세워본 경험이 없는 상황에서 국내 연구진의 힘만으로 가속기 구축에 성공하자 세계가 한국의 과학기술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방사광가속기 건설에는 포항제철 출연금 864억원, 정부 지원금 596억원 등 총 1500억원의 재원이 투입됐다. 우리의 과학기술 역사에서 기초과학에 대한 최초의 '투자다운 투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포항 방사광가속기는 1995년 9월 개방된 이후 1만5000여명의 과학자와 기술자가 4000여건의 연구과제에 활용했으며, 이를 통해 국내·외 학술지에 2200여편 이상의 논문이 발표될 정도로 물리, 화학, 생명과학 등 기초과학의 초석을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 광통신 소자의 비파괴분석을 수행하고 전자제품 소자와 철강제품 등의 생산공정에서 불량률을 낮추는 기법을 개발하는 등 산업적으로도 다양하게 활용됐다.
가속기는 흔히 '노벨상을 낳는 장비'로 불린다. 역대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다섯 명 중 한 명은 가속기를 활용해 연구를 했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다. 올해 말 전 세계 3번째로 완공하는 것을 목표로 건설 중인 4세대 방사광가속기를 비롯한 한국형 양성자가속기와 중이온가속기 등의 구축을 통해 한국에서도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가 나올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다.
◇한국형 연구용 원자로, 세계 수준으로 발돋움=1995년 4월 7일, 우리 자체 기술로 설계 건설한 30㎿급 연구용 원자로 '하나로'의 준공식이 열렸다. 하나로 사업이 처음 추진된 1985년 사업단장을 맡아 10년 동안 개발에 온 힘을 쏟은 고 김동훈 박사는 당시 언론과 인터뷰에서 "우리 기술로 연구용 원자로를 만들어 사용하는 것은 지난 70년대부터 이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꿈이었다"며 "이제 고생 끝에 세계 수준의 연구용 원자로를 준공하게 돼 무척 기쁘다"고 감격 어린 소감을 밝혔다.
당시 세계적으로 상업화된 연구용 원자로가 없어 외국에서 기술을 들여오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야말로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 힘으로 설계와 건설에 필요한 기술을 얻어야 했다. 하나로라는 이름에도 사연이 있다. 다른 선진국처럼 이용 분야에 따라 여러 개의 전문적인 원자로를 지을 형편이 안됐기 때문에, 한 개 원자로를 가능하면 많은 분야에 쓸 수 있어야 했다. 때문에 '연구용과 개발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하나밖에 없는 원자로'라는 뜻으로 '하나로'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하지만 창의적인 설계는 오히려 하나로를 세계 최고의 다목적 연구용 원자로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하나로는 발전소용 상용 원자로의 성능 및 안전성 향상을 위한 핵연료와 원자로 재료 실험, 의료용 산업용 방사성 동위원소 생산, 대전력 고품질 실리콘 반도체 생산, 중성자 빔을 이용한 기초연구·첨단소재 개발 등 기초과학과 산업 연구 분야에서 고루 활용돼 이름값을 톡톡히 해냈다. 이런 성과는 세계적으로도 인정받아 2009년 요르단에 하나로를 참조 모델로 하는 한국형 연구로가 처음으로 수출됐으며, 지난해에는 네덜란드 델프트 공대 연구로 개선사업인 '오이스터 프로젝트' 수주에 성공했다.
하나로와 더불어 1990년대 국내 원자력 연구는 한국형 표준원전 설계·건설 기술 확보와 중수로용 개량 핵연료 국산화, 연구로용 고밀도 핵연료 제조기술 개발 및 기술수출, 방사성의약품 및 동위원소 국산화 등의 성과를 거둬 현재 한국이 세계 5위권의 원자력 기술 강국으로 거듭나는 발판을 마련했다.
남도영기자 namdo0@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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