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대 어젠다] 단기성과에 급급 ‘나눠주기 R&D’만 범람
신기술 나와도 뒷받침 못하는 행정 등 후진형 시스템
신기술 나와도 뒷받침 못하는 행정 등 후진형 시스템
■ 창간 15주년 기획-15대 어젠다
(9) `혁신` 잃은 연구현장
1994년 삼성전자의 256M D램 세계 최초 개발과 1996년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상용화 성공, 2001년 세계 최초 40인치 TFT LCD 개발.
현재 대한민국 경제를 떠받치고 있는 반도체와 이동통신, 디스플레이 산업이 세계 선두권으로 올라서는 데 결정적인 전기가 된 사건들이다. 이들 기술의 공통점은 1990년대 정부가 추진한 대형 국가R&D 사업인 'G7프로젝트'에서 탄생했다는 것이다. 10년간 정부예산 1조5710억원과 민간투자 1조9619억원 등 총 3조5329억원이 투입된 이 프로젝트를 통해 미래 산업의 씨앗이 싹을 틔웠다.
그러나 훨씬 더 많은 돈을 R&D에 투입하는 2015년, 연구현장은 더 이상 이 같은 파괴적인 대형 신기술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국가 성장전략과 R&D 전략이 따로 놀고 정부가 전략과 큰 그림 없이 나눠주기식 R&D를 하는 가운데, 신기술이 나와도 행정과 금융, 규제가 못 따라가는 후진형 시스템이 이어진 결과다. 연구자들은 연구자들대로 실패 위험 때문에 혁신적 연구를 할 수 없는 현 시스템을 뜯어고쳐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가장 큰 문제는 전략 없이 무작정 연구자들에게 연구비를 안기고 보는 R&D시스템이다. 우리나라 R&D 예산은 약 18조로, GDP 대비 규모에서 이스라엘에 이어 세계 2위다. 특허, 논문 수도 각각 세계 4위, 10위로 성장했다. 그러나 연구비로 벌어들인 기술료 수입을 환산한 생산성은 갈수록 낮아지고 있다. 정부출연연의 연구 생산성은 2013년 3.93%로 전년 4.52%에 비해 더 낮아졌고, 대학 등 공공연구기관의 생산성은 더 낮아 2012년 기준 1.49%에 불과했다. 이는 미국(3.93%)의 절반도 되지 않는 수치다. 국가 기술무역수지도 2013년 51억9300만달러 적자로 갈수록 적자폭이 커지고 있다.
파괴력 있는 기술이 나오지 못하는 것은 연구자들이 연구과제를 수주해 인건비를 충당하는 연구과제중심제도(PBS)의 영향이 크다. 이 때문에 단기 프로젝트가 늘고 한 연구자가 동시에 하는 연구과제 수도 크게 증가했다. IT강국의 기술 산실 역할을 해온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의 경우 정부가 지원하는 출연금은 16.7%에 불과하다. 나머지 재원은 PBS로 채워야 해 연구원들은 수주현장에 내몰리고 있다. 2013년 미래창조과학부 산하 25개 출연연의 연구원 1인당 연간 수행 연구과제는 평균 4.9건에 달했다.
출연연 한 중견연구자는 "연구자로서 욕심 나는 혁신적 연구보다는 과제에 선정될 만한 연구를 찾게 되고, 정부가 단기적 성과를 강조하다 보니 개발한 기술을 안정적으로 시장에 안착시키는 것도 더욱 어려워졌다"고 밝혔다.
민철구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 박사는 "PBS 환경에서는 논문, 특허 등을 먼저 챙겨야 해 도전적 연구에 나서기 쉽지 않다"며 "연구기관 고유의 특성에 맞는 연구가 이뤄지도록 출연연 자체 예산을 대폭 늘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새 정부가 출범할 때마다 새 정책구호를 내놓으면서 R&D 정책도 갈지자 행보를 하는 것도 고질병이다. 지난 정권에서는 '녹색' 과제에 투자가 집중됐고, 기초원천 연구와 산업화 연구가 확실히 구분됐다. 기초원천 연구과제에 기업을 참여시키는 것도 암묵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러나 이번 정권에서는 사업화와 창업에 정책이 쏠리면서 기초원천 연구사업도 일자리 창출과 사업화 성과로 평가받고 있다.
여러 정부부처에 흩어진 R&D 시스템과 복잡한 규제도 문제다. 각 부처가 유기적 연계 없이 사업을 발주하면서 집중도가 크게 낮아졌다.
이우일 서울대 부총장은 "미국, 독일, 프랑스는 국가R&D 평가기관이 단 하나지만 우리나라는 13개 부처에 17개 전문평가기관이 있고, 연구비 관련 규정은 무려 372개에 달한다"며 "연구자들은 규정을 숙지하는 데 시간을 다 보내면서 제대로 된 연구를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유럽, 미국 등에 비해 턱없이 짧은 연구기관장 임기도 문제로 지적된다. 출연연 기관장 임기는 3년으로, 이마저 정권에 영향을 받아 다 채우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렇다 보니 기관만의 장기연구도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이병권 KIST 원장은 "1996년 설립된 KIST 유럽연구소는 지난해말 7대 소장이 취임했지만, 이보다 앞서 설립된 독일 신소재연구소(INM)는 같은 시기 2대 소장이 선임됐다"며 "연속성 있는 연구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연구현장에 활력을 불어넣으려면 무엇보다 출연연에 불필요한 족쇄를 채우는 공공기관 지정을 해제하고, 연구자들도 자발적 쇄신을 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권동일 서울대 교수는 "출연연이 공공기관이라는 획일화된 기준에 묶여 규제를 받으면 혁신적 연구를 하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연구현장에서는 국민 생활과 경제에 도움을 주는 신성장동력을 확보하고 있는지 스스로 되돌아보고, 현장 밖에서는 연구현장에서 잘하고 있는 부분과 부족한 부분들을 정확히 짚어주면서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백나영기자 100na@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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